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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 Issue] 남극탐험가 섀클턴의 위대한 실패



0“나는 앞으로 다가올 겨울 내내 인듀어런스 호의 발이 묶이고 말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중략) 물개들도 사라졌고 새들도 우리를 떠났다. 맑은 날에는 멀리 수평선 너머로 육지가 보였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우리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곳이었다. 배를 정박시킬 만한 장소를 지나쳤던 것에 대해 후회해 본들 소용이 없었다.” (어니스트 섀클턴, 자서전 ‘SOUTH’)1915년 2월말, 어니스트 섀클턴은 자신과 27명의 대원들 앞에 놓인 험난한 운명을 예감했다. 한 달 전인 1월 20일경부터 부빙에 갇힌 채 꼼짝 못하던 끝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앞으로 1년 반이 넘는 시간을 부빙과 바다에 갇힌 채 헤매게 될 줄은 몰랐다.


준비 안락함 버리고 다시 떠난 남극 탐험

남극 횡단 탐험을 나서기 전부터 이미, 섀클턴은 영국의 영웅이었다. 1907년의 첫 번째 남극 탐험에서 그는 누구보다 남극점에 가까운 156km 지점까지 다가갔다. 서울에서 대전 정도의 거리였다. 당시 남극은 노르웨이의 아문센과 영국의 또다른 위대한 탐험가 로버트 스콧의 격전지였다. 신출내기 탐험가인 섀클턴이 이들을 능가하며 새 기록을 세우자 영국인들은 열광했다. 당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영광에서 서서히 물러나고 있었고 영웅이 필요했다. 섀클턴은 경(Sir)의 칭호를 받았고 가는 곳마다 열광하는 인파와 마주했다. 하지만 섀클턴 자신은 156km 밖에서 멈춰야 했던 남극 탐험을 몹시 아쉬워했다. 그는 다시 남극으로 떠날 날을 몰래 손꼽았다. 그러던 중, 1911년과 1912년 사이 겨울에 아문센과 스콧이 남극점에 도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문센에 이어 두번째로 남극점에 도착한 스콧은 그러나 베이스캠프로 귀환하는 길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두 탐험가가 꿈에 그리던 남극점 탐험을 먼저 완수했다는 소식, 그리고 탐험의 종주국이라 자부하던 영국이 노르웨이에 패배했다는 국가적 상처는 섀클턴의 피를 끓어오르게 했다. 그는 즉시 남극 횡단 탐험이라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아무도 성공한 적이 없었고, 섀클턴 본인도 자신할 수 없었다. 섀클턴은 이 탐험을 위해 2년 가까이 준비했다. 튼튼한 물개잡이 목선 한 척을 사들여 이름을 ‘인내(인듀어런스)’라고 바꾸고 후원자들에게 자금 지원을 받았으며 탐험에 함께 할 사람들을 모집했다. 당시 그가 신문에 발표했다고 알려진 광고 문구는, 꼭 필요한 말만 명사형으로 적혀 있는 소박하고도 강렬한 것이었다.

“구인. 위험한 여정, 적은 보수. 끔찍한 추위, 몇 달 간 햇빛조차 볼 수 없는 어둠, 끝없는 위험, 안전한 귀환 불확실, 성공할 경우 명예와 인기. -어니스트 섀클턴”

이 구인 광고가 사실인지는 여전히 논란이지만(출처를 묻는 집단지성 사이트도 열릴 정도다), 어쨌든 지원자는 넘치게 많았다. 무려 5000명이 넘게 편지를 보내 왔다. 섀클턴은 이 가운데 27명을 선발했다. 여기에는 의사 두 명과 기상학자, 물리학자 등 과학자도 포함돼 있었다. 섀클턴은 탐험이 단순한 모험이 아니라 연구 목적이 강한 과학 탐사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출항 시작은 평온했으나 곧 위험에 부딪히다

1914년 8월, 섀클턴은 런던에서 인듀어런스 호를 출항시켰다. 얼마 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대서양을 건너 남미로 향한 항해 끝에, 섀클턴은 남극을 향한 마지막 기지인 사우스조지아 섬에 도달했다. 그 해 12월 초, 27명의 대원과 60여 마리의 썰매개를 태운 채 남극행 항해가 시작됐다. 부빙 사이를 헤치며 나아간 항해는 초반에 비교적 순조로웠다. 하지만 12월 말부터는 부빙 사이에 갇혔다 나아가다를 반복했고, 결국 한 달 만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인듀어런스 호는 얼음 사이에 낀 채 그저 상황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

남반구는 북반구와 계절이 반대다. 애초에 12월에 사우스조지아 섬을 떠난 것도 이 때가 그나마 남극의 ‘여름’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2월이 되자 그 여름도 끝나갔다. 남은 것은 점점 더 매서워지는 추위와 부족해지는 식량, 연료였다. 탐험대는 물개가 보일 때마다 쏴 잡아 개의 식량과 연료(기름)로 쓰며 월동을 준비했다. 2월 22일, 섀클턴은 인듀어런스 호가 그대로 얼음에 갇힌 채 길고 긴 남극의 겨울을 보내게 될 것임을 예감했다. 탐험대는 인듀어런스 호를 배가 아닌 기지로 삼아 낮엔 일하고 밤엔 자는 규칙적인 생활을 시작했다. 밤에는 불침번을 섰다. 사진가 프랭크 헐리가 찍은 유명한 사진에는 쪽불을 쬐며 불침번을 서던 대원들이 보인다.

3월이 되자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왔다. 연료인 석탄을 아껴야 했지만, 보일러가 얼어 터지면 문제가 더 커지기 때문에 섀클턴은 하루 200kg의 석탄을 소모하며 보일러와 스토브를 가동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혹독한 환경에 고립된 인류가 맞아야 하는 상황은 이렇게 매번 삶을 걸고 내려야 하는 결정의 연속이었다. 5월이 되자 영원할 것 같은 어둠과 함께 남극의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왔다. 섀클턴은 이 때의 암담함을 이렇게 썼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긴 겨울 저녁처럼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어둠과 추위 속에서도 삶은 이어졌다. 데려간 썰매개들은 새끼를 낳았고 가장 덩치 큰 우두머리 수컷개(이름이 ‘아문센’이었다)는 너그러운 아버지 같은 표정을 지으며 개들을 먹이고 훈련시켰다. 썰매 경주가 벌어졌고 과학자들은 연구를 했다. 우아하고 호기심 많은 펭귄은 탐험대를 보고도 경계심 없이 다가왔다 곧잘 일행의 스테이크가 됐다.



탈출 배를 버리다

8월이 되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얼음이 배를 옥죄기 시작했다. 배가 부서져 침몰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가장 가까운 육지에서 460km, 사람이 사는 기지에서는 800km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9월이 되자 불길해 보이는 자연 현상이 일어났다. 차가운 대기에 굴절한 부빙의 신기루가 하늘에 떠올랐다. 펭귄과 물개는 주변에서 멀리 떨어져 개들을 먹일 고기가 부족해졌다.

9월 말, 배를 옥죄던 얼음이 천천히 배를 압박해 왔다. 다행히 인듀어런스 호는 자신의 이름처럼 얼음의 압력을 견뎌 냈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 사고로 배가 언제든 부서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일행은 깨달았다. 10월 말, 얼음의 압박이 거세졌다. 인듀어런스 호도 마지막 맹공에는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배 오른쪽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부빙이 선체를 뒤틀기 시작했고 이틀 뒤 배는 활처럼 휘기 시작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배는 자신을 파괴하려는 힘에 맞서 대항하고 있었으나 너무도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수백만 t에 달하는 얼음의 압력이 남극 대륙에 다시는 도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무자비하게 작은 배를 강타했다.”
 

10월 27일 배는 결국 부서져 침몰하기 시작했다. 이미 여기저기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서서히 부서지고 있던 배지만, 탐험대에게는 남극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간도 결국 끝났다. 탐험대는 비상식량과 짐을 챙겨 배에서 수백m 떨어진 곳에 임시 캠프를 만들었다. 인듀어런스 호는 며칠에 걸쳐 산산이 부서졌고, 사진가 프랭크 헐리는 그 슬픈 장면을 묵묵히 카메라에 담았다. 10월 29일, 섀클턴은 오늘날까지 동물애호가들의 비난을 듣고 있는, 하지만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을 했다. 어린 강아지 네 마리와 목수인 탐험대원이 애지중지 키우던 고양이를 총으로 죽였다. 식량 절약이 명분이었다. 큰 개들은 썰매를 끌어야 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행군이 시작됐다. 개인별로 1kg의 가벼운 짐만 챙긴 채 썰매에 탔다. 섀클턴이 이끄는 선발대가 출발했고, 7팀의 후발대가 뒤를 따랐다.

난파 지역에서 10km 떨어진 지역에 캠프를 차렸다. 여전히 얼음 위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단조롭고도 긴 시간을 견뎠다. 물개와 펭귄을 사냥했고, 잡담과 식사, 수면으로 시간을 보냈다. 11월, 부빙은 또다시 표류했고 탈출 가능성은 조금도 높아지지 않았다. 매일 눈과 바람과 추위에 시달렸다. 21일이 되자 인듀어런스 호는 바닷물 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커드 호의 출항. 얼음 위를 벗어나 겨우 섬에 도달했지만, 그곳은 무인도였다. 사람들에게 구조요청을 하기 위해서는 유인도로 가야 했다. 쪽배로 1300km 밖으로 항해하는 위험한 임무에 6명이 함께 했다. 리더는 섀클턴이었다.


행군 마지막 썰매개를 희생시키다

12월 말, 다시 행군이 시작됐다. 남극은 여름이었고 부빙은 표면이 녹아 질척거렸다. 여름은 비교적 따뜻한 환경을 제공했지만, 부빙 위를 걷고 있는 대원에게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길은 여기저기 물길로 끊겨 있었고 균열이 나 있었다. 안전한 부빙 위에 캠프를 설치하고 다시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곳에서 견뎌야 할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일행은 3개월 반을 또다시 흘려 보냈다. 새 캠프에서 일행은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식사량을 줄였고, 물개 고기는 국으로 만들어 조금씩 먹었다. 먹을 게 부족해지면 인심이 흉흉해진다. 섀클턴은 대원들의 불만을 달래고자 메뉴를 매주 바꾸는 방법을 썼다. 펭귄 고기, 물개 고기, 빵, 우유 등으로 이뤄진 식단은 큰 변화를 주기 어려웠지만, 대원들은 작은 변화에도 위안을 얻었다.

1916년 1월, 섀클턴은 또 한번의 살생을 저지른다. 이번만큼은 그 자신도 탐험에서 가장 큰 실수로 여기며 후회하게 된 살생이었다. 2개의 썰매를 끌 썰매견을 빼고 나머지 개들을 쏴죽였다. 4월에는 마지막 썰매 개마저 죽였다. 그의 일기는 이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4월 2일, 오늘 우리는 마지막으로 남은 개들을 모두 총으로 쏴죽였고, 개들의 시체는 우리 식량으로 바뀌었다. 개고기는 다소 질기기는 했지만, 쇠고기처럼 매우 맛있었다.”

육지로의 이동을 시작했다. 보트 세 개에 나눠 타고, 물과 부빙 위를 번갈아 가며 가까운 섬을 향해 조금씩 전진했다. 뱃멀미와 식수 부족이 큰 문제였다. 작은 얼음 조각을 녹여 먹고, 파도에 요동을 치는 보트에 의지한 채 버텼다. 나흘 넘게 파도 위를 헤맨 끝에, 일행은 작은 섬 하나에 상륙했다. 기적적으로, 아무도 크게 다치지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 섬은 엘리펀트 섬이라고 불리는 무인도였다. 섀클턴의 위대한 탐험 덕분에 인류에 알려지게 됐고, 2014년 구글의 지원 아래 내셔널지오그래픽의 탐험가들이 구글 스튜리트 뷰 촬영을 했다. 하지만 당시엔 그저 좁은 무인도였다. 문명의 세계로 돌아가려면 다시 모험을 해야 했다. 가장 가까운 항구는 860km, 사우스조지아 섬은 1300km 떨어져 있었다. 바람 방향을 생각하면 사우스조지아 섬이 그나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섀클턴은 탐험 전체에서 가장 무모하지만, 대원들의 생존 가능성을 가장 높일 수 있는 모험을 하기로 했다. 가지고 있던 보트 중 하나인 커드 호에 1개월치 식량을 실었다. 누더기가 된 보트를 타는 위험천만한 여행에 지원자가 넘쳤다. 섀클턴은 6명을 선발했다.


도박 작은 배로 1300km를 향해하다

4월 23일, 날이 좋자 바로 출항 준비를 했다. 커드 호에 짐과 식량을 옮겨싣고 닻을 올렸다. 남은 일행이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사진가 헐리는 이 장면을 유명한 사진으로 남겼다. 부빙 사이의 물길을 찾아 배를 몰았고, 배는 조금씩 사우스조지아 섬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일 폭풍우를 뚫고 흉포한 파도와 싸웠다.

작은 배 하나를 타고 1300km 떨어진 섬까지 향하는 항해가 성공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일행은 항해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항해 15일 뒤인 5월 8일, 일행은 바다새 가마우지를 만났다. 섬이 있다는 뜻이었다. 5월 10일 오후, 드디어 배가 해변에 상륙했다. 하지만 이곳도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다. 근처에 있는 포경선 기지로 어떻게든 가야 했다. 닷새 뒤 일행은 다시 커드 호에 탔고, 포경선 기지가 있는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섬을 횡단하기 시작했다. 빙하와 산맥을 헤매고 넘어야 하는 고된 행군이었다. 믿을 만한 지도가 없는 상황에서 일행은 끊임없이 헤맸지만 결국 문명의 흔적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뱃고동 소리였다. “1914년 12월 스트롬니스 만을 출발한 이래로, 사람의 손을 거쳐 바깥으로 퍼져나오는 소리를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행은 1년 반 만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만났다. 기지에서 섀클턴은 안면이 있던 책임자를 찾았지만, 그는 처음에 섀클턴을 알아보지 못했다.

구조요청을 떠나는 커드 호를 배웅하는 엘리펀트 섬의 대원들. 저 위험한 항해가 성공해야 자신들도 살 수 있음을 이들은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자신이 아니라 쪽배 위의 동료를 위해 안전을 빌었으리라.

구조 위대한 실패에서 신화로

이제 신화의 마무리다. 기지 책임자 쇠를레의 도움으로 섀클턴은 나머지 대원들을 구조하러 떠났다. 서던 스카이(남쪽 하늘) 호라는 커다란 포경선이 엘리펀트 섬으로 떠났다. 구조는 쉽지 않았다. 겨울이 돌아왔다. 부빙에 가로막혀 섬에 접근할 수 없었다. 임시로 항구에 돌아온 섀클턴은 본국을 비롯해 백방으로 부빙을 통과할 배를 수소문했다. 여러 나라에서 배를 지원해 왔고, 엘리펀트 섬을 향한 항해가 이어졌다. 시도는 두 달 넘게 이어졌다. 엘리펀트 섬은 900km 떨어진 곳에 있었고 대원들은 계속 혹독한 겨울에 고생하고 있을 터였다. 8월 25일, 네 번째 출항을 했다. 이번에는 부빙을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섀클턴은 기지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출항 닷새 뒤인 8월 30일, 드디어 멀리 눈에 하얗게 덮인 기지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기지 대원들도 배를 발견하고 일제히 뛰쳐나왔다. 무사하냐는 섀클턴의 질문에 모두가 무사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대원들은 모두 구조됐다. 섀클턴의 탐험은 그 순간 명백한 ‘실패’로 확정됐다. 아무도 애초의 목표대로 남극을 횡단하지 못했다. 아니, 남극 대륙에 제대로 발도 디뎌 보지 못했다. 하지만 출항부터는 2년, 부빙에 갇힌 뒤부터는 1년 7개월이 지나는 동안, 이들은 최악의 남극 조난 상황을 견뎌 냈고 단 한 명도 죽지 않은 채 무사히 살아남았다. 탐험은 명백한 실패였지만, 실패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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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윤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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