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 둥지.
초겨울 특유의 스산한 기운이 감돌던 지난해 12월 2일 오후, 대전 문지동에 위치한 카이스트(KAIST) 문지캠퍼스를 찾았다. 이곳 한 켠에 마련된 국가핵융합연구소 이터(ITER)한국사업단의 초전도연구개발동을 찾았을 때, 문득 ‘빈 둥지’라는 말이 떠올랐다. 한때 이곳은 핵융합 발전의 핵심 기술을 개발하던 곳이었다.
“2006~2007년에 여기에서 한국형 핵융합실험로인 케이스타(KSTAR)를 위한 초전도 자석을 만들었어요. 지금은 개발이 끝나 다른 이터 실험을 할 때만 조금씩 쓰고 있지요.”
박수현 이터한국사업단 박사가 말했다. 건물 입구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어지간한 가정집 크기는 돼 보이는, 거대한 원통형 금속구조물이 나왔다. ‘진공열처리로’라는 장치였다. 초전도체가 되려면 자석을 65℃로 100시간 데워야 하는데, 그 과정을 담당하는 장치다. 한 때 이 장치는 몇 년 뒤의 시험 운전을 꿈꾸며, 혹은 몇 십 년 뒤 미래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순간을 상상하며 조용히 자석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연구동은 차갑게 식은 채 홀로 남아 있었다. 마치 자식을 떠나 보낸 새의 둥지처럼.
빈 둥지, 다시 ‘알’을 품다
가로 60m, 세로 25m.
공룡도 품을 것 같은 이 커다란 ‘빈 둥지’에 최근 새로운 활기가 돌고 있다. 새로 품을 ‘알’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직 작지만, 앞으로 공룡보다 커져서 한국의 핵물리학 수준을 크게 끌어올릴 중요한 알이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중이온가속기구축사업단이 이곳 일부를 가속기 부품을 실험하는 데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한국 최초의 중이온가속기 ‘라온’(다음쪽 일러스트 참조)이 탄생할 둥지가 된 것이다. 이미 일부 부품은 개발을 마치고 실험까지 한 상태다.
“몇 주 전에 오셨으면 실험하는 장면까지 보실 수 있었는데….”
가속기 개발을 이끌고 있는 전동오 가속기부장이 말했다. 전 부장은 세계적인 가속기 물리학 전문가로, 한국에서 최초로 중이온가속기를 개발한다는 말에 20여 년의 미국 생활을 접고 바로 귀국했다. 며칠 앞서 열린 기초과학연구원 학술대회에서 처음 만났는데, 가속기의 개발 현황을 조용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발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가속기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는 빔 발생장치(ECR 이온원)의 초전도 자석과 빔 분리부의 초전도 자석 코일을 각각 개발해 실험했습니다. 8000개가 넘는 중이온가속기 ‘라온’의 세부 작업 가운데 가장 까다로운 분야죠. 그래서 우선적으로 개발했는데 다행히 성과가 아주 좋습니다. 목표 성능을 수십 %씩 넘고 있죠.”
전 부장이 선 곳에 은빛으로 빛나는 길쭉한 장치가 보였다. 가속기에 ‘쏠’ 이온을 만들어내는 장치의 핵심 부품인 초전도 자석이었다. 여기에서 만들어진 이온은 뱀처럼 긴 초전도 가속관을 거치며 빛의 속도의 51%까지 가속된다. 이렇게 빨라진 이온은 탄소 시료와 충돌하며 부서져 여러 희귀 동위원소를 만들어내고, 이 원소는 빔 분리부에서 분리돼 여러 가지 실험에 이용된다. 이 전자석은 이 과정의 시작과 끝을 담당한다. 그런데 겉모양만 봐서는 이게 왜 개발하기 까다로운 부품인지 실감이 안 났다. 개발을 주도한 김도균 IF·고주파팀 연구위원과 최석진, 김용환 빔물리·입사기팀 연구위원에게 설명을 요청했다.

“초전도 자석은 코일을 감아 만드는데, 단면이 가로 세로 1.2mm, 0.8mm인 니오븀-티타늄 합금 코일을 씁니다. 이걸 자동으로 감는 방법은 없고, ‘한땀한땀’ 손으로 감아야 합니다. 감을 때마다 에폭시로 고정을 해야 하는데, 이 과정을 1968바퀴 되풀이합니다. 그냥 평평한 형태로 감아도 보통 일이 아닌데, 이온 발생장치에 쓸 초전도 자석은 휘어진 말 안장 모양이에요. 곡면에 촘촘하고 일정하게 감아야 하니 더욱 어렵죠. 성공한 나라가 손에 꼽힙니다. 초전도 자석에는 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의료용 MRI와 비슷한 7T(테슬라)의 엄청난 자기장이 걸립니다. 만약 코일이 조금만 일정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발생하죠.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이 과정이 약 10일 걸린다고 했다. 코일과 에폭시가 가지런하고도 촘촘하게 감긴 모습은 사람 손으로 했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갈했다. 참빗으로 빗은 조선시대 아녀자의 앞머리가 이랬을까. 이보다 더 정성스러울 수 있을까.
가속기는 입자물리학과 핵물리학의 상징이자 첨단 기술의 집합체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부분은 무수히 많다. 300~400m나 되는 거대한 가속기 전체에서 부품의 크기 오차가 0.15mm보다 작아야 하고, 빔이 지나는 곳은 1000억 분의 1기압 정도의 초고진공을 유지해야 한다. 영하 269~271℃의 극저온은 기본이다. 하지만 정작 연구팀이 가장 어려운 부분으로 꼽은 부품은 이런 복잡한 기계나 미세한 반도체가 아니었다. 사람이 직접 틀에 코일을 감은 자석이었다. 이 사실은 역설적이다. 거대하고 복잡하며 자동화한 첨단 시설에서, 우리는 그 주역이 기계가 아니라 그 기계를 설계하고 만드는 과학자와 공학자라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국내 업체가 만들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해요.”
전 부장이 말했다. 두 초전도 자석 모두 금룡이라는 국내 기업의 기술력으로 완성했다.
“우리나라는 중이온가속기 건설도 처음이지만, 이용되는 초전도 부품도 개발해본 경험이 없습니다. 내년부터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시험할 가속기의 ‘몸체’인 초전도 가속관도 처음이지요. 그래서 되도록 국내 기업들을 개발에 많이 참여시키고 있습니다. 기술력을 쌓을 절호의 기회니까요.”

대기업에서 냉장고 개발하다 이곳에 오기도 해
한참 설명을 듣다 보니 냉기가 올라왔다. ‘둥지’는 몹시 추웠다. 하지만 내년부터는 다시 온기가 돌 예정이다. 차차 실험 부품 수를 늘려서 공간을 가득 채울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실험한 두 가지 부품을 필두로 가속관, 빔 입사기 속 세부 부품 등을 계속해서 실험할 예정이다. 초전도 자석도 꾸준히 수를 늘려 제작해 실험하고, 이들을 결합한 부품(예를 들어 4극 자석은 4개가 한 조를 이루고, 이들이 다시 3개가 모여야 하나의 부품이 완성된다. 이런 부품이 가속기 전체에 15개가 들어간다)도 완성해 실험할 예정이다. 그러다 보니 이 큰 둥지도 비좁을 판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런 공간의 3배는 있으면 싶은데, 그게 뜻대로 되나요.”
전 부장이 웃으며 말했다. 조감도를 보면 가속기는 작은 마을 하나가 통째로 들어가야 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특히 직선 형태의 가속관을 쓰는 선형가속기(IF)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성능 좋은 초전도 가속관을 써도 규모를 줄이는 데 한계가 있다. 아이솔(ISOL, 127쪽 INSIDE참조)은 지름 5m의 전자석으로 이뤄진 원형가속기(사이클로트론)를 쓰지만, 역시 2차 선형 가속기를 갖고 있다. 이 안에 들어갈 수많은 부품을 시험하기엔 확실히 ‘둥지’도 작아 보였다.
인원도 만만치 않다. 현재(2013년 12월) 사업단에는 100여 명이 근무하고 있고, 이 중 가속기부에서 연구하는 인력은 46명이다. 국내외에 흩어져 있던 연구 인력을 모은 결과다. 김선기 중이온가속기구축사업단장(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은 “대기업에서 냉장고를 만들던 연구자가 온 경우도 있다”며 “중이온가속기라는 목표를 위해 모인 드림팀”이라고 귀띔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김 단장은 “좀더 보강할 계획이지만, 비슷한 규모의 중이온가속기인 미국의 에프립(FRIP)에 500명의 연구 인력이 있는 것과 비교하면 많이 적은 편”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연구팀은 한 주에 60시간 이상씩 연구에 매진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의외로 원자핵을 잘 모른다
가속기는 종류에 따라 목적이 많이 다르다. LHC 등 충돌형 가속기는 강력한 에너지를 지닌 입자나 핵(이온)이 서로 부딪히기 때문에 막대하게 높은 에너지를 낸다. 이를 이용하면 빅뱅 직후의 우주 초기 환경을 흉내 내 연구하거나, 높은 에너지 영역에서만 만들 수 있는 입자를 탐색할 수 있다. 1, 2파트에 나온 질량이 큰 입자(아직 발견하지 못한 입자 포함)들은 대부분 이 과정을 통해 발견했거나, 발견할 예정이다.
중이온가속기는 조금 다르다. 가장 중요한 연구 대상이 입자가 아니라 핵이다. 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뤄져 있는데, 둘의 수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핵종(양성자, 중성자의 조합으로 이뤄진 핵의 종류. 흔히 동위원소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핵종이 정확한 표현이다)이 된다.
검은 쌀과 흰쌀을 섞어 밥을 지은 뒤 주먹밥을 만든다고 해보자. 두 가지 쌀을 각각 몇 개씩 섞었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종류의 주먹밥이 나올 것이다. 실제로 핵물리학자들은 양성자와 중성자의 조합에 따라 1만 개 이상의 핵종이 나타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공적으로 만들어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사실상 볼 수 없는 핵종이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발견한 핵종은 3000여 개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런 핵종을 만들고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가속기다. 각국이 성능 좋은 중이온가속기 개발에 열을 올리는 이유다. 아직 70%가 발견된 적이 없는 미지의 원소 영역. 그곳에 진출할 가장 좋은 기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가령 ‘코리아늄’을 찾을 수도 있겠죠.”
김 단장이 말했다. 코리아늄은 사업단이 개발 중인 중이온가속기 라온으로 발견할 미지의 새 원소를 부르는 가상의 이름이다. 마리 퀴리가 1898년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원소에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붙인 것처럼(폴로늄) 한국의 이름을 딴 원소가 탄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100년이 훨씬 넘은 핵물리학의 역사 속에서 한국과 관련한 이름을 가진 원소는 하나도 없다. 한국 과학자가 발견한 원소도 전무하다.

하지만 새로운 원소가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중이온가속기는 핵물리학과 천체물리학에도 큰 기여를 할 예정이다. 김 단장은 “우리는 의외로 ‘핵’에 대해 모른다”며 “셀레늄 등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무거운 원소가 우주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조차 모르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김 단장은 “초신성이 폭발해 만들어진 중성자별에서 중성자를 얻어 생겼다는 가설이 있는데, 지금껏 관찰은 물론 실험조차 할 수 없어 검증된 적이 없다”며 “라온으로 직접 만들어 중간 과정까지 검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물리 할 팔자”
김영만 이론연구부 핵물리팀장은 또다른 목표를 이야기했다. 이론연구부는 라온에서 찾고자 하는 원소가 있을 때 이것을 적절한 실험을 통해 해결할 수 있도록 이론적으로 계산해 조언하기도 하고, 실험 결과를 이용해 다양한 핵물리학 연구도 한다.
“중성자별은 밀도가 아주 높습니다. 단단하게 뭉쳐 있는 핵보다도 6~7배 높은 수준이에요. 그래서 중성자별 안에서는 핵이 ‘쿼크 매터’라고 하는 (꼭 녹아 뭉친 것 같은) 특이한 상태로 변해 있지요. 그런데 어느 밀도에서 이런 상태로 변하는지 아무도 몰라요. 라온에서는 핵보다 2~3배 정도 밀도가 높은 상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영역에서 핵이 변하는지를 실험해볼 수 있지요.”
그밖에 불안정한 핵의 내부 상태를 계산하거나, 양성자와 중성자가 고밀도 에너지 상태에서 서로 구분이 사라지는지(아이소스핀 상실) 등 이론물리학의 여러 난제에 도전할 예정이다.
“일부 문제는 한국에 있는 가장 우수한 슈퍼컴퓨터를 써도 부족할 정도로 계산이 복잡해요. 핵 안에서 양성자와 중성자가 벌이는 문제는 이렇게 어렵습니다. 또 앞으로 할 일도 무척 많겠죠.”
김 팀장이 말했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기대와 기쁨의 빛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제가 독일에서 잠시 방문 연구를 하고 있던 90년대 중후반이었어요. 바로 옆에 실험장치가 있는 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죠. ‘이 사람들은 진짜 손에 잡히는 물리를 할 수 있겠구나’하고요. 다른 나라에 가서야 그런 기회를 얻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에요. 그런데 이제 우리도 가능하게 됐어요. 실험과 이론이 서로 피드백을 주고 받으며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거예요.”
김 팀장은 인터뷰 끝에 “개인적으로 물리학의 난제 중 하나인 양자색역학(QCD)의 감금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며 “언젠가 가속기로 연구할 날이 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만약 그 문제를 풀면 미련 없이 물리를 그만 둘 거라고 농담하곤 해요. 그런데 그럴 리가 없거든요? 죽을 때까지 물리를 할 팔자죠.”
풀리지 않는 질문이 있으니 지치지 않아 좋다며 웃었다. 행복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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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힉스에서 새로운 물리학까지
Bridge. 입자물리학 119년의 역사
Part 2. 한국인이 제안한 미스터 입자3
Part 3 '코리아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