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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앞에서 우리는 왜 똑똑하지 못할까

유형별 안타까운 행동들

지난해 3월 11일 일본 서북부 해안에 수십m 높이의 지진해일(쓰나미)이 밀어닥쳤다. 근처의 미야기현 나토리시 유리아게 마을은 그나마 운이 좋았다. 지진이 일어난 뒤 한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지진 해일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 인구 5600명 중 700명이 사망했다. 한 시간이 넘는 동안 700명의 희생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생존자를 중심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한 결과, 그들의 행동은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지진해일 경보가 울려도 태연하게 하던 일을 계속 이어가는가 하면 멍하니 그 자리에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이 비행기 테러로 무너질 때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경보가 울리자 바로 대피한 사람이 22%밖에 되지 않았다. 왜 사람들은 죽을지도 모르는 재난 상황에서 잘 대처하지 못할까. 흔하지 않은 죽음의 공포 때문에 뇌가 멈추고 인지능력의 한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재난이 일어날 때 자주 등장하는 안타까운 행동들을 만나보자.

긴장형 그대로 얼음!

긴장형은 위기 상황에서 그대로 얼어붙은 채 어떤 대처행동도 하지 않는다. 대구 지하철 사고에서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었던 승객이 적지 않았다. 생리적으로는 패닉형과 비슷하지만 행동은 광장공포나 고소공포 또는 뱀과 같은 동물공포증 환자와 비슷하다.

쥐나 토끼는 솔개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도 그대로 앉아서 잡아 먹힌다. 언뜻 보기에 말도 안 되는 행동 같지만, 여기에는 진화적 이유가 있다. 오래전부터 공룡이 지배하던 시기에 포유류의 조상인 작은 설치류는 공룡을 피해 다녔다. 설치류는 움직임에 민감한 공룡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재빠르게 도망가기보다 가만히 있는 방법을 택했다. 얼어붙은 채 가만히 있는 것이 그들의 생존전략이었던 셈이다.

긴장형 인간은 주변에서 조난구조활동을 할 때까지 현장에 얼어붙어 있기 때문에 주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정신분석학적으로는 불안상황에서의 퇴행(regression)이라고 한다. 무기력한 아이로 돌아가서 주변에 있는 힘 있는 사람의 도움을 원하는 것이다.






 


패닉형 눈앞에 두고도 못 찾는 비상구

패닉형은 공포에 질려 아우성을 치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주변 사람까지도 불안하게 만들고 적절한 대처행동을 방해한다(영화 속에 흔히 등장한다).

패닉형은 심리적으로 공황장애나 공포장애 환자를 닮았다. 공황발작이 일어나면 심장이 빨리 뛰고 숨이 가빠진다. 온몸이 떨리면서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어지러우면서 온몸이 마비된다.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거나 차가워지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의 뇌를 보면 변연계와 편도체가 과도하게 활성화돼 있다. 이 때문에 매우 불안정한 상태가 된다. 대뇌 신피질의 활동도 억제돼 인지능력이 매우 떨어진다.





패닉형은 재난 상황에서 눈앞에 창문 유리를 깨는 비상탈출망치가 있어도 보지 못한다. 비상구를 바로 앞에 두고도 사방을 헤맨다. 지하철의 경우, 수동개폐장치를 찾지 못하고 출구 쪽으로만 몰려간다. 심지어 넘어진 사람을 밟고 지나간다. 패닉형은 끔찍한 결말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1903년 시카고 극장에서 일어난 화재는 15분 만에 진화됐지만 사망자만 575명에 이르렀다. 대부분 압사하거나 질식사했다.

패닉형 인간은 사건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고 심리적으로 안정될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재난상황은 그런 여유를 주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심리학 용어가 인지적 통로화와 기능적 고착화다. 인지적 통로화는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해 주변에서 일어나는 더 심각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행기 조종사가 착륙할 때 계기판의 비정상적인 지표를 해석하느라 바퀴 내리는 것을 잊는 바람에 더 큰 사고를 낸다. 기능적 고착은 상황이나 물건의 사용법을 유연하게 해석하지 못하는 것이다. 편지봉투를 뜯을 때 앞에 있는 빗으로 할 수 있는데도 굳이 칼을 찾아 나선다. 지하철에서 불이 났을 때 수동개폐장치를 돌릴 생각은 하지 않고 손으로만 밀려고 애쓰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우유부단형 어떻게 할까 고민만 계속

경고음이 울려도 탈출해야 할지, 그냥 있어야 할지 우왕좌왕하다 탈출 시기만 놓치는 유형이다. 긴장형이나 추종형과 비슷한 면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휩쓸려 따라하거나 숨이 가빠지는 등 격렬한 공포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관리자가 상황을 정확하게 알리고 안내한다면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한 정보가 없으면 스스로 필요한 행동을 적절한 시기에 하지 못하고 실수만 하게 된다.

다시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를 보자. 지하철 직원은 화재 경고등이 켜진 것을 보고도 잘못된 것으로 착각해 사고 안내를 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를 심리학적으로 과오라고 한다. 옆 차량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도 전동차를 진입시킨 것은 지식기반 착오다. 상황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없을 때 나타난다. 불이 나면 정차하지 않고 통과해야 하는데도 차를 멈춘 것은 규칙 기반착오다.

우유부단형은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정보가 부족할 때 잘 드러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유형에 해당한다. 이들에게는 적절한 매뉴얼과 안전대피 훈련, 적절한 안내방송이 필요하다. 재난이 일어나면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생필품을 사재기하거나 약탈하는 등 패닉 상황이 나타난다. 그러나 지난해 일본에서 지진해일과 원전사고가 났을 때 이재민들은 침착하게 행동했고, 구호품을 배분할 때도 차례로 줄을 섰다. 이는 장기간의 체계적 훈련과 안내 방송을 통해 패닉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혹자는 일본의 국민성을 그 이유로 들지만, 필자는 그리 동의하지 않는다).





추종형 사람들만 따라 할래

이 유형은 재난상황에서 공황발작 증세를 보이지 않는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행동하는 대로 따라한다. 사람은 주변사람들의 행동과 의견을 따르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동조라고 한다. 유명한 심리학 실험이 있다. 길이가 조금 다른 선분 두 개를 보여주고 어느 것이 긴지 판단하게 하는 것이다. 처음 세 명은 모두 짧은 선분이 더 길다고 말했다. 사실 세 사람은 실험 도우미였다. 그러자 네 번째 실험참가자, 즉 진짜로 실험에 참가한 사람도 머뭇거리다가 세 사람이 말한 대로 짧은 선분이 더 길다고 말했다. 이것이 동조현상이다.

재난같이 상황에 대한 해석이 모호한 경우에는 동조 현상이 더 잘 일어난다. 대구 지하철 사고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동차에 연기가 자욱해지는 상황을 보고도 눈치만 볼 뿐 아무도 탈출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불안해만하다 불길이 번지자 출입문 쪽으로 달려갔다. 모두가 엉켜 붙었고 상황은 더욱 나빠져 탈출이 불가능해졌다. 재난상황에서 추종형에게 필요한 사람은 상황판단이 빠른 리더다. 리더가 없으면 이 유형은 패닉형과 비슷하게 행동한다. 이 유형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재난상황에서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낙관하면서 시스템의 안전성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 금융시장에서도 대형 위기가 일어날 때 비슷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영웅형 나보다 세상을 먼저 구한다

앞서 본 안타까운 유형과 달리 영웅형은 재난 앞에서 제 몸을 챙기기보다 주변사람을 챙긴다. 이들은 패닉 상황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구난활동에 참여하며,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끈다. 이들은 재난이 닥쳐와도 패닉반응을 보이지 않고 비교적 침착함을 유지한다.

물론 영웅형도 재난 앞에서는 스트레스와 패닉을 경험한다. 단지 이타적인 행동을 통해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다. 패닉과 이타적 행동은 서로 경쟁한다. 한쪽 행동이 활성화되면 다른 행동은 억제된다. 영웅형은 다른 무엇보다도 의미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다.

다만 드물기는 하지만 재난에서는 어리석은 영웅, 무모한 영웅도 나올 수 있다. 잘못된 지도자가 선택한 행동은 매우 치명적인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리더가 훌륭한지 아니면 바보 같은지는 재난이 닥칠 때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2012년 2월 과학동아 정보

  • 이화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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