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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시대 40년의 역사 속에는 '최초'를 향해 치닫은 미국과 옛소련의 치열한 레이스가 있다. 또 그속에는 우주비행사들의 애환이 담겨 있다. 달에 인간을 보내지 못한 옛소련의 속사정, 금녀의 우주에 뛰어든 여성 우주비행사, 완벽 속에 빚어진 우주사고 등 에피소드를 모았다.

최초의 달착륙은 레오노프가 할뻔

우주시대를 돌이켜보면 미국과 옛소련(러시아)은 국가의 자존심을 걸고 최초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양국가의 우주레이스는 최초의 인공위성(1957년). 최초의 달충돌우주선(1959년). 최초의 유인우주비행(1961년). 최초의 우주유영(1965년)등으로 이어졌고, 거의 모두 옛소련의 압승으로 끝났다.

모든 것이 뒤졌던 미국은 인간을 달에 최초로 보내는 일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은 의회연설에서 1960년대가 지나기 전까지 달에 인간을 보내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1969년 7월 20일 마침내 닐 암스트롱이 인간으로선 처음으로 달표면을 밟았다.

옛소련은 왜 달에 인간을 보내는 일만은 미국에게 뒤졌을까. 사실 공개는 되지 않았지만 옛소련 역시 달착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목표년도도 미국보다 더 분명했다. 볼세비키혁명 50주년을 맞는 1967년이었다. 그리고 탑승자로 최초의 우주유영을 성공시킨 알렉세이 레오노프를 내정해 두었다. 그는 사회주의의 우수함을 자랑할 최초의 달착륙 우주인으로 손색이 없었다.

옛소련은 보스토크, 보스호드, 소유즈 등의 우주선과 달궤도 시험위성 존드를 순조롭게 개발해갔다. 미국에서는 머큐리, 제미니, 그리고 아폴로 우주선 등이 개발됐다. 1967년 옛소련과 미국은 모두 상당한 수준의 우주선을 개발해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우주선을 달에 보낼만한 거대로켓을 완성한데 비해, 옛소련은 연구단계에 머물고 있었다.

양국의 로켓 개발은 두명의 인물에 의해 주도됐다. 미국의 로켓개발팀은 로켓이 군사무기로 활용되는데 일익을 담당했던 독일인 폰 브라운이 이끌었고, 옛소련은 옛소련 최초의 액체연료 로켓을 개발하는데 참가했던 세르게이 코롤레프가 총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폰 브라운은 거대로켓 개발에 성공했지만 코롤레프는 완성된 로켓의 시험발사도 보지 못한 채 1966년 사망했다.

코롤레프의 뒤를 이은 미신은 N1 달로켓을 완성시켜 1969년부터 1972년까지 4회에 걸쳐 시험 발사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 결과 옛소련은 달착륙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옛소련의 실패원인은 너무 복잡한 로켓시스템에 있었다. 러시아의 달로켓은 1백5m의 5단 로켓으로, 1단 엔진으로 무려 30개의 엔진을 이용했다. 30개의 엔진이 동시에 점화되고 좌우대칭되는 엔진이 같은 성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제어돼야 하지만, 당시로서는 제어하기 불가능한 방식이었다.

옛소련에서 개발한 진정한 달로켓은 1987년에 개발됐다. ‘에너르기아’라는 이 로켓은 지구궤도에 32t의 우주선을 올려놓을 수 있는 추력 3천t의 로켓이다. 에네르기아는 러시아판 무인 우주왕복선인 부란 발사에 이용됐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 표면에 내려서는 닐 암스트롱. 암스트롱은 제미니 9호(1966년), 아폴로 11호(1969년)등을 탔던 미국의 우주 비행사다.


우주는 금녀구역인가

초기 우주비행은 백인 남성의 독점물이었다. 1963년 옛소련의 여성 우주비행사 테레슈코바가 세계 최초로 우주비행에 나섰지만, 그후 20년 동안 여성 우주비행사는 우주선에 오르지 못했다. 테레슈코바는 옛소련이 ‘최초’라는 타이틀을 노린 여성 우주비행사였던 것이다. 두번째 여성 우주비행사는 1982년 8월 19일 소유즈 T7을 타고 우주정거장 살류트 7호를 방문했던 사비츠카야다.

미국 역시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에 대한 유혹은 컸다. 그래서 1959년 비밀리에 의학적인 테스트를 거친 13명의 여성우주비행사를 선발했다. 이들은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 훈련원(first lady astronaut trainees)이라는 뜻의 ‘FLATs팀’으로 불렸다. 비록 여자였지만 이들은 당시 머큐리계획으로 선발된 남성 우주비행사들보다 우수한 편이었다. 여성은 우주에서 열, 추위, 소음, 중력가속도로부터의 고통을 견디는 정도가 남성보다 나았다. 더욱이 체격이 작기 때문에 공기, 물, 음식 등을 덜 소비하며 공간도 작게 차지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1960년 초에는 두명의 우주비행사가 타는 제미니(‘쌍둥이’란 뜻) 우주선을 위해 여자 쌍둥이인 잰 디에트리히와 마리온 디에트리히 자매가 선발된 적도 있었다. 쌍둥이가 아닌 사람보다 쌍둥이가 더욱 일을 잘하며 오랜 비행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훨씬 잘 견딜 수 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들은 백지화됐고 FLATs팀은 해체됐다. 공식적인 이유는 이들이 군용비행기의 테스트파일럿(새로 만든 비행기의 각종 성능을 검사하는 숙련 비행사) 출신이 아니며 초음속제트기의 경험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머큐리를 탔던 남성 우주비행사들은 모두 테스트파일럿이었다. 그리고 군대에서는 여성 파일럿을 선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음속제트기를 탄 경험을 가진 여성은 있을 수 없었다.

미국의 여성 우주비행은 1978년 우주왕복선 탑승인원으로 뽑은 35명의 우주비행사에 6명의 여성이 포함되면서 다시 시작됐다. 기존의 우주선과 달리 우주왕복선은 발사시 큰 충격이 없으며 칸막이형의 화장실과 개인침낭으로 남녀 공동생활에 불편함이 없었다. 미국인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는 1983년 챌린저호에 탑승한 샐리 라이드다.

금녀의 구역에 여성들이 뛰어들면서 남성 우주비행사와 사랑이 싹트는 경우도 생겼다. 이들 중 샐리 라이드를 비롯해 두쌍이 결혼에 성공했다. 최초의 우주인부부는 보스토크 3호를 탔던 니콜라예프와 보스토크 6호를 탔던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 테레슈코바다. 이들은 우주비행 후 곧장 결혼해 옐레나라는 딸을 낳았다. 이는 우주비행 중 입은 방사능이 임신에 영향을 미치지 않음을 입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영국의 첫번째 우주비행사 헬렌 샤만. 그는 1991년 소유즈를 타고 8일 동안 미르를 방문했다.


우주비행중 사망확률은 2%

요즘 항공기 추락사고가 국내외 관심거리다. 우주사고로 인해 인간이 사망한 것은 모두 4번. 1961년 보스토크 1호부터 97년 8월15일 소유즈 TM26까지 2백2회의 우주비행 중 2%에 해당한다. 항공기 사고의 대부분이 이륙과 착륙에서 일어나듯이, 유인 우주비행사고는 이착륙 때 대부분 일어났다.

시험발사를 포함해 이륙사고는 1967년 1월 3명이 사망한 아폴로 1호의 화재, 1986년 1월 7명이 사망한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폭발이 있다. 착륙사고는 1967년 4월 1명이 사망한 소유즈 1호, 1979년 6월 3명이 사망한 소유즈 11호를 들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미국은 이륙과정에서, 러시아는 착륙과정에서만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아폴로 1호는 달비행을 위해 만든 미국의 첫번째 우주선이었고, 챌린저호는 저예산의 운송체계를 개발하기 위해 위험한 고체연료부스터를 사용한 최초의 유인우주선시스템으로 5년간 무사고운전을 하고 있었다. 사고발생 후 아폴로계획과 우주왕복선계획은 연기됐고, 2년 후 개량된 모델이 나왔다. 챌린저호 폭발사고의 원인규명 과정은 사고위원회에 참가했던 파인먼박사가 쓴 ‘미스터 파인먼’이라는 책에 자세히 언급돼 있다. 99.99%의 안정성을 가지고 발사되는 우주선이지만, 우주개발도 인간이 하는 일이라 실수가 없을 수 없나 보다.

좌절을 극복한 우주비행사들

1997년 8월까지 2백2회의 유인우주비행 중 7백56명이 탑승했지만 실제로 우주에 다녀온 사람의 수는 이에 미치지 못한다. 제미니우주선에서부터 우주왕복선까지 6번을 탑승한 존 영처럼 중복해 타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의 우주비행을 위해 18년을 기다려야 했던 우주비행사도 있었다.

머큐리계획에 참여했던 도널드 슬레이튼은 원심분리기 훈련 중에 심장질환(심방근육이 가끔 떨리면서 부정맥이 발생하는 가벼운 병)을 가지고 있음이 밝혀져 우주비행이 취소됐다. 그 결과 슬레이튼은 존 글렌에 이어 미국인으로는 두번째로 지구궤도를 비행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슬레이튼의 병은 머큐리계획과 아폴로계획이 끝날 때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NASA를 떠나지 않고 우주비행사 훈련교관으로 비행의 날을 기다렸다. 1972년 몸이 정상으로 회복됐지만 이제는 탑승기회가 없었다. 새로운 스카이랩 계획에는 이미 탑승할 사람들이 선발된 상태였고 우주왕복선 계획까지는 기다릴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에게 탑승기회가 만들어졌다. 1975년 미국의 아폴로와 옛소련의 소유즈 우주선이 도킹하는 계획이 수립된 것이다. 슬레이튼은 18년 동안 기다린 끝에 아폴로 18호를 타고 우주비행에 나섰는데, 그의 나이는 당시 우주비행사 최고의 고령인 51세였다. 이 기록은 1983년 54세의 나이로 우주왕복선을 탄 윌리엄 토르톤박사에 의해 깨졌다.

갑작스럽게 계획이 변경돼 달에 가지 못한 우주비행사도 있었다. 원래 아폴로는 20호까지 계획됐다. 그러나 국내외 사정으로 17호로 도중하차했다. 그렇게 되자 아폴로 18호에 탑승 예정이었던 슈미트는 매우 곤란해졌다. 지질학자인 그는 아폴로계획 참가자 중 군인이 아닌 유일한 과학자였다. 만일 그가 가지 않는다면 달의 지질탐사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아폴로 17호에 탑승 예정이었던 엔글러는 자신의 자리를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엔글러는 달에 가지 못했지만 1981년 우주왕복선의 선장이 됨으로써 보상받았다.

정치인으로 성공한 우주비행사

우주비행사 중에는 정치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인 테레슈코바는 1967년 옛소련의 최고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됨으로써 우주비행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정치인이 됐다. 미국인 최초로 궤도비행에 성공한 존 글렌은 1974년 오하이오주에서, 아폴로 17호를 탔던 해리슨 슈미트는 1976년 뉴멕시코주에서 상원의원이 됐다.

1970년 아폴로 13호로부터 성공적으로 귀환한 승무원 중에는 잭 스위가트(영화에서는 캐빈 베이커가 그 역을 맡음)가 있었다. 그는 다른 13호의 승무원처럼 다시 우주로 나가지 못했지만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1982년 콜로라도주에서 상원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그는 그해 12월에 암으로 죽고 만다. 현재 미국 국회의 중앙홀 입구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우주비행사들에 얽힌 이야기는 다치바나 다카시(立化隆)가 쓴 ‘우주비행사 그들의 이야기’(1991년 국내에 번역됨)와 필립 카우프만감독이 만든 ‘필사의 도전’이란 비디오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1997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정홍철 한국우주정보소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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