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법이 발전하는데 마취법과 무균법이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마취법은 수술시 발생하는 통증을 완화시키는 방법으로서 예로부터 알코올이나 아편(마약의 일종)을 이용해 수술의 어려움을 일부 해결했으며, 19세기에 들어서서 아산화질소(N2O), 에테르, 클로로포름 등이 마취 효과를 지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무균법도 마취법과 비슷한 시기에 발전했다. 미생물이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진 19세기 중반경 의학계의 선구자들에 의해 무균법이 알려지면서 꺼져가던 환자의 생명을 구하게 된 것이다.
석탄산 이용한 가축 소독법에서 힌트
미생물에 의해 발효나 감염성 질병이 발생한다는 파스퇴르의 연구결과를 접한 영국의 리스터는 수술받은 환자들이 사망하는 가장 흔한 원인인 패혈증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에 의해 발생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별다른 해결책이 없어 고심하던 리스터는 어느 농장의 가축들이 원인 모르게 죽어갔지만 하수로에 석탄산(페놀)을 뿌리자 가축들의 사망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은 리스터는 수술 후에 생긴 상처 부위에 세균의 침입과 증식을 억제하기 위해 상처 부위를 석탄산에 적신 붕대로 감으면 될 것이라는 주장을 1867년에 발표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그때까지 환자를 돌봐 오던 의사들의 방식이 잘못됐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었으므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스터는 계속해서 자신의 연구를 진행해 수술실에 석탄산을 분무해 수술실 전체를 소독하는 방법, 수술 기구와 장비를 소독하는 방법, 세균이 감염될 수 있는 부위를 소독하는 방법 등을 계속 연구했다. 결국 그의 무균처리법은 더욱 좋은 결과를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의사들이 받아들이는 진리가 됐다.
자기 주장 관철하려다 정신병동으로
헝가리 출신의 젬멜바이스는 리스터보다 먼저 무균처리법을 주장한 사람이었다. 1840년대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고 있던 그는 우연히 병원 산모의 사망률이 조산원 산모에 비해 훨씬 높다는 통계수치를 발견했다. 병원은 교육받은 의사와 의과대생들이 산모를 돌보는데, 경험만으로 산모를 돌보는 조산원에 비해 왜 사망률이 더 높을까. 여기에 관심을 가진 그는 일반 병동과 조산원의 차이에 대해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조산원은 손을 깨끗이 한 후 산모를 돌보지만 의사나 의과대생들은 해부 실습실이나 전염병 환자를 돌보다가 그냥 병동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분만실에 근무하는 의사가 분만실에 출입할 때, 가지고 있는 장비와 손을 비누와 염소로 소독하면 산욕열(출산 후 산모에게서 발생하는 세균 감염)에 의한 산모의 사망이 현저히 감소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는 10년 이상의 연구결과를 축적해 리스터보다 6년 앞선 1861년에 무균처리가 산욕열에 의한 사망률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내용을 책자로 발간해 유럽의 주요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발송했다.
그러나 그의 책은 곧 쓰레기통으로 던져지고 말았다. 그의 주장을 따르는 것은 그 때까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므로 의사들은 그의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독불장군식의 성격을 지니고 있던 젬멜바이스는 산부인과 의사들을 설득하는 대신 그들을 산모 사망의 원인으로 몰아부쳤고 곧 모든 의사들을 상대로 싸움을 해야만 했다. 결국 수적으로 밀린 젬멜바이스는 자신의 주장을 널리 펴지 못한 채 피폐해진 성격으로 인해 정신병동에 감금됐다가 1865년에 자신이 해결하고자 했던 세균감염에 의한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젬멜바이스보다 먼저 무균법의 중요성을 깨달은 사람들도 있었다. 영국의 고든과 화이트는 각각 청결한 분만실 관리가 산모들의 생명을 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18세기에 이미 발표했으나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미국의 홈즈는 1843년에 발표한 자신의 논문에서 산욕열이 산모에게 전파되는 전염성 질환이며 청결이 중요하다는 의견을 발표했으나 젬멜바이스가 당했던 것과 똑같은 반발을 당한 후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노력하지 않았다. 덕분에 홈즈는 역사의 선구자는 되지 못했지만 정신병동 신세는 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