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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 tech] 가족이 화병을 만든다

의사도 모르는 의학이야기❼ 한국인들의 병, 화병(火病)

“아우, 윗사람 때문에 화가 나서 돌 지경이에요. 걸핏하면 아랫사람 탓이나 하고. 뚜껑이 열리기 직전이라고요.”

“요즘 젊은 것들, 보고만 있어도 머리끝까지 화가 치밉니다.” “정치판 하는 꼴 좀 보세요. 이게 도대체 나라가 맞나요? 이민을 가든지 해야지, 정말 화가 나서 못 살겠습니다.” 회사와 학교, 집과 길거리에서, 우리는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요?

매스컴에서 말하듯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유들은 있죠. 경제는 어려운 데다 경쟁과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세대갈등에 정치적 불신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스트레스와 긴장만 한없이 높아지다 보니, 화가 늘어나는 건 당연해요. 분노가 일상생활을 하기 힘들어질 정도로 커지거나 공격성까지 나타난다면 의사를 찾아가봐야 해요. 그런데 똑같이 화와 관련 있더라도 요즘 사람들이 느끼는 분노와는 좀 성격이 다른 병이 있어요. 바로 ‘화병’이에요.
 

화병은 화를 못 내서 생기는 병

화병이란 화가 쌓이고 쌓여서 생긴 병을 말해요. 요즘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과 화를 너무 자주 낸다며 혹시 화병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는데, 화병은 오히려 화를 못 내서 생기는 병이에요.

원래 화병이라는 단어는 우울병과 화병이 합쳐진 ‘울화병’의 준말로, 오히려 화를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꾹꾹 참다 보니 생긴 우울한 상태를 가리켜요.

분노조절장애보다는 우울증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단순 우울증이랑은 또 달라요. 무엇보다 독특한 신체증상을 동반하거든요. 주요 증상으로 불면증, 피로, 공황상태, 죽음이 임박한 것 같은 공포, 소화불량, 호흡곤란, 심장 두근거림, 그리고 목에 뭔가 걸려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있지요.

수십 년간 화병을 연구해 온 정신과 의사 민성길의 ‘화병 연구’(2009)에 따르면, 화병 환자들은 자신의 고통을 다음과 같은 언어로 표현한다고 해요. “몸에서 불덩어리가 올라와 간이 뒤집어진다.” “화가 나고, 가슴이 벌렁대고, 욱하고, 성질나고, 호흡이 빨라진다.” “산소가 모자라듯 답답하다. 창문을 다 열어놔야 한다.” “일하다가 갑자기 답답하고, 막힌 듯 한숨 나고, 섭섭하다. 성질 낼 일이 아닌데 분(憤)을 참을 수 없고, 물건을 부셔버리고 싶은 마음이 나 스스로도 무섭다.” “온 몸에 고춧가루 뿌린 듯 열이 확 오르고, 입이 바싹 마르고 온 몸에 통증이 있다” 등등.

혹시 글을 읽으면서 ‘나 화병 아니야?’하는 생각이 든 분이 있나요? 나에게 억울하고 분한 마음과 함께 신체증상이 있는지 잘 살펴보세요. 진단기준이 있긴 하지만, 화병은 외부 전문가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판단되는 질병이라기보다는 환자나 환자 주변 사람들이 자각해서 판단하는 병이에요.

화병의 독특한 점은 이뿐 아니에요. 화병은 우리나라의 사회환경과 가족문화 때문에 발생한다는 점에서 ‘문화의존증후군’이라고 볼 수 있어요. 작년까지 전 세계 정신의학계에서 주로 사용했던 미국 정신의 학회의 ‘정신질환 진단기준(DSM-IV)’에서도 화병을 이렇게 정의했죠. 한국 문화에서 독특하게 나타나는, 화를 억제해서 생기는 질병이니 의사들은 참고하라고요.
 

추석 때 시댁 다녀온 엄마, 이상하지 않았나요?

화병은 주변 인간관계, 특히 가족 간의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이에요. 환자 대다수가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고 학력이 낮은, 40~50대 결혼한 중년 여성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죠. 이는 화병이 한국의 전통적인 가족문화, 즉 남성 가장(家長) 중심의 성차별적인 문화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것을 보여줘요. 화병에 걸린 여성환자들은 대개 남편의 잦은 폭력, 혼외관계, 시댁과의 갈등 속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고통을 호소하죠.

가족의 평화와 화목을 중시해 온 전통적인 가족 문화 속에서,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았던 아내와 며느리들은 설령 부당함을 느껴도 자기주장을 하기가 쉽지 않죠. 많이 배우지 못하고, 경제적 능력을 갖지 못한 상황이라면 더욱 그래요. 화를 해소하지 못한 채 수십 년을 살다 보면, 마음속 깊이 분노와 절망이 쌓이는 게 당연해요.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억울하고 분한 감정’은 그들이 오래도록 느껴온 ‘부당함’에 대한 의식을 반영하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한(恨)’이죠.

최근에 제가 만난 70대 초반의 한 여성은 스스로 화병이라고 말했어요. 3대 독자의 아내로 일 년에 10번이 넘는 제사상을 차리고, 남편 사업 뒷바라지에, 아들 둘을 낳아 남들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취직도 시켰지요.

이 여성은 “그렇게 수십 년을 가족을 위해 참고 살았어도 남편이나 아들들 모두 내가 신장병에 걸렸을 때 병원에 한 번 같이 가 주지 않았다”며 저에게 강한 섭섭함과 분노를 표현했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분은 종교 활동을 통해서 어떻게든 자신의 울분을 승화시키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쉽지는 않아 보였죠. 얼마 전에 남편이 치매 진단을 받았는데, 아들과 며느리들이 모두 나 몰라라 하는 상황에서 이 나이에 또 참고 봉사하라는 것이냐며 감춰진 화를 드러냈어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해주세요

현대의학에서는 화병을 바라보는 견해가 둘로 갈리고 있어요. 우울증의 한국적인 표현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와, 독자적인 질병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예요.

사실 현재로서는 화병에 대한 연구가 턱없이 부족해 통일된 의학적 설명을 제기하기는 어려워요. 최근 새로 개정된 정신질환 진단기준(DSM-V)에서는 화병을 독자적인 질병으로 인정하지 않아요. 공황발작이나 공황장애, 불안장애, 광장공포증,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건강염려증 등으로 진단할 수 있다고 하죠.

기준이 왜 바뀌었을까요? 세계화가 되면서 문화가 국경을 넘나들기 시작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이제 화병을 ‘한국’ 문화의 특징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발생한 거죠. 새로운 진단 기준을 만드는 데 참여한 정신과 의사들은 “사실상 모든 정신질환은 문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는 점을 강조했어요. 예컨대 같은 불안장애라고 하더라도, 미국 사람이 겪는 불안장애와 한국 사람이 겪는 불안장애의 증상이 다르고, 같은 한국 사람들 안에서도 노인들이 겪는 불안과 청년들이 겪는 불안의 내용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변화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의료인류학의 주제가 될 수 있어요. 정신 질환들은 어떠한 맥락과 과정 속에서 새롭게 발견되거나 사라지고, 또는 이름이 바뀌어 온 것일까요? 그 전에, 혹시 내 주변에 ‘화병’과 비슷한 증상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 병이 정신과의 질병이든 아니든, 만일 가족 간의 경험이 문제의 주된 요인이라면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 한 번쯤은 성찰해 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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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이현정
  • 에디터

    변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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