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패딩 천국’이다. 유행에 민감한 고교생뿐만 아니라 직장인도 남녀 가리지 않고 코트나 재킷 위에 패딩을 입고 출근한다. 백화점에서는 수백 만원이 넘는 명품 패딩을 재고가 없어서 못판다.
한국 겨울 날씨에 두꺼운 패딩 필요없다
패딩을 입을 정도로 한국이 정말로 추운 것은 아닐까. 러시아, 미국 중북부, 캐나다, 몽골, 북유럽은 겨울 철에 최고 영하 20℃ 이하로 내려간다. 국제표준화기구(ISO)에 따르면 이런 영하 수십℃ 이하의 극한 추위에 대비하기 위해서 후드가 있는 다운 파카, 두 겹의 바지, 내복, 스웨터, 양모 장갑 등이 필요하다. 이 중 내복을 제외하거나 바지만 얇게 바꾼다면 평범한 한국인의 겨울철 복장이 된다. 현재 한국인의 복장은 시베리아 수준이다.
과학적인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다. 국제표준화기구는 옷의 보온력에 대해 여름철에는 0.6clo, 겨울에는 2clo 정도를 권장한다. 클로(clo)란 보온력을 측정하는 단위로 1clo는 구두, 양말, 긴 바지와 셔츠, 재킷 등의 남성 정장을 착용했을 때의 보온력을 뜻한다. 한국의 겨울철 복장은 2clo가 훌쩍 넘는다. 패딩 때문이다. 두꺼운 패딩의 보온력은 0.4~0.5clo에 달한다. 현재 겨울철 복장에서 패딩을 벗어도 국제 기준에 맞다.
이주영 서울대 의류학과 교수도 “한국에서 패딩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고 잘라 말한다. ‘패딩 안 입으면 추운 걸 어떡하냐’라고 반문할 수 있다. 당장 기자만 해도, 패딩 없이 아침 출근길에 나설 생각을 하면 앞이 깜깜하다. 분명 한국의 겨울 날씨는 패딩이 필요없는 데도 말이다. 어떤 영문으로 한국인에게 패딩이 필수품이 된 걸까.
두꺼운 패딩 입을수록 추위 못 견딘다
우선 마케팅 효과가 있다. 현빈 등 유명인을 내세운 아웃도어 브랜드의 공격적인 마케팅이 패딩 소비를 계속해서 늘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추위를 원천봉쇄하는 잘못된 의생활습관에 있다.
부모님 세대는 장갑 하나, 스웨터 하나를 가지고 첫째부터 막내까지 돌려쓰곤 했다. 가난한 게 서러웠던 부모들은 이제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혹시 찬바람을 맞고 감기에 걸릴까 무조건 두껍게 옷을 입힌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편견이다. 무조건 따뜻하게 입는 것은 오히려 건강에 좋지 않다. 최정화 서울대 의류학과 명예교수가 1992년 전국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겨울철 옷을 따뜻하게 입는 학생이 옷을 적게 입는 학생에 비해 감기에 잘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꺼운 옷이 활동량을 떨어뜨렸고, 그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웃나라 일본 연구자들도 오래전부터 비슷한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일본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겨울 교복을 반바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얇게 입는 것은 추위에 대한 적응력을 키우는 데도 유리하다. 평소 가볍게 옷을 입은 사람은 옷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져 추위에 맞설 수 있는 체온 조절 능력이 강화된다. 반면 어려서부터 과도하게 두꺼운 옷을 입는 습관은 체온 조절 능력을 떨어뜨린다. 결국 두껍게 옷을 입은 사람이 추위에 더 약해지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실제 손가락 끝의 혈관 확장을 통해 추위를 참는 능력을 검사하는 한랭혈관확장반응(CIVD) 검사에서 현재 한국 젊은이들이 과거에 비해 추위를 잘 못 참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검사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학생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따뜻하게 옷을 입은 학생이었다.
체온 조절 능력은 변한다
추위에 지속적으로 노출될수록 추위에 강해진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추위에 강한 사람들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1970년대 중반 이전만 해도 한국 해녀는 면으로 된 수영복 하나만 걸치고 물질을 했다. 기자는 아주 두꺼운 고무 수영복을 입고 여름 바다에 뛰어든 적이 있는데, 시쳇말로 얼어 죽을 뻔 했다. 이만하면 한국 해녀들이 얼마나 추위에 강한지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구 결과 해녀는 차가운 바닷물에 뛰어들면 몸에서 보다 많은 열을 내고, 그 열을 피부 근처로 잘 보냈다. 추울 때면 기초 대사량을 35% 이상 늘려 몸을 뜨겁게 한다. 해녀는 외부 날씨에 따라 피부 가까이 흐르는 혈액의 양을 조절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한국 해녀만큼 추위를 잘 참는 것으로 유명한 집단은 호주 원주민이다. 20세기 초까지 호주 원주민들은 거의 영하의 날씨에도 나체로 잠을 잤다. 같이 실험에 참여한 백인들은 몸이 떨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호주 원주민들이 추위에도 잠을 잘 잔 비결은 아예 체온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호주 원주민은 더 많은 열을 내는 대신 인체에 큰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체온을 낮추고, 에너지 대사량을 줄여 열 손실을 줄인다. 한국 해녀와 정반대의 전략이다.
이러한 차이는 해녀와 원주민의 다른 환경에 있다. 해녀는 짧은 순간, 아주 낮은 온도에 노출된다. 상대적으로 평소에 높은 열량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원주민들은 중간 정도의 추위에 지속적으로 노출된다. 수렵생활을 하던 이들은 열량을 보충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해녀는 에너지를 많이 쓰지만 몸을 따뜻하게 하는 방식을 선택했고, 원주민은 에너지를 최대한 아끼는 방향을 고른 것이다. 두 집단 사이에 공통점도 있다. 고무 수영복이 보급된 1980년대 이후 해녀들의 추위 적응 능력이 사라졌다. 새롭게 물질을 시작한 해녀는 물론이고 기존에 추위를 잘 견디던 해녀들도 점점 추위에 맥을 못 췄다. 호주 원주민도 문명과 교류를 시작하면서 추위를 이기는 특유의 방법이 없어졌다.
추위에 강해지는 생물학적인 경로는 아직 불분명하다. 특히 한국 해녀에 대한 연구는 80년대 이후 거의 끊겼다. 추위를 잘 견디는 다른 집단을 통해 추정해 볼 뿐이다. 극지방의 에스키모는 일반인보다 몸의 대사량을 조절하는 갑상선 호르몬 농도가 높다. 호주 원주민이 체온을 낮추는 방식은 더욱 알려진 것이 없다. ‘포유류가 동면을 하는 방식과 비슷하지 않을까’라고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무작정 추위를 참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참으면 추위에 강해진다고 해서 무작정 얇게만 입어서는 안 된다. 열 손실이 작은 몸통 부위는 두껍지 않게 옷을 착용하고, 공기와 접촉면이 넓은 얼굴과 손, 발은 따뜻하게 하면 얇게 입고도 추위를 적게 느낄 수 있다.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실내외를 오갈 경우 생기는 갑작스런 온도 변화를 줄이기 위해 두꺼운 옷 하나보다 얇은 옷 여러 장을 겹쳐 입는 것이 좋다.
어린이는 보다 세심한 체온관리가 필요하다. 어린이는 청년에 비해 작지만 체형은 비슷해 체중당 면적 비율은 더 높다. 따라서 사춘기 이전 어린이 옷차림은 기온에 따라 세분화해야한다. 가령 11월이나 12월 초, 2월이나 3월 초 영상의 기온에는 옷을 가볍게 입혀 아이가 추위에 적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다. 날씨가 영하로 떨어지는 12월 중순부터 1월까지는 손과 발의 보온에 신경 써야 한다.
이쯤 되면 시작 부분의 질문에 정답을 알게 됐을 것이다. 난방을 하거나, 두꺼운 옷을 챙겨 입는 것은 당장의 추위를 물리치는 데 분명 도움이 된다. 하지만 추위에 대한 적응력을 떨어뜨려 결국에는 추위에 굴복하게 만든다. 추위를 궁극적으로 물리치기 위해서는 두꺼운 옷을 하나씩 벗으며 추위에 적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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