d라이브러리









[Editor’s note] 끝과 시작



한동안 주역에 빠져 살았다. 흔히 오해하듯, 책 한 권에 세상 만사의 오묘함과 신비함을 다 품고 있을 것 같아서는 아니었다(세상에 그런 책이 어디 있겠는가). 그냥 ‘점 보는 책’으로 봤다. 물론 점을 보는 데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었고, 그저 재미로 본 것도 아니었다. ‘변화의 책’이라는 영어판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주역 안에는 비록 어수선하나마 변화의 묘가 있었고, 나는 거기에 오래 매료돼 있었다.

주역은 음양 두 개의 효를 마치 디지털 기호를 다루듯 사용하고, 이 효를 여섯 개씩 조합해 괘 여덟 개를 만든 뒤 이걸 다시 두 개씩 겹쳐서 의미망을 구성한다. 64개의 괘는 별로 연관도 규칙도 없어 보이며 여섯 개의 효 역시 비슷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우연히 만들어진 수천 년 전 글귀 모음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런 주역이 눈부신 변화의 내용을 담는 순간이 있다. 바로 효와 효, 괘와 괘가 만나 의미의 충돌을 일으킬 때다. 난해하고 재미없는, 뜬금없어 보이는 구절 하나하나가 ‘연결’을 통해 새롭고 역동적인 의미를 얻어간다.

주역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는 64괘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괘다. 이름은 ‘미제(未濟)’.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괘는 바로 앞에 놓이는 63번째 괘 ‘기제’와 짝을 이룬다. 기제의 뜻은 완성이다. 그러니까 주역의 세계에서는, 완성 이전과 이후가 순서상 완벽히 뒤바뀌어 있다. 그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완성된 것, 끝난 것, 가지런한 것은 모두 변화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우주도 그렇지 않은가. 태초에 에너지의 미약한 불균질함이 생긴 뒤에야 은하와 별도 탄생할 수 있었다.

‘변화의 책’인 주역은 결코 완성이라는 일방향으로 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굳이, 우주적 완성을 의미하는 괘 다음에 다시 모든 게 어긋난 상태를 두는 것일 테다.

이번 호를 받은 독자는 제호 아래에 숨은 숫자를 한번 봐주시길 부탁드린다. 360. 한 해에 12번 나오는 잡지가 360호를 맞았다. 만 서른 살이 됐다는 뜻이다. 청년기를 끝내는 시점이며, 무언가 인생의 매듭 하나는 맺었길 바라는 성인의 나이다. 하지만 과학동아는 이 시기를 ‘기제’의 상태 대신 ‘미제’의 상태로 맞겠다. 30주년 기념호가 될 2016년 1월호를, 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판형, 새로운 디자인, 새로운 내용으로 채운다.

이번 호는 30년 판형의 마지막 호가 될 것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한 시대의 끝이다. 하지만 미제의 세계에서, 끝은 시작이다. 그 끝과 시작을, 독자 여러분이 변함없이 함께 해 주시리라 믿는다.


2015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편집장 윤신영 기자

🎓️ 진로 추천

  • 문화콘텐츠학
  • 철학·윤리학
  • 문화인류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