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물질과 가스를 함께 품었던 거대한 두 은하단이 충돌하며 총알 은하단을 만들었다. 파란색은 중력 렌즈로 파악한 암흑물질의 분포를, 자주색은 X선으로 관측한 가스물질의 분포를 보여준다.
몇 년 전 어느 학회에 갔을 때의 일이다. 한 천문학자의 발표가 시작됐다. 그의 발표 슬라이드 첫 페이지엔 까만 하늘 사진이 있었다. 얼핏 볼 땐 은하나 성단 같은 특별한 천체랄 게 딱히 없고, 그냥 평범한 별 몇 개가 희미하게 뜬 사진이었다. 그는 청중들에게 물었다.
“여기 뭐가 보이시죠?”
청중들은 ‘대체 뭐가 보인다는 건가?’ 싶은 눈빛으로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자 그는 다시 이야기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죠? 맞습니다. 그게 바로 UDG(Ultra-diffuse galaxy)의 정의니까요.”
필자를 비롯한 객석의 천문학자들이 순간 ‘빵’ 터졌다. 천문학자들만 이해하는 개그였다.
암흑물질이 없는 은하의 수수께끼
UDG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엄청나게 희미한 왜소은하란 뜻이다. 일반적인 왜소은하보다 별이 훨씬 적고, 그마저도 넓게 퍼져있어 아주 어둡다. 보통 이런 꼬마 은하들은 그 질량 대부분이 빛으로는 관측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 암흑물질이다. 그래서 겉보기엔 별이 거의 없고 어두워서 가벼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질량이 크고 중력도 아주 강하다. 당연히 사진만으로는 까만 우주에 아무것도 없는 휑한 공간 같지만, 배경에 비해 물질의 밀도가 얼마나 높은지 정밀하게 비교하면, 별과 암흑물질이 주변보다 많이 모인 천체 덩어리를 희미하나마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2018년과 2019년, 예상 밖의 UDG들이 연달아 발견됐다. 고래자리 방향으로 약 6200만 광년 거리엔 평범하고 밝은 타원은하 NGC 1052가 있다. 이 은하 주변엔 크고 작은 왜소은하 여러 개가 모여서 하나의 작은 은하군을 형성하고 있는데, 거기서 발견된 두 꼬마 은하 DF2와 DF4가 일반적인 UDG치곤 암흑물질이 너무 적었다. 만약 이 꼬마 은하들에게도 다른 UDG만큼 많은 암흑물질이 있었다면, 그 속의 별들은 꽤 빠른 속도로 맴돌아야했다. 그러나 너무 느리게 움직였다. 이건 두 꼬마 은하엔 암흑물질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암흑물질은 우주 전체 질량의 약 80%를 차지한다. 암흑물질은 은하의 형태가 흐트러지지 않고 잘 유지되도록 강한 중력으로 은하 속 별들을 붙잡아주는, 은하 생성의 가장 중요한 재료다. 우주의 거의 모든 은하는 이 미지의 암흑물질을 가득 머금고 있다. 그런데 암흑물질이 전혀 없는, ‘암흑물질 프리(Dark Matter Free)’ 은하라니 이것이 대체 어떻게 가능할까?
비밀을 파헤치려면 우선 각 꼬마 은하까지의 정확한 거리를 알아야한다. 어둡고 흐릿한 UDG의 거리를 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나, 천문학자들 나름의 요령은 있다. 터지기 직전의 크게 부푼 적색거성을 활용하는 것이다. 재밌게도 적색거성의 최대 실제 밝기는 거의 일정하다. 이 최대 밝기에 도달한 순간의 적색거성을 ‘TRGB(Tip of the Red Giant Branch)’라고 한다.
천문학자들은 TRGB를 표준 잣대로 암흑물질이 없어도 너무 없는 수상한 왜소은하들까지의 거리를 쟀다. 둘은 지구의 하늘에선 거의 같은 방향에서 보이나 실제 거리는 많이 달랐다. 둘 중 DF4가 지구에서 더 가깝고, 둘 사이의 거리는 대략 650만 광년이나 벌어져 있었다. DF4는 지구 쪽으로 초당 약 43km의 속도로 느리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반면 더 멀리 떨어진 DF2는 초당 315km의 아주 빠른 속도로 지구에서 멀어지는 중이었다. 종합하면 두 은하가 초당 358km 속도로 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천문학자들은 시간을 거슬러 이들의 궤적을 거꾸로 추적함으로써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은하가 충돌할 때 대체 무슨 일이?
지금으로부터 80억 년 전, 타원은하 NGC 1052 곁에는 평범한 작은 은하 A가 붙잡혀 맴돌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또 다른 작은 은하 B가 중력에 이끌려 빠르게 유입됐다. 그 순간 원래 붙잡혀 돌고 있던 은하 A와 새로 유입된 은하 B가 충돌했다. 이 과정에서 A, B 두 은하가 각각 품고 있던 암흑물질과 일반 가스물질이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 흩어져버렸다.
특히 암흑물질은 가스와 같은 다른 일반 물질과 아무 상호작용도 하지 않는다. 마치 유령처럼 다른 물질들을 그대로 뚫고 날아가버린다. 그래서 오래 전 두 은하가 충돌하는 순간, 암흑물질은 은하 안에 남지 못하고 그대로 쭉 날아가버렸다.
반면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가스물질들은 충돌하는 두 은하 사이에서 찐득하게 뭉치면서 새로운 별들을 반죽했다. 그렇게 암흑물질은 모두 날아가버린 채 별들만 모인 파편들이 만들어졌다. 현재의 궤도를 추적해보면, 지구 쪽으로 다가오는 DF4는 원래 NGC 1052 곁을 돌던 은하 A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다. 반면 지구에서 빠르게 멀어지는 DF2는 오래전에 멀리서 빠르게 유입된 은하 B에서 떨어진 파편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거대한 은하단 두 개가 충돌하는 현장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총알 은하단(Bullet Cluster)’이 있다. 은하단 두 개가 충돌하면서 가스 구름 속에 충격파가 만들어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총알이 날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곳을 총알 은하단이라고 부른다(100쪽 사진 참조. 자주색 영역이 가스물질이 분포하는 영역이다).
오래전 가스와 암흑물질을 모두 품은 두 은하단이 있었다. 두 은하단은 서로의 강한 중력에 이끌려 빠르게 충돌했다. 그 결과 열역학적 상호작용을 하는 가스물질들은 두 은하단의 충돌면에 정체돼 찐득하게 반죽됐다. 하지만 유령 같은 암흑물질은 이 충돌 현장을 그대로 통과해서 벗어났다.
실제로 총알 은하단 주변의 가스물질 분포와 중력 렌즈로 파악한 암흑물질의 분포를 그리면, 분포가 크게 어긋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가스와 같은 일반 물질과 아무런 상호작용도 하지 않는 암흑물질이 분명 존재한다는 증거가 되기도 된다. 천문학자들은 미스터리한 DF2와 DF4 왜소은하도 바로 이런 충돌 과정에서 탄생했으리라 추정한다. 다만 이 경우엔 충돌한 A, B 은하단이 총알 은하단보다는 훨씬 작았을 것이다.
암흑물질, 은하에 대한 인식을 바꾸다
오래 전 A, B 두 은하단의 충돌이 발생했고, DF2와 DF4가 충돌 결과 생긴 파편이라면 DF2와 DF4 말고도 그와 비슷한 왜소은하 파편들이 일렬로 쭉 이어져있어야 한다. 천문학자들은 혹시 주변에 다른 파편 은하들이 남아있지 않은지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기대한 그대로 아주 흐릿하며 어두운 파편 은하들이 한 줄로 이어져 분포하고 있었다! 원래 알고 있었던 암흑물질이 없는 두 왜소은하 DF2, DF4를 포함해 10여 개의 은하들은 마치 열차처럼 이어져 있었다. 우연히 이 같이 배열됐을 확률은 0.6%에 불과하다.
천문학자들은 열차의 양 끝인 꼬리칸과 머리칸의 두 왜소은하 RCP3와 DF5에 주목하고 있다. 두 왜소은하가 80억 년 전에 가장 먼저 충돌한 두 개의 모(母)은하 A, B에서 각각 떨어져 나온 조각일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사실이라면 줄줄이 이어진 왜소은하들은 죄다 암흑물질이 거의 없고, 오직 양 끝의 두 은하만 원래 품었던 암흑물질을 꽤 많이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추가 관측을 통해 양 끝의 두 은하가 암흑물질을 많이 품고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이 흥미로운 시나리오는 멋지게 입증될 것이다.
암흑물질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시절엔, DF2나 DF4와 같은 왜소은하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은하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빛을 발하지도 흡수하지도 않는 암흑물질이 우주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정상적으로 보였던 이들의 특별함이 세상에 드러났다. 옛날 관점에선 암흑물질이 없는 상태가 정상이었지만, 지금은 암흑물질이 없으면 오히려 이상한 은하 취급을 받는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암흑물질이 없는 이상한 은하를 통해 암흑물질이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