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약 조선시대에 수학 시간이 있었다면 이런 풍경이지 않았을까. 서당에서 수학을 가르치진 않았지만, 조선시대에도 고차 방정식을 포함해 어려운 수학 공부를 했다. 김영욱 고려대 수학과 교수팀은 지난 4월, 지금까지 번역된 산학서(지금의 수학책)를 정리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에도 수학이?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크게 문과, 무과, 잡과로 나뉘어 있었다. 문과는 주요 행정직을, 무과는 군인을, 잡과는 기술관을 선발하는 시험이다. 문과와 무과는 양반이, 잡과는 주로 중인이 지원했다. 문과와 무과에서는 산학(지금의 수학) 시험을 보진 않았지만 잡과를 응시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산학 시험을 봐야 했다. 이들도 ‘수학의 정석’처럼 입시를 위해 주로 보는 교재가 있었을까.
과거 시험에서 출제되는 대다수의 문제는 중국에서 건너온 산학서를 기본으로 했다. 그 중 가장 많이 봤던 교재는 상명산법, 양휘산법, 산학계몽, 이렇게 세 가지다. 세 가지 책은 다루고 있는 내용과 난이도 면에서 차이가 있다. 가장 대중적으로 배우던, 다시 말해 가장 쉬운 책은 상명산법이다. 상명산법은 중국 명나라 수학자 안지제가 1373년 제작한 산학서로, 곱셈이나 나눗셈 등 가장 기본적인 수학 개념이 서술돼 있다. 세금을 관리해야 했던 조선시대 호조 산원들이 배워야 했던 필수 과목이었다.

양휘산법과 산학계몽은 이보다는 조금 더 어려운 계산법이 포함돼 있다. 특히 산학계몽은 고차 방정식이 나와있을 정도로 고급 수학이었다. 이 책에서 사용한 방정식 풀이법은 ‘천원술’로, 얇은 나뭇가지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방정식의 각 항을 세로로 배열하고 숫자를 나뭇가지로 표현한 뒤 현재 고등학교 과정인수분해 단원에서 나오는 조립제법의 원리로 해를 구한다.
연필로 기록을 하는 형태가 아니라 나뭇가지를 옮겨서 계산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숫자를 여러 번쓰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김 교수는 “천원술은 오늘날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발전된 형태의 풀이법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세종 때 가장 수학 흥해
조선시대 수학이 가장 많이 발전한 건 세종대왕시절이었다. 김교수는 “조선시대, 특히 산학이 크게 발전했던 세종 때엔 10차 방정식까지 풀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엔 세종이 ‘산학은 국가의 긴요한 사무이므로, 산학을 예습하게 하려면 그 방책이 어디에 있는지 의논하여 아뢰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세종 25년 11월 17일). 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세종이 산학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새로운 역법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역법은 해와 달, 별의 주기적인 움직임을 관찰해 달력을 만드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백성이 농업이나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역법은 무엇보다 중요한 학문이었다. 중국에서는 황제가 바뀔때마다 역법을 새로 만들어 자신의 나라는 물론 조선이나 왜에까지 달력을 반포했다. 수시력법은 원나라 세조 때의 역법으로, 세종 초기에는 이 역법을 이용해 절기를 계산했다. 하지만 원나라와 조선은 해와 달이 뜨는 시간, 지는 시간, 별의 위치 변화 등 모든 천문학적 수치들이 달랐다. 수시력법을 조선에 적용하기엔 오차가 너무 컸다. 이에 세종은 처음으로 조선의 달력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문제는 조선에 맞는 역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복잡한 수학 계산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역을 정할 때 가장 중요한 값은 태양년의 길이(세실)로, 중국은 두번의 동지시각을 측정해 1년의 길이를 구했다. 조선역시 동지점을 기준으로 1년의 길이를 정했는데 여기엔 생각보다 복잡한 방정식이 필요하다. 동지는 1년 중밤이 가장 긴 날이다. 그림자가 가장 긴 날이기도 하다. 책 ‘역법의 원리분석’에는 이를 이용한 동짓날 계산법이 자세히 나와있다(60쪽 계산법 참고).
당시 조선엔 이런 어려운 계산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세종은 중국에서 산학서를 구입한 뒤 집현전학자들에게 공부하도록 했다. 중국에서 들여온 산학서들은 너무 간략했다. 문제와 답만 기록돼 있고 해설이 나와있지 않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김 교수는 “당시 조선이 스스로 달력을 만든다는 것은, 외교적으로 더 이상 원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원나라에서 산학을 배워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며 “그래서 당시 산학자들은 중국 책을 독학해서 어려운 계산을 해결한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 해설의 필요성을 느낀 조선의 산학자들은 양휘산법이나 산학계몽을 기반으로 한 조선의 산학서를 편찬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책이 660년 즈음에 집필된 ‘묵사집산법’이다. 묵사집산법은 조선 중기의 산학자 경선징이 만든 책으로, 산학계몽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묵사집산법은 문제와 답만 적혀있는 산학 계몽과는 다르게 자세한 풀이가 포함돼 있고, 한 문제 당 기본적으로 두 개의 풀이법이 소개돼 있다. 세개의 풀이법이 달린 문제도 있다. 산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좀 더 편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산학계몽을 재편한 책인 셈이다. 반면 박율이 편찬한 산학원본은양휘산법이나 산학계몽 중 어려운 개념만 골라서 만든 책이다.

수학은 중인들만 공부하는 과목이었다?
이런 산학 책들은 당시 중인들과 모든 양반들이 읽었다. 과거에서 산학이 시험 과목으로 지정된 건 잡과 뿐이었지만, 조선왕조실록(태조 2년, 10월 27일)에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육학을 설치하고 양가의 자제들로 하여금 익히게 했으니, 1은 병학(兵學), 2는 율학(律學), 3은 자학(字學), 4는 역학(譯學), 5는 의학(醫學), 6은 산학(算學)이었다.’ 병학은 군사 지식, 율학은 법률, 자학은 글자 원리, 역학은 통역, 의학은 의술, 산학은 수학을 의미한다. 김 교수는 “산학은 양반들도 필수로 배워야 하는 교양 학문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문인은 호조를 이끄는 호조판서가 될 수도 있다. 오늘날의 기획재정부 장관과 비슷한 위치다. 김 교수는 “지금은 과학을 잘 몰라도 과학관련부서의 장관을 맡을 수 있지만, 조선시대엔 그렇지 않았다”며 “호조를 이끌기 위해선 아래 관원들보다 산학을 잘해야 한다는 사상이 박혀있었다”고 말했다. ‘구수략’이라는 산서를 집필한 최석정은 영의정을 8번이나 한 대표 문인이다.

당쟁에서 이기기 위해 산학을 공부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시헌력’ 시행이다. 시헌력은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건국되면서 새로 만들어진 역법이다. 중국에 거주하던 독일인, 아담샬 신부가 서양 수학을 토대로 만들었다. 시헌력이 조선에 들어온 건 인조 26년(1648년)이었다. 그 때까지 세종이 만든 칠정산을 사용하던 조선에서는 시헌력 채택을 두고 치열한 당쟁이 벌어졌다. 시헌력을 시행하자고 주장하던 무리는 칠정산에 한계가 있어 오차가 나기 시작했다는 점을 근거로 삼았고, 이를 반대하던 송형구, 김시진은 시헌력에 윤달의 오차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결국 시헌력이 시행되긴 했지만, 반대세력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인조 26년, 2월 27일)에도 남아있다. ‘그 역법(시헌력)은 우리나라의 것과 같지 않은 것으로 곧 서양에서 새로 만든 것이었는데, 절기에 조금 앞서거나 뒤진 것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3월을 윤달로 삼는데 시헌력에는 4월이 윤달이다.’
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적절한 과학적 근거가 필요했다. 김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학 공부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쟁에서 계속 밀린 문인들은 더 높은 관직으로 오르기가 어려웠다”며 “결국 조선시대에도 산학은 승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학문 중 하나였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