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트레비식, 철도 시대를 열다

증기기관차 발명했지만 사업엔 실패해

1804년 2월 21일 영국 남웨일즈 탄광촌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이날은 증기기관 제작자 리차드 트레비식(Richard Trevithick)이 자신이 새로 제작한 기관으로 화물차량을 나르는 시연을 해보기로 한 날이다.

경사진 18㎞의 주철 레일 위로 원통 기둥에 커다란 바퀴가 달린 시커먼 기관차가 등장했다. 기관차 뒤에는 호기심에 찬 승객 70명과 10t의 무쇠를 실은 5대의 화물차량이 달려 있었다. 원통 기둥 위로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더니 톱니장치로 연결된 바퀴가 구르면서, 무게가 5t이나 되는 육중한 기관차가 5대의 차량을 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9㎞를 주파하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무쇠 덩어리가 움직이는게 신기하기만 했다. 이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차 소식은 신문 머릿기사로 영국 전역에 알려졌다. 아버지가 감독으로 일하던 콘웰 광산에서 처음 뉴커먼 증기기관을 보고 흠뻑 빠져 밤낮없이 증기기관 제작에만 매달려온 트레비식. 꼭 2백년전 이달의 시연으로 그는 세계 최초의 증기 기관차 발명가로 역사에 기록됐다.

9㎞ 주파에 1시간 걸려
 

트레비식이 1797년 완성한 고압증기엔진 ‘칙칙폭폭’


트레비식이 증기기관 기술을 직접 익히기 시작한 것은 19살이 되던 1790년 이스트 스트레이 광산에 취직하면서부터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일하던 광산을 드나들며 증기기관들을 관심있게 지켜봤던 그는 2년도 채 안돼 고문 기술자로 승진해 이웃 광산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사용 중이던 증기기관의 성능에 대한 종합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그는 많은 기술과 지식을 얻었다.

당시 영국 남부 광산주들은 와트의 증기기관에 달린 분리식 응축장치를 사용하는 대가로 지불하는 로열티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지역 기술자들이 새로운 디자인의 증기기관을 개발하도록 지원하고 있었다. 여기에 트레비식도 뛰어들어 1797년 새로운 고압증기엔진 모델을 만들어냈다.

이 모델은 실린더에서 나오는 증기를 바로 대기로 뿜어내게 해, 와트의 응축기가 필요없으면서도 더 높은 성능을 낼 수 있었다. 트레비식은 이 모델이 내는 소리를 따라 ‘칙칙폭폭’(Puffer)이라고 명명했다. 이 증기기관은 이내 광산 지역은 물론, 제당, 제분 공장 등으로 팔려나갔고, 트레비식은 와트의 증기기관과 경쟁할 만한 유일한 증기기관 제작자로 명성을 얻게 됐다.

사업가이기보다 발명가였던 그는 이내 또다른 실험에 몰두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증기기관을 이용해 증기자동차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1763년 프랑스의 엔지니어 큐노로부터 시작된 증기자동차 개발은 트레비식이 새 증기기관을 제작할 당시까지도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개발된 차들이 실제 도로 주행을 성공적으로 해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80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트레비식은 자신의 고압증기기관을 장착한 증기차에 승객을 태우고 언덕을 오르는 시운전에 성공했다. 이에 고무된 트레비식은 그후 증기차 개선에 매달린 결과 1803년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런던 거리를 수차례 질주하기도 했다.

이러는 사이 트레비식에게 또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증기기관을 일반 도로용 탈것이 아니라 탄광 지역에 놓여있던 선로 위를 다니는 차량에 적용해보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년 후인 1804년 2월 트레비식은 최초의 증기기관차를 선보이게 된 것이다. 시연은 성공적이었으나 최초의 기관차 발명가 트레비식에게 부를 안겨주지는 못했다. 당시 탄광 선로에 쓰이던 주철은 5t이 넘는 그의 기관차 무게를 견딜 수 없었다. 자주 일어나는 선로 파손으로 기관차의 정기적인 운행은 불가능했다.

결국 철도 역사의 주역은 1815년에 근대적인 증기기관차의 전형이 된 로켓호를 개발한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에게로 돌아갔다.

새로운 디자인에 최고 시속 38㎞인 로켓호가 증기기관차 시대의 본격적인 막을 열 수 있었던 것은 선로 기술의 발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제철 기술과 압연 기술로 주철 선로보다 강도가 높은 선로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 기술을 바탕으로 1825년 영국 스톡턴과 다링턴 사이에 석탄 운반을 위한 최초의 정기 철도 노선 운행이 가능해졌다.

철도 역사의 서막을 장식한 트레비식은 1816년, 거듭된 실패로 기관차 사업에서 손을 떼고 있던 차에 자신의 증기기관 개선을 요청한 남미 광산주의 초청으로 페루로 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독립전쟁에 연루돼 10여년을 체류하게 됐다. 그후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활동했지만 상업적 성공은 그를 다시 비껴갔다.

1833년 트레비식은 그가 발명한 기관차로 부를 얻을 수는 없었지만 “조국 영국의 진보에 기여했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말을 남기고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04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박진희 강사

🎓️ 진로 추천

  • 기계공학
  • 역사·고고학
  • 도시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