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1월 19일 학술지 ‘네이처’에 이목을 끄는 논문 한 편이 실렸다. 제목을 그대로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장내 바이러스는 공생 박테리아의 유익한 기능을 대체할 수 있다(An enteric virus can replace the beneficial function of commensal bacteria).’ 바이러스 전문가인 정용석 경희대 생물학과 교수에게 의견을 물었다.
“무척 흥미로운 연구입니다. 바이러스가 장내세균처럼 우리 몸에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다는 뜻이에요.”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장내세균은 장(腸) 속에 살면서 우리 몸의 면역기능을 높여주고 염증반응을 완화시켜주거나 유익한 물질을 분비한다. 그런데 질병을 일으키는 줄만 알았던 바이러스가 이런 역할도 할 수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정 교수가 덧붙였다.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현재 인간이 바이러스에 대해 아는 건 정말 적어요. 이번 연구 결과처럼 숙주와 공생하는 바이러스가 꽤 많이 존재할지 누가 알겠어요.”

무균 쥐에 노로바이러스 투입…면역력 ‘쑥쑥’
이번 연구를 주도한 사람은 켄 캐드웰 미국 뉴욕대 의대 교수다. 연구팀은 멸균된 환경에서 실험쥐를 사육해 ‘무균 쥐’로 만들었다. 무균 쥐는 특정 면역세포를 충분히 만들지 못하고 영양분을 흡수하는 작은창자의 융모가 비정상적으로 얇다. 그래서 몸도 삐쩍 마르고 질병에 약하다. 연구팀은 이 무균쥐에게 ‘쥐 노로바이러스’를 투여했다(쥐 노로바이러스에는 구토와 설사를 일으키는 종류와 증상 없이 감염 상태를 지속하는 종류가 있는데, 연구팀이 투여한 건 두 번째 종류다). 그 결과, 쥐의 융모가 정상 수준으로 두꺼워지고 면역세포 수치가 다시 올라갔다. 위장관 손상도 회복됐다. 또 설사나 위장관 손상을 일으키는 다른 병원균에 쥐를 감염시킨 뒤 다시 노로바이러스를 투여하자 질병 증상이 완화됐다.


바이러스와 숙주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바이러스의 ‘감염’에는 크게 급성감염과 지속감염이 있다. 급성감염 바이러스에 당하면 바로 질병에 걸린다. 세포에 침투해 빠르게 증식하고 빠져 나가면서 세포를 망가뜨린다. 숙주의 면역시스템에 바이러스가 당하기도 한다. 피 터지게 맞붙는 ‘전쟁’이다. RNA 바이러스는 대부분 전쟁을 좋아한다. 최근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에볼라 바이러스가 대표적이다. 반면 지속감염은 휴전 상태다. 바이러스가 늘어나는 개체 수를 최대한 줄여 숙주에게 거의 피해를 주지 않고 감염 상태를 유지한다. 사실 바이러스는 숙주가 없으면 바로 죽기 때문에 숙주를 살려 놓는 게 유리하다. DNA 바이러스는 일반적으로 휴전을 좋아한다.
“지속감염은 바이러스와 세포가 끊임없이 협상해 얻은 평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이러스가 ‘한 번에 5개만 증식할게’라는 카드를 내밀면 숙주는 ‘그럼 항생물질을 100이 아니라 50만 만들게’라고 협상 카드를 내미는 거죠.”
이런 바이러스 일부는 숙주의 진화 과정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등이 속하는 레트로바이러스가 대표적이다. 인간 DNA의 약 8%는 레트로바이러스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몸에 남게 된 레트로바이러스의 유전정보가 그냥 잠들어 있는 게 아니라 때론 쓸모있는 단백질을 만들어냈고, 인간의 진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줬다는 얘기다. 예컨대, 포유류가 뱃속에 새끼를 가질 수 있는 건 레트로바이러스에서 나온 유전자 덕분이다. 배속에 새끼를 갖는 행동은 면역학적으로 엄청난 부담이다. 엄마의 면역시스템이 태아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트로바이러스에서 나온 관련 유전자가 잠에서 깨어 활동하면, 임산부의 몸은 면역력을 바닥 수준까지 떨어뜨린다. 엄마와 태아를 잇는 태반은 양분은 통과시키지만 피는 섞지 않도록 만들어 준다. 엄마와 태아가 모두 안전하게 버틸 수 있다.

최근에는 전쟁만 좋아하는 줄 알았던 RNA 바이러스 중에도 휴전 상태, 즉 지속감염을 하는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서두에 언급한 쥐 노로바이러스도 지속감염형 RNA 바이러스다. 사실 우리가 모르는 바이러스가 너무 많다. 인류는 겨우 100여 년 전에 바이러스를 처음 발견했다. 질병을 일으키는 급성감염 바이러스를 주로 연구하다보니 ‘바이러스=물리쳐야 할 나쁜 놈’이라는 인식이 생겼을 뿐이다.
“지구에는 어떤 바이러스가 있을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아직 제대로 모릅니다. 바이러스 세계가 얼마나 넓을지조차 추정하기 어렵지요. 앞으로는 바이러스 입장에서 본 연구 결과가 더 많이 나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