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가 올바른 사과를 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피해를 준 주체로서 피해자의 심신의 고통을 덜어줄 의무가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대 의료센터 예방및행동의학과 매튜 화이티드 교수팀은 불쾌한 말을 들어 화가 나는 상황에서 사과를 받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혈압이 더 빨리 안정화된다는 연구 결과를 냈다(학술지 ‘행동의학’ Vol33(4), 293-304, 2010).
그러나 엉뚱한 사과를 하면 오히려 피해자의 울화통을 터뜨리는 수가 있다.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KAIST 문화기술대학원에서 정재승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의 지도로 공개사과와 인지적 영향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최근 실험참가자 40명의 뇌를 fMRI(기능적자 기공명영상)로 촬영하면서 책임을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공개 사과문을 읽게 했다. 실험 결과, 책임을 인정하는 사과문을 읽은 사람은 공감을 담당하는 ‘사회적 뇌’ 부위가 활성화됐다. 반면 책임을 부정하는 공개사과문을 읽은 사람의 뇌에서는 분노를 담당하는 부위가 활성화됐다(국제 학술지에 제출 준비 중).
올바른 사과는 갈등을 봉합하는 필수 도구다. 김영욱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과 교수는 “좋은 사과는 피해자에게는 트라우마를 치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가해자에게는 추락한 평판을 회복하게 해준다”고 말했다.
좋은 사과의 첫 조건은 적절한 타이밍이다. 언론을 통해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뒤 박근혜 대통령은 그 어느 때보다 재빠르게 사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사과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사과하는 경우였기 때문이다. 김호 대표는 “언론의 압박이 있고 나서야 사과를 하게 된, 그 순수하지 못한 타이밍에 대해서도 사과를 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또, “잘 된 사과문으로 피해자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건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사과문의 효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건 사고 발생과 사과 사이에 보여준 행동입니다. 제가 대통령의 담화문을 분석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이유죠.”
그는 2014년 12월에 벌어진 대한항공 KE086편 이륙지연 사건,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을 예로 들면서 “사건이 확대된 뒤 나온 조 회장 등의 사과문은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다”며 “하지만 사건이 알려지고 4일 만에 발표한 첫 입장문이 화를 불렀다”고 말했다. ‘조현아 부사장은 할 일을 했을 뿐 모든 건 사무장의 잘못이었다’라는 게 그 입장문의 요지였다.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김 대표는 “대통령은 그 동안 일관되게 여론을 무시해온 데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직전까지 거짓으로 변명했다”며 “사과문이 아무리 훌륭했어도 이미 신뢰를 얻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 일갈했다. 물론, 사과문도 그다지 훌륭하지 못했다.
김영욱 교수는 2000년대 사회 각계 인사들이 발표한 공개 사과문 89편을 분석했다(한국언론정보학보 2012년 8월호). 그 결과, 정부나 공적 기관은 과거의 선행을 언급하거나(입지강화 전략) 자책해서(동정심유발 전략) 대중에게 우호적인 평가를 받고자 했다.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렸던 결정”이라는 식의 표현도 자주 썼다. 더 큰 대의명분을 강조해 잘못을 축소하는 전략이다(초월 전략). 모두 ‘정당화 전략’에 해당한다. 김 교수팀은 논문에서 “이는 우리나라 문화의 특징인 정, 체면 의식과 관련돼 있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 담화문도 비슷하다.
정당화 전략은 사실 효과가 거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입장이다. 김 교수가 2003~2004년 조선일보에 게재된 사과문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조사한 결과, 재발방지책 같은 수정행위가 가장 효과적으로 나타났다. 반면 변명, 정당화, 부인 전략은 효과가 떨어졌다.
그럼에도 정당화 전략을 고수하는 건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다. 김호 대표는 “법정에서는 피고의 유죄가 입증되기 전까지 무죄라고 추정하지만, 여론은 피고의 무죄가 밝혀질 때까지 유죄로 생각한다”며 “반면 여론은 사과로 누그러질 수 있지만, 법정은 책임을 인정하는 순간 법적 책임을 묻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 딜레마 사이에서 법적 불리함을 없애는 데 치중하기 때문에 정치인이나 기업인이 선뜻 사과하지 못하는 것” 이라고 말했다.
정당화 전략으로 점철된 사과문을 쓴 사람은 어쩌면 자기합리화 심리기제를 작동시켰을지 모른다. 미국 UC산타크루즈 심리학과 엘리엇 애런슨 교수와 미국의 사회심리학박사 캐럴 태브리스는 저서 ‘거짓말의 진화 : 자기정당화의 심리학’에서 “자기합리화에 빠지면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최선이었고 그 외에는 선택권이 없었다고 왜곡해 받아들이게 된다”고 밝혔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심리학과 로버트 치알디니 교수도 ‘설득의 심리학’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된 결정을 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며 옳은 결정을 했다고 스스로 설득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인지부조화를 해소하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 바로 자기합리화이며, 이로써 사람들은 사과할 필요성을 스스로 축소한다.
그렇다면 좋은 사과란 뭘까. 김호 대표는 지도교수인 정재승 교수와 함께 쓴 책 ‘쿨하게 사과하라’에서 3A를 제시했다. 첫째는 인정과 사과(Acceptance & Apology)다. 사과문은 실수나 잘못의 책임을 인정하는 행위다. 어느 선까지 책임을 인정할것인지 명확하게 써야 한다. 둘째는 해명(Apologia)이다. 사실과 다른 점에 대해서 적절한 해명을 해야 한다. 이 때 명심할 점은 제3자에게 화살을 돌려선 안 된다는 점이다. 마지막은 대책(Action)이다. 가장 중요하지만 빼먹기도 쉬운 대목이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실수로 무엇을 배웠으며, 향후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를 제시해야 한다. 보상책이나 재발방지를 위한 구체적 조치를 언급할 수도 있다.
내용 외에도 좋은 사과에서 지켜야 할 원칙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문법이다. 사과의 문법이 잘못되면 ‘사과 아닌 사과(비(非)사과 사과)’가 탄생한다. 갈등 해결이라는 장점은 취하면서 책임인정에 따른 위험은 회피하기 위해 정치인이나 기업인이 쓰는 표현을 비꼰 말이다.
사과 아닌 사과를 만드는 방법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김호, 정재승 저 ‘쿨하게 사과하라’에서 재인용). 첫째는 ‘그러나’다. 사과란 동의를 전제로 한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며 잘못했다는 사실을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의해야만 사과가 성립한다. 반면 ‘그러나’라는 접속사는 의견 불일치를 나타낸다. “늦어서 미안해. 그러나(하지만) 네가 시간을 너무 촉박하게 잡았잖아”가 그 예다. 결국 누가 잘못했는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동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암시를 준다. 둘째는 조건부 사과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가 대표적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의도를 오해했다든지 피해자가 너무 유약하다는 식이다. 자신의 책임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잘못을 교묘하게 피해자에게 돌리는 행동으로, 사과라기보다 오히려 공격에 가깝다. 마지막은 수동태 사과다. 예컨대 “실수가 있었습니다”가 있다. “실수는 있었으나 내가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이 관점에서 담화문을 다시 보자. “그 과정에서 특정 개인이 이권을 챙기고 여러 위법행위까지 저질렀다고 하니 너무나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이라는 말은 수동태 사과에 해당한다. 잘못의 주체를 ‘특정 개’이라고 말함으로써 대통령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았다. 뒤이어 “모두 저의 잘못이고 저의 불찰”이라는 문구가 나오지만, 맥락상 실제 책임을 인정한다기보다 자책을 통한 동정심 유발 전략에 해당한다. 이번 담화문 역시 사과 아닌 사과였다. 이를 이미 간파한 국민들이 올바른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물론 사태는 사과로 끝날 수준을 넘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