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왜 이렇게 느린 거야?”
‘015’를 누르기 귀찮아 ‘▲’를 눌러 텔레비전 채널을 올리기 시작했다. 채널 10개를 바꾸는 데 10초가 흐른 것처럼 느껴진다. 너무 느려 답답하다.
“채널이 한 번 바뀌는 시간은 0.01초에 불과합니다. 10번 바꾸면 0.1초지요. 하지만 사람은 원하는 화면을 보기까지 0.05초 이상 걸리면 답답해 합니다. 인간이 이 정도로 예민해요. 이런 특성을 이해해야 사람에 가장 맞는 자동차도 만들 수 있습니다.”
정의승 고려대 산업경영공학부 교수가 말했다. 그는 인간공학적 설계 전문가로, 14년째 국내 자동차회사에 기술자문을 하고 있다. 자동차는 우리가 늘 쓰는 기계이므로 인체와 심리를 고려한 설계가 꼭 필요하다.
코너를 돌 때 시트가 ‘변신’한다
인간공학적 설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탑승자의 안전과 편의다. 시트 디자인만 바꿔도 운전자의 피로를 크게 줄여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자동차를 타고 코너를 돌면 원심력이 생겨 우리 몸이 바깥쪽으로 쏠린다. 구불구불한 대관령을 장시간 운전하면 피곤한 이유다. 좌석 양쪽에 허벅지 패드가 있어 쏠림을 일부 막아주지만, 노인이나 치마를 입은 여성은 타고 내리기 불편하다. 한 단계 더 진화한 시트는 코너를 돌 때만 시트 옆구리가 앞으로 나온다. 스티어링 휠(일명 ‘핸들’)을 조작하는 속도와 각도, 차량 속도에 따라 시트가 나오는 정도가 달라진다. 현재 한국에서 판매되는 수입차에 적용돼 있다.
평탄한 길을 가더라도 장시간 운전하면 피로도가 급증한다. 조금이라도 피로를 줄이기 위해 자동차 회사들은 사람마다 다른 목과 등, 허리 곡면을 완벽하게 받쳐주는 ‘유연한’ 시트를 만들었다. 초기 자동차 시트는 좌석의 위치와 등받이 기울기만 바꿀 수 있었다. 최근에는 키가 큰 사람을 위해 좌석의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시트가 나왔다. 고속버스의 좌석처럼 아래쪽에 숨겨져 있는 추가 시트를 펴면 된다. 이 외에도 앉는 부분의 기울기, 머리 받침대의 높이와 기울기, 허리 받침 쿠션의 위치까지 조절할 수 있다.
김정현 벤츠코리아 홍보팀 과장은 “벤츠 승용차에 적용된 허리 피로도를 줄이는 시트 디자인은 독일 요추협회의 인증까지 받았다”고 말했다.
닛산자동차는 우주의 무중력 환경에서 인체가 취하는 자세가 가장 피로가 적다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연구결과에 착안해 비슷한 자세로 운전할 수 있도록 시트를 디자인했다. 일명 ‘무중력 시트’다. 인체 무게가 많이 쏠리는 부분은 더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 근육과 척추에 미치는 피로를 최소화했다.
엔진 소리를 ‘작곡’해야 소비자 마음 훔친다
최신 전자기기에 내장된 수많은 기능은 기억하기도 어렵다. 정 교수는 “복잡한 기능을 복잡한 채로 내놓으면 아무도 쓰려고 하지 않는다”며 “자동차는 조작이 복잡하면 사고가 날 위험이 크기 때문에 복잡한 기능을 ‘생각 없이’ 쓰도록 만드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미래 자동차는 운전자가 앉는 순간 카메라로 눈과 어깨의 높이를 인식해 시트와 거울의 위치를 최적으로 맞춰준다. 운전자는 별도로 조작할 필요도 없다. 이 기술의 초기 형태가 바로 ‘메모리시트’다. 차 한 대를 부부가 함께 쓰거나, 겨울에 두꺼운 옷을 입어 시트를 조절해야 할 때, 버튼을 한 번만 누르면 미리 저장해둔 시트 형태로 조절된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실감형’ 내비게이션이다. 지금 많이 쓰고 있는 모니터형 내비게이션은 운전자를 바쁘게 만든다. 낯선 지역에라도 가면 운전을 하면서 동시에 내비게이션과 실제 도로를 비교해야 하고,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건물을 찾기 위해 몸을 바짝 낮추고 사방을 살펴야 한다. 정 교수는 “필요한 정보가 전방 시야에서 좌우로 40~50°, 위아래로 30° 정도인 타원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뇌가 시각 정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내비게이션 위치가 자꾸만 위로 올라오는 이유”라고 말했다.
실감형 내비게이션은 앞 유리창에 나타난다. 실제 상은 유리창에 맺히지만, 운전자가 보기에는 실제 도로 바닥과 건물 벽에 화살표가 나타난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이 다른 영상을 보도록 각도를 조절해 입체감을 느끼는 3D TV와 같은 원리다. 운전자는 실제 건물에 겹쳐 보이는 내비게이션을 보고 가면 된다. 익숙하지 않은 운전자는 사고를 낼 가능성이 있어 아직 상용화되지는 않았다.
실용적인 정보라도 너무 많으면 뇌가 처리하기 힘들다. 자동차는 한 번에 제공하는 정보를 5개로 제한한다. 1950년 미국 하버드대 조지 밀러 교수는 ‘마법수 7±2’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인간 뇌는 5개에서 9개 사이의 정보를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핸드폰 번호도 010을 제외하면 7~8자리다. 자동차는 안전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보다 적은 5개로 맞춘다.
소리도 자동차를 선택하는 소비자 심리에 큰 영향을 준다. “국내 업체가 청소기를 개발해 유럽에 수출한 적이 있어요. 영국에서 성공적으로 팔렸지요.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안 팔리는 거예요. 알고 봤더니, 청소기 소음의 주파수 영역이 프랑스 국민이 아주 싫어하는 영역이었어요. 그 소음을 빨아들이는 흡음재를 붙여 해결했습니다.”
정 교수는 “운전자 몸이 아무리 편하고 복잡한 기능을 쉽게 쓸 수 있는 자동차라도, 시각이나 청각적 요소가 심리와 맞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눈을 감고 고급형 세단과 저가 소형차의 문 닫히는 소리를 들어보면 단번에 구분할 수 있다. 자동차 회사들이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 고급스러운 사운드를 따로 개발한 덕분이다.
BMW사는 20여 명의 연구원이 참여해 고유한 엔진 소리를 만들었다. 먼저 듣기 좋은 가상의 엔진 소리를 디지털로 제작한 뒤, 실제 주행상황과 똑같은 시뮬레이션 시설에서 엔진을 가동시키고 소리를 녹음해 비교했다. 이 작업을 반복하면서 엔진음을 하나씩 조율해 결국 두 소리를 완전히 일치시켰다. 이탈리아의 마세라티사는 작곡가와 피아니스트의 자문을 받아 ‘작곡’한 엔진소리를 악보로 제작하기도 했다.
‘여심’을 읽어야 자동차가 성공한다
전 세계 구매력의 60% 이상을 여성이 가지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각 분야의 선도 업체들이 ‘여심’을 공략하는 이유다. 자동차 회사도 다르지 않다. 정 교수는 “아직 남성 운전자가 더 많지만, 차를 살 때는 부인 의견을 더 많이 고려하는 게 요즘 소비자”라며 “여성의 마음에 드는 자동차를 개발하기 위해 자동차 회사들이 ‘여성’을 연구한다”고 말했다.
‘안전제일’을 내세워 주부에게 인기가 많았던 볼보사는 2002년, 자사의 여성 엔지니어들을 불러 모았다. 주부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여성의 차’를 개발하라고 주문한것이다. 이 차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녀들은 가장 먼저 액셀과 브레이크 사이에 손가락 굵기 만한 구멍을 깊게 뚫었다. 10cm에 달하는 하이힐 굽을 넣는 구멍이다. 액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으려면 발뒤꿈치를 바닥에 대고 힘을 줘야 하는데, 하이힐을 신으면 뒤꿈치에 힘을 주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실제로 차 안에 운동화를 따로 구비해놓는 여성이 많다.
머리 받침대에 움푹 들어간 홈도 만들었다. 바쁜 아침 시간을 쪼개 기껏 멋지게 드라이를 했는데, 자동차의 머리 받침대에 머리가 눌렸던 것이다. 위험해 보이지만 걱정은 없다. 추돌이 감지되는 순간에는 머리 받침대가 용수철의 힘으로 튕겨 나와 충격을 흡수한다.
한 팔엔 아이를 안고 다른 손엔 장 본 짐이 가득한 주부라면 ‘스마트 트렁크’ 기능이 반갑다. 낑낑대며 키를 꺼내 트렁크에 꽂고 돌릴 필요 없이, 스마트키를 주머니 속에 넣고 트렁크에 다가가면 자동으로 잠금이 해제된다. 뒤 범퍼 밑으로 발을 넣어 좌우로 움직이면 센서가 발의 움직임을 감지해 트렁크 문을 열어준다. 현재 고급차 모델에 적용돼 있다.
인간공학 끝판왕은 나와 자동차의 ‘일체감’
1850년 메르세데스 벤츠가 가솔린 엔진 특허를 낸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자동차는 곧 벤츠를 뜻했다. 당시 전투기를 만들던 BMW사는 독일 패망 이후 전투기를 못 만들게 됐고, 보유하고 있던 엔진 기술로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후발업체로서, 전통적인 고급스러움을 나타내는 벤츠의 세단과는 다른 전략이 필요했다.
그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한번 몰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자동차를 만들기로 했다. 치타나 말처럼 잘 달리는 동물의 다리와 엉덩이 근육의 선을 모방했다. 자동차의 스피드와 힘을 나타내는 데 적격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동그란 눈처럼 생긴 전조등과 차체의 부드러운 곡선은 이제는 BMW만의 정체성이 됐다. 정의승 교수가 말했다.
“쓰기 편하고 안전하며, 감성을 건드리는 디자인이 자동차 인간공학의 전부는 아닙니다. 한 번 더 보고 싶고 자꾸 타고 싶은 걸 넘어, 소비자가 자동차의 정체성과 자신을 일체화하도록 만드는 것, 그게 바로 나와 꼭 맞는 인간공학적 자동차를 만드는 마지막 단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