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이 방송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또 어디에 있을 누군가에게 당분간 행동을 멈추고 지금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각자의 방법으로 감사를 해 주었으면 합니다.”
1969년 아폴로 11호를 타고 닐 암스트롱과 함께 인류로는 처음으로 달에 착륙한 버즈 올드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기독교 방식의 성찬식이었다. 그는 성서 구절을 조용히 중얼거리며 혼자 포도주와 빵을 먹었다. 올드린은 이처럼 신앙심도 강하고 군인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지만 달에 다녀와서는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했다.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을 디딜 때, 인류는 이전의 인류와 전혀 다른 새로운 인류가 됐다. 닐 암스트롱과 아폴로 11호의 동료들의 삶도 크게 바뀌었다.
달여행 이후 엇갈린 아폴로 11호 승무원들
달에서 돌아온 아폴로 11호의 승무원은 국민적인 영웅이 됐다. 소련과 미국의 경쟁에서 미국이 마침내 승리했고 아폴로 11호의 우주인은 가장 화려한 전쟁영웅이었다. 3주 동안의 격리를 마치고 나온 그들은 하루 동안 뉴욕, 시카고, LA에서 열린 축하행사에 참여하고 45일 동안 23개의 나라를 방문했다. 그러나 아폴로 11호의 승무원들은 이를 썩 반기지 않았다. 특히 올드린은 사람들의 환호에 익숙하지 못했고 연설을 싫어했다. 올드린의 아내도 긴 여정을 함께했는데, 불편한 환경 속에서 올드린과 아내의 사이는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결국 올드린은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려 병원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했다. 우주 비행을 마치고 성공적인 군 생활을 이어나가기 원했던 꿈도 거기서 멈췄다.
달변인 닐 암스트롱조차 환영행사를 그리 즐기지 못했다. 암스트롱은 NASA를 그만두고 신시내티대에서 기계공학을 가르치며 몇 년 동안 은둔생활을 했다. 승무원 중 오직 마이클 콜린스만이 광기 속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유명세를 즐겼고 NASA를 그만두고 미국 국무성 홍보차관이 됐다.
인류 최초로 지구 궤도에 올랐던 구 소련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의 삶도 지구로 돌아온 이후 요동쳤다. 그는 소련의 영웅이 됐고 체제 선전을 위해 세계를 돌아다니며 배우, 귀족, 정치인과 잔을 기울였다. 올드린과 반대로 가가린은 파티 이후의 평범한 삶을 견디지 못했다. 미국과 소련에서 더 많은 우주인이 탄생하며 가가린보다 더 오래 우주에 머물렀다. 자연스레 가가린을 향한 열광도 줄어들었다. 그는 매일 술에 의지하며 살았고 우울증을 이기기 위해 매일 전투기를 탔다. 그는 하늘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가가린은 결국 비행 훈련 중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러시아 우주비행사들이 훈련하는 스타시티(Star City)에는 가가린을 기리는 동상이 서있다. 동상 뒤편에는 가가린의 미망인이 살았던 아파트가 있다.

달에 다녀와 종교에 귀의한 우주인
우주에서 겪은 초자연적인 경험이 그 후의 삶을 바꿔놓은 우주인들도 있다. 아폴로 15호에 탔던 제임스 어윈은 우주 비행을 통해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무신론자에 가까웠으나 달 표면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신의 얼굴을 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돌아와서 회고했다. 지구에 돌아온 직후 그는 NASA를 그만뒀다. 대신 “인간이 달을 걷는 것보다 하느님이 지구 위를 걷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며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아폴로 14호에 탑승했던 에드가 미첼은 달에서 초능력을 체험했다고 주장했다. 달에 머무는 동안 아무 말 없이도 동료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미첼은 NASA를 그만 둔 후 초능력을 연구하는 초감각 연구재단을 설립했다. 예술가로 전향한 우주인도 있다. 아폴로 12호와 그 뒤에 이어진 스카이랩 계획에 참여했던 앨런 빈은 NASA에서 1981년까지 일을 한 후 우주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 그는 “나는 달을 해치지 않고 달에 색을 입히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라고 말했다.
아폴로 계획을 통해 우주에 다녀온 사람 중 생각보다 많은 수가 우주와는 관련 없는 삶을 살게 됐다. 우주에 다녀온 28명의 우주인 중 절반 이상이 평범한 사업가가 된 것이다. 기업은 우주인을 좋아했다. 우주비행사는 기본적으로 NASA의 꼼꼼한 검증과정을 거친 사람이다. 인성, 리더십, 판단력은 우주인은 물론이고 회사원에게도 필요한 덕목이다. 또 회사는 미국의 영웅인 우주인이 주는 신뢰감을 좋아했다. 사업에 진출한 우주비행사 대부분은 성공을 거뒀다. 특히 아폴로 14호에 탑승했던 앨런 셰퍼드는 사업과 개인 투자를 겸해 백만장자가 됐다.

우주인 적은 나라일수록 우주 개발에 종사
러시아와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우주인은 어떨까. 우주에 다녀온 일본인은 지금까지 9명이다. 최초의 일본인은 원래 도쿄방송 기자였던 토히로 아키야마다. 그는 근무하던 방송국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1990년 12월 우주를 다녀왔다. 그를 제외하고 일본 정부의 우주사업으로 우주를 다녀온 사람은 8명이다. 아폴로 비행사와 달리 일본 우주비행사들은 사업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현재 아키야마를 제외한 8명은 대부분 우주에 관련된 일에 종사하거나 그 경험을 활용하고 있다. 일본인 우주비행사 1기로 선발돼 우주를 다녀온 모리 마모루는 아폴로 비행사처럼 일본의 영웅이 됐다. 마모루는 정부 부처의 장관직을 역임했고 일본의 우주개발산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2007년부터 지금까지 도쿄 미래과학관 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또 다른 우주인 아키히코 호시데는 우주탐사 경험을 살려 니모계획(NEEMO)의 함장으로 임무를 준비 중이다. NASA가 미래 우주 탐사를 대비해 마련한 수중 생활프로젝트다. 대원들은 수심 18m 기지에서 3주 가량 동료와 생활한다. 물속에서 오랫동안 고립된 채 지내기 때문에 비슷한 생활을 해 본 우주비행사가 주로 니모계획에 참여한다.
우주인을 한 명밖에 보내보지 못한 나라의 우주인은 우주 비행 뒤 대부분 자국의 우주산업이나 연구를 위해 살고 있다. 브라질 정부는 러시아와 2000만 달러(약 200억 원) 규모의 계약을 맺고 2006년 공군 조종사 출신 마르코 폰테를 국제우주정거장에 보냈다. 그는 최초의 브라질 출신 우주인이자, 포르투갈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 중에서도 최초다. 현재 폰테는 미국 존슨우주기지에서 브라질 우주산업 개발을 위해 일하고 있다. 페드로 두키는 유일한 스페인 출신 우주인이다. 그는 유럽우주기구(ESA)에서 엔지니어로 6년간 일하다가 우주인이 됐다. 두키는 우주에서 돌아온 뒤 ESA에서 후배 우주비행사들을 이끌고 있다.
아폴로 우주인과 현대 우주인의 차이
우주여행 이후 인생의 방향을 크게 튼 사람 대부분이 우주개발 초기의 비행사다. 그들은 소련과의 경쟁이라는 엄청난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 우주비행을 준비했다. 한 번 다녀온 뒤 다시 우주에 간다는 보장이 없는 시대였다. 아폴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28명 중 15명에게 아폴로 계획은 처음이자 마지막 비행이었다. 우주에 머문 시간도 상당히 짧았다. 당시에는 국제우주정거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폴로 시대의 비행사는 냉전이라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파리 목숨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던 셈이다. 결국 과도한 압박과 불안정성에 염증을 느낀 우주비행사는 우주여행 이후 우주로부터 등을 돌렸다. 아폴로 비행이 끝나고도 우주개발에 10년 이상 참여한 우주인은 2명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현대 우주비행사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국제우주정거장에서 한 달 넘게 생활하는 것도 흔하다. 미국과 러시아 외에 우주인을 필요로 하는 국가도 늘었고, 우주인을 훈련시키고 우주에 보내는 게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지도 알게 됐다. 그들의 값비싼 경험을 잘 활용하는 것은 우주개발에 참여한 국가 사이에서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우주인은 우주를 다녀온 뒤에도 우주여행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일에 대부분 종사하고 있다.

이소연 이후 제2의 우주인 준비해야
이소연이 우주에 다녀온 것은 2008년이다. 그녀가 우주에 다녀온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지만 그녀가 우주여행 이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하 항우연)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삶은 초기 우주비행사와 무척 비슷했다. 아폴로 비행사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다음 비행은 없었다. 다음 한국 우주인에 대한 계획도 기약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특별한 경험을 살려줄 만큼 한국 우주산업이 발전한 것도 아니다.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 일은 우주에서 했던 기초과학 실험 결과를 정리하고, 언제 사용될지도 모르는 후배 우주인을 위한 매뉴얼 제작이었다. 그 외 시간은 대부분 강연을 하며 보냈다. 그녀는 항우연과의 의무계약기간인 2년에 2년을 추가로 연장해 4년 동안 235회의 강연을 했다. 그동안 그녀를 향한 대중의 관심은 점차 사그라졌다. 그녀에게서 왠지 버즈 올드린과 유리 가가린의 뒷모습이 보인다.
국제우주정거장의 함장을 맡으며 캐나다의 국민적 영웅이 된 크리스 해드필드는 “우주 비행은 내 삶의 전부가 아닌 일부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소연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11일간의 우주비행 얘기로 평생을 살 수 없지 않느냐”라고 토로했다. 그녀의 말처럼 우주비행사는 영원한 직업이 될 수 없다. 우주비행은 짧고 그녀에겐 아직 긴 인생이 남아있다.
국제 우주정거장은 여전히 90분마다 한 번 지구를 돌고 있으며 중국은 독자적으로 우주정거장을 건설할 계획이다. 한국의 유인우주 연구는 비교하기조차 부끄러운 수준이다. 지금은 한국 최초 우주인인 그녀를 비난할 시간이 아니라 그녀의 퇴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