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남자가 질문했다.
“단추 하나 채우는 게 뭐가 그리 힘든데요?”
여자는 남자의 질문이 끝나고도 한참 있다가 ‘네?’하며 돌아보았다. 눈앞에 앉아 있는 상대의 존재는커녕,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도 까맣게 잊은 얼굴이었다. ‘단추라니요? 단추가 뭔데요?’하고 질문할 것 같은 얼굴이다. 여자는 대화 사이사이에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갔다 오는 것 같았다. 1, 2초 사이에 어디를 그리 휙휙 다녀오는지 모를 일이다.
“됐어요. 그 앞에 하던 이야기나 해 봅시다. 그러니까, ……은유라고 하셨죠.”
“예, 그래요.”
“외계인이 은유라는 건가요? 현대인의 소외를 상징하나요? 지구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 타임머신은 과거를 되돌리고 싶은 현대인의 욕망을 상징하나요?”
남자는 여자에게 편견이 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여자는 남자가 갖고 있는 편견을 잘 다져주고 다리미질까지 해 줄 모양새로 앉아 있었다. 언제 감았는지 언제 미용실에 갔는지도 모를 부스스한 곱슬머리, 얼굴을 반쯤 가리는 뿔테 안경, 화장을 안 해서 얼굴 가득히 드러난 기미며 주근깨, 커튼을 잘라 만들었나 싶은 체크무늬 긴 치마에 할머니도 오래전에 촌스럽다고 내다 버렸을 뜨개질로 짠 스웨터. 치마는 올이 다 나갔고 스타킹에는 구멍이 났다. 백 년쯤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는 것 같다. 어느 골동품 가게에 놓인 옷장에서 곰팡이나 좀약과 함께 태어나 살다가 오늘 처음 옷장을 열고 세상으로 나왔다고 해도 믿을 법했다.
애초에 남자는 이 단체미팅 자리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테이블은 그나마 서너 명씩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그럭저럭 한두 명쯤 입을 다물고 있어도 교양인의 품위를 유지할 만한 분위기가 잡혀 있는데, 어쩌다 보니 이 테이블은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불참하는 바람에 벌써 삼십 분째 좀약과 함께 태어난 여자와 앉아 맞선 아닌 맞선을 보는 중이다. 여기 모인 사람 중 예술가 아닌 사람이 없다지만, 이 아가씨는 그중에서 독특하게도 소설가였다. 그냥 소설가도 아니었다. ‘과학’ 소설가였다.
“그럴 때도 있어요.”
“왜 은유를 쓰는 거죠? 현실 세계나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으로는 현대인의 소외나 욕망을 표현할 수 없나요?”
여자는 안경을 밀어 올리고 주머니를 뒤졌다. 뭔가 자신에게 보여주려고 꺼내려는가 보고 있자니 지저분한 휴짓조각을 꺼내 코를 풀고 도로 주머니에 넣는다. 남자는 헛기침을 했다.
“현대인의 소외나 욕망은 독자나 비평가가 할 수 있는 말이죠. 작가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여자는 말이 잘 안 떠오르는 듯, 아니면 또 어디를 다녀오느라 분주한 듯 부스스한 머리를 긁었다.
“쓸 수는 없어요.”
“그러면 뭘 쓰나요?”
여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좀약과 곰팡이의 나라에서 태어났을 가방을 뒤적이더니 스케치북과 펜을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봐요, 아가씨, 난 그냥 할 말이 없어서 질문한 거라고. 답을 원한 게 아니었어. 당신이 뭘 쓰는지 난 아무 관심 없어. 제발 내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마. 여자는 남자의 소리 없는 애원과는 상관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자가 그린 것은 대롱이 긴 브로콜리 같은 것을 옆으로 뉘여 놓은 그림이었다. 아이들이 나무를 그려보라고 하면 흔히 그리는, 길쭉하고 쪽 고른 줄기에, 구름 같은 뭉실뭉실한 아폴로 머리를 달아놓는 그런 식의 그림이었다.
“이건 생각의 나무예요.”
남자는 초인적인 인내로 미소를 남겨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스케치북의 반대쪽 귀퉁이에 똑같은 브로콜리를 하나 더 그렸다. 브로콜리의 머리가 먼저 그린 브로콜리와 마주 보고 있었다.
“떨어져 있네요.”
남자는 나름대로 통찰력을 자랑하며 말했다.
“그래요, 지금부터 이 두 나무가 이어질 거예요.”
남자가 헛기침을 크게 하는 사이에 여자는 한쪽 브로콜리에 늙은 민들레에서 포자가 날아오르는 것처럼 몽글몽글 빠져나오는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 나무는 생각이 흐르는 방향으로 자라나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여자는 두 브로콜리의 머리를 각기 가리켰다.
“말하자면, 무선이죠. 이 포자에 생각이 담겨 전해져요. 계속 한 방향으로 생각이 흐르다 보면 가지가 뻗어나서…….”
여자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은 것처럼 한쪽 브로콜리의 머리가 계속 자라나도록 그렸다. 최후에는 스케치북이 찢어져라, 굵은 선을 그리며 둘을 하나의 가지로 이어내었다. 그러자 스케치북에는 브로콜리도 물방울도 포자도 사라지고 하나의 강처럼 굵게 이어진 두 줄의 선만 남았다.
“이렇게 서로 이어져요.”
“좋아요.”
좋은 점은 하나도 없었지만 남자는 그렇게 답했다.
“하지만 이건 소설이 아녜요. 어느 부분이 소설인지도 모르겠고…….”
“잠깐만, 여기 하나 더 있어요.”
여자는 스케치북을 넘겼다. 스케치북이 다 비어 있네. 남자는 생각했다. 눈대중으로 봐도 열 장은 더 있겠네. 아이구 하느님, 부처님, 앞으로 열 장은 더 그릴 수 있겠네.
“그 포자가 남들보다 적은 나무가 있어요. 다른 차이는 하나도 없어요. 포자만 적은 거죠. 포자가 나가는 구멍 숫자가 다른 나무보다 적은 거예요.”
여자는 아까와 같은 브로콜리 두 개를 더 그렸다. 이번에도 한쪽 브로콜리에서 포자가 나가는데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두어 개 정도만 힘을 주어 그린다.
“포자가 원래 가려던 곳으로 가지 못하는 거예요. 너무 적어서. 그래서 그냥 근처에 있는 다른 가지로 들어가 버려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좀 더 크고, 매력적이고, 눈에 띄고, 포자를 받아들일 구멍이 큼지막하게 있는 나무로.”
여자는 빨간 펜을 꺼내 새로운 커다란 브로콜리를 두 브로콜리 사이에 하나 더 그리며 말했다. 그리고 포자가 그 브로콜리에 난 구멍으로 스카이다이빙 하듯이 떨어지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니까, 이건 작은 관목 같은 것이 무수히 모여 있는 숲 같은거로군. 그게 어째서인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씩 이어져서 나중에는 거대한 하나의 나무가 되는 거야. 그런데 이게 무슨 상징이지? 어느 부분이 은유라는 거야? 아니, 그건 둘째 치고, 어느 부분이 소설인 거야?
“재미있지 않아요?”
여자는 숫제 볼까지 발갛게 붉히며 말했다. 남자는 하마터면 ‘어느 부분이요?’하고 되물을 뻔했다.
“이 두 나무가 계속 자라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그야…….”
남자는 주위를 힐끗 둘러보았다. 다들 평화로워 보이는군. 행복해 보이기까지 해. 간식에 집중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도 없어 보이네.
“최종형태는 비슷하겠네요. 어쨌든 포자는 어디로든 가긴 가는 거잖아요.”
“아뇨, 아뇨, 아뇨, 아녜요.”
여자는 스케치북을 한 장 넘겼다. 그래, 여덟 장 더 남아 있었지. 여덟 번만 더 참으면 되겠군. 이 여자가 스케치북을 다 쓰고 직원에게 ‘여기요, 스케치북 하나만 더 주세요.’라고 하지만 않으면.
“포자가 적은 나무는 매번 포자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가요.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요. 동시에 가지 두 개나 세 개가 자라는 거예요. 계속 새로운 가지가 생기고, 그러니까 이렇게 무수한 잔가지가…….”
여자는 그림을 그리며 연신 떠들었다. 가만 보아하니 말을 한 시도 쉬지 않는 여자였다. 한 번 엔진이 붙으면 멈추지를 못하는 사람 같았다.
“이렇게 달라지는 거예요.”
여자는 스케치북을 세워 보여주었다. 스케치북에는 나무 두 개가 그려져 있다. 하나는 침엽수 잎맥처럼 듬직하게 굵은 가지가 서너 개쯤 난 나무였다. 또 하나는 활엽수 잎맥처럼, 잔가지가 빽빽하게 무수히 돋아 둥그런 구름 형태를 이룬 나무였다.
“신기하지 않아요?”
“뭐가요?”
그림이? 아니면 당신이? 이걸 듣고 있는 내가?
“겨우 포자 숫자 차이밖에 없잖아요. 다른 점은 그것밖에 없는데, 생각의 구조가 이렇게 달라진다는 거요.”
생각의 구조? 남자는 그제야 눈치를 챘다. 이건 뇌야. 이 여자가 말하는 생각의 나무라는 건 뇌신경세포야. 신경세포 사이에서 포자처럼 신경전달물질이 나와서 생각을 전달하지. 이 여자가 포자가 적은 사람이라고 하는 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화가 치밀었다. 이 여자가 지금 사람을 뭘로 보고…….
“ADHD라는 거군요.”
남자가 화를 억누르며 말하자 여자는 기가 죽었다. 여자는 서둘러 스케치북을 덮고 의자에 등을 기대며 어깨를 움츠렸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예, 그래요. ADHD예요.”
“과잉행동 주의집중력장애요.”
“예, 그거 맞아요.”
전부 이해가 가는군. 저 수다스러운 말씨 하며,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태도 하며, 부산스러운 옷차림에 남의 말은 듣지도 않고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는 것 하며.
“그래서 단추를 못 채웠다고요.”
남자는 보고서를 식탁 위에 탕 하고 내려쳤다. 여자는 겁에 질린 얼굴로 제 몸이라도 보호해야겠다는 듯이 가방을 끌어안았다. 사방에서 움찔하고 이쪽을 쳐다보다가 다시 조용히 자신들의 세계로 되돌아갔다.
“단추를 안 채운 게 장애 때문이었다고요. 장애인이라서,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없어서, 단추를 채울만한 집중력이 없었다고요. 그 뻥하고 잘 뚫린 구멍에 똥그랗고 예쁜 단추 한 알을 집어넣는 게, 너무 어려워서, 복잡해서, 무슨 수능 만점 받는 것처럼 힘들어서, 할 수가 없었다고요. 그래 그 가방은 무슨 집중력으로 잡아요? 집중력이 없어서 어떻게 들고 있어요?”
여자는 벌벌 떨면서 가방으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남자는 두꺼운 보고서를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이봐요. 여기 댁이 지난 1년간 벌인 온갖 경범죄와 법규위반이 다 기록되어 있어요. 지각 스물네 번, 복장 불량 마흔다섯 번, 업무시간에 딴짓하기 서른네 번, 준비물 잊어버리기 서른일곱 번, 명찰을 달지 않거나, 삐뚤게 달거나, 업무시간에 동료와 수다를 떨고, 중요한 서류를 망각하고, 위대하신 총통각하…….”
남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다른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팔을 쳐들며 일어났다. 남자와 함께 합창으로 “총통각하 만세!”를 외치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사열식에서 노래 부르기.”
여자는 동작이 굼떴다. 다른 자리도 상황은 비슷했다. 남자처럼 목까지 단추를 채운 제복을 입은 사람들은 남자고 여자고 한 몸처럼 아름답게 일어났다가 기계처럼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여자처럼 제멋대로 옷을 입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동작이 느렸다. 느릿느릿 일어났다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앉는 사람도 있었다. 아예 다른 생각에 빠져 상황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있다.
“제 의지로 부른 게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고요.”
“그러니까 그게 장애 때문이었다고요.”
“노래가 머리에 떠올랐어요. 내가 부르는 줄도 몰랐어요.”
“당신 작년 벌점은 199점이었어요. 불순분자 리스트로 분류되는 벌점 200점에 못 미쳤다고요. 12월 31일에 제복에 단추만 잘 채우고 출근했어도 여기 교육센터에 와 있지도 않았을 거고, 오늘도 멀쩡히 회사에 출근했을 거라고요. 우린 아까부터 단추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빌어먹을 단추를 왜 안 채운 거예요? 불순분자 리스트에 올라갈 걸 뻔히 알면서, 회사에 들어가면서 옷매무시 한 번 다듬는 게 그렇게 힘들었어요? 머리가 안 돌아가요? 내가 여기서 도장만 찍으면 댁은 신분증에 낙인이 찍혀서 평생 위험인물로 분류되게 되었다고요. 그게 의도한 게 아니라고요? 위대하신 총통각하…….”
사람들은 다시 “총통각하 만세”와 함께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이 동시에 의자의 위치를 바로잡는 바람에 차작 하는 소리가 절도 있게 홀 안을 울렸다.
“……를 욕보일 생각이 아니었다는 거죠.”
남자는 보고서를 식탁 위에 내던지고 모자를 바로 쓴 뒤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
“자, 그래서,”
“…….”
“어느 부분이 은유라고요?”
여자는 가방을 끌어안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은유를 쓴다면서요. 그 과학소설인가 뭔가. 이 이야기의 어느 부분이 은유예요? 은유라는 건, 그러니까, 상징이죠. 현실을 약간 비틀어서 보여주는 것.”
“…….”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요? 지금 세상은 뭔가 잘못됐고, 어디엔가 이것과 다른 세상이 있다고 상상하고 싶어요?”
“…….”
“이봐요, 여긴 별의별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다 와요. 아침에 차임벨 울려서 같은 시간에 일어나게 하는 게 인권침해라든가, 한 시간만 더 자게 해 달라든가, 취미활동을 하게 해 달라든가, 머리를 기르게 해 달라든가, 옷을 자유롭게 입게 해 달라든가요. 말도 안되는 소리죠. 옷이나 머리 모양을 똑같이 하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되고, 마음에 사심이 끼어서 일도 제대로 못하게 돼요. 아니면 이 바보 같은 벌점제도는 없어져야한다며 시위하죠. 하지만 벌점제도는 범죄를 예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제도예요. 문제가 너무 깊어지기 전에 발견할 수 있죠. 본인도 미리 조심할 수 있고요. 이 제도가 없었을 때엔,”
남자는 ‘이런 여자와 힘들여 대화하지 않고 그냥 손바닥을 내밀라고 하고 회초리로 한 대 세게 때리면 됐었지.’ 하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지각한 사원들에게 아침마다 오리걸음을 시키거나, 조금 반항적으로 노려본다고 반성실로 끌고 가곤 했죠. 복장이 불량한 사람들을 길거리에 일렬로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엉덩이를 때리는 것도 다반사였어요. 지금은 세월 참 좋아졌죠.”
“시간이 느려지는 경험 해 본 적 있으세요?”
여자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이 여자가 사람 말을 안 듣는다는 걸 잊고 있었군.
“빨라지는 경험은요?”
“그것도 은유인가요? 아니면…….”
“전 열두 시간도 넘게 춤을 춘 적이 있었어요. 낮에 시작했는데 정신이 들어보니 한밤중이었어요. 친구들과 함께 시작했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었고 저 혼자였죠. 전 겨우 한두 시간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럼 ADHD가 아니군요. 왜 이제 와서 거짓말을 고백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완전히 반대의 경험을 한 적도 있었어요. 저는 생각에 빠져 있었고 그 생각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죠. 틀림없이 몇 시간은 지났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시계를 보니 겨우 10여 분 지나 있었죠.”
“이봐요, 또 무슨 변명을 상상해내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는 눈물을 훔치며 가방과 몸 사이에 숨겨두었던 스케치북을 다시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네 번째 페이지를 펼쳤다.
“도파민이라는 게 있어요.”
“이봐요.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합시다.”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나오는 거죠. 샤워기 같은 거예요. 물이 막 뿜어져 나와서 포자를 원하는 방향으로 운반해주는 거죠.”
여자는 눈물콧물을 훌쩍이며 브로콜리에서 샤워기처럼 물줄기가 쏟아지는 것을 그렸다.
“그러니까.”
남자는 최대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좋아하는 일은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다른 가지로 떨어져 나갈 포자가 없어요.”
여자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정말 재미있지 않아요?’하고 묻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포자가 부족해서. 한 방향으로밖에 못 가는 거예요. 소리가 들려도 못 듣고, 누가 건드려도 모르고.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포자가 많은 사람은 다른 신경에 떨어져 나가는 것들이 있어서 방해하는데, 이 사람은 방해받는 게 없어요.”
남자는 입을 꾹 다물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신기하지 않아요? 겨우 포자의 숫자가 적을 뿐인데. 사람이 이렇게 달라진다는 게요.”
“그게 신기해요?”
남자는 제 얼굴이 차갑게 식은 것을 느끼면서 질문했다.
“무엇인가에 몰입해 보신 적 있으세요?”
“물론이죠, 열심히 일 할 때…….”
“머리가 열리는 것 같은 경험 해 보신 적 있어요? 머리 바깥에 머리가 있는 것 같죠. 귀는 먹먹하고, 들리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죠. 마치 내가 시간과 공간의 바깥에 있는 것 같아요. 황홀감이 배꼽 아래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올라와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것 같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죠. 그래 보신 적 있으세요?”
아니, 난 당신처럼 미치지 않았으니까.
“예술가의 자질이에요. 모험가와 발명가가 이런 사람들이었어요. 이런 사람은 예전에는 장애인이 아니었어요. 장애였던 적이 없어요.”
“…….”
“이런 사람을 집중력장애라고 부르면 안 돼요. 지루함민감장애라고 불러야 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지루함에 아토피환자처럼 물리적인 고통을 느끼는 거예요.”
“불순분자들이에요.”
“아뇨, 지루함민감장애예요. 정도의 차이가 있는 거죠. 우리가 잘못된 게 아니에요. 세상이 비정상적으로 지루해진 거예요.”
남자는 이제야 겨우 재미있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식탁에 기대앉았다. 남자는 수많은 불순분자를 만났고 수많은 변명을 들어왔다. 개인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인권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잘못했다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애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변명은 신선하다.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남아요. 선생님처럼요.”
남자는 표정을 지웠다.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지도위원이 돼요. 벌점 없이 학교를 졸업하고, 벌점 없이 회사를 다니고, 불순분자가 되지 않고, 교사가 되고 사장이 되고, 승진하고 권력을 가져요. 그리고 정치가가 되어 예전보다 훨씬 더 지루한 세상을 만들었어요. 자신들이 견딜 수 있으니까, 다른 사람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해요.”
“…….”
“당신들은 춤을 추지 않아요. 노래하지도 않고 시를 짓지도 않아요. 그림을 그리거나 소설을 쓰지도 않아요. 놀지도 않고 농담하지도 않아요. 세상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것들이 어떤 가치를 갖는지 알지 못해요.”
“그래서 혁명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선동문구는 뭐라고 할 건가요, 지루함을 박살 내자?”
“소설을 써요.”
“참, 과학소설을 쓴다고 했죠. 그래요. 소설 쓰기는…… 뭐, 지루하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남자는 보고서 뭉치를 식탁에 탁탁 두드려서 반듯하고 쪽 고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댁이 한 이야기에 은유는 없었어요. 이건 전혀 소설이 아니었다고요.”
“…….”
“이봐요. 댁은 12월 31일의 마지막 날 단추 하나를 안 채워서 여기 끌려온 거예요. 정말 단순하고 쉬운 이야기죠. 여기에 무슨 다른 변명이 필요하죠?”
여자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어쩐지 여자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자신의 운명도 모르고, 일생 감시인이 따라 다녀야 할 운명도 모르고, 고작 단추 하나 때문에.
“전 다른 사람과 면담해야 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남자는 보고서를 챙겨 들고 일어났다.
“이봐요, 아가씨. 제가 제안을 하나 하죠. 이번 회합이 끝날 때까지 그 풀어헤친 옷 단추를 다 채워요. 어렵지 않죠? 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제가 이 보고서에서 1점을 지워 드리죠. 그러면 올해는 다시 0점부터 시작하니까, 200점의 여유가 있죠. 지각도 200번 정도 할 수 있을 거고 단추도 서른 번쯤 풀어헤치고 회사 문을 왔다갔다 할 수도 있을 거예요. 우선 한숨 돌리는 거죠.”
“…….”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요. 인생에서 뭐가 중요한지. 어쨌든 댁은 이 현실에서 살아야 하잖아요.”
“…….”
“할 수 있어요.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요. 조금만 노력해 보라고요.”
여자는 옷자락을 내려다보았다. 왼손으로 단추 구멍을 잡고 오른손으로 노란 단추를 쥐었다. 단추를 바라보자 어렸을 때 입고 다녔던 옷에 찍혀 있던 노란 스마일 마크가 떠올랐다. 그 마크가 떠오르자 영화에서 포레스트 검프가 진흙투성이의 얼굴을 셔츠로 닦고 나니 스마일 마크가 찍혔던 것이 떠올랐다. 포레스트가 달리고 달려서 바닷가에 이르자 되돌아가 또 달렸던 것이 떠올랐다. 달리는 뒤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오르고 세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생각은 스마일 마크처럼 샛노란 달빛 아래 자신이 거리를 달리던 모습에 이르렀다.
몇 년 전의 어느 날, 회색빛 거리에서 여자는 숨이 턱에 닿도록 뛰고 또 뛰었다. 허리를 굽혀 숨을 몰아쉬다가 가슴이 터질 듯한 흥분으로 다시 달렸다.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열을 맞추어 다리를 직각으로 세우며 지나갔다. 똑같은 회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세상 무엇에도 관심을 둔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다는 얼굴로 걸어갔다. 모든 것이 정상적이고, 세상이 돌아가는 그 어떤 면에도 의문도 이상한 점도 없다는 얼굴로.
나는 ADHD였어요. 여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랑하고 싶었다. 나태하거나 게으르지 않았어요. 부모님을 싫어했던 것도, 반항했던 것도 아니었어요. 세상에 혼자 떨어진 괴물 같은 게 아니었어요. 혼란스럽거나 괴악한 것이 아니었어요. 남들이 다 견디는 것을 혼자만 참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어요. 내 고통은 허상이 아니었어요. 엄살을 부리거나 나약했던 것도 아니었어요.
여자는 잔인하고도 무섭고, 혼란스럽고 괴악하기만 했던 세상이 비로소 자신을 받아주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이 우주에 존재할 자리가 있다는 것을, 발을 붙이고 서서 살아도 된다는 것을, 비로소 스스로를 용서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어느 부분이 은유라고요?’
정신이 들어보니 여자는 교육센터 밖에 나와 있었다. 거리는 잿빛이었고 먼지에 뒤덮여있었다. 어느 지루한 사람들이 성장의 상징이며 인류의 비전이라고 믿을 만한 똑같은 모양의 빌딩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다. 똑같은 단발머리를 한 여자들과 반쯤 까까머리로 머리를 민 남자들이 같은 옷을 입고 식판을 든 채 배급소 앞에 한 줄로 서 있었다.
지루했다. 지루함이 몰아치자 여자의 뇌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소리에 민감한 사람이 소음에 두통을 일으키듯이, 위염이 있는 사람이 짠 음식을 먹고 구토하듯이, 비염이 있는 사람이 꽃가루에 기침하다 쓰러지듯이.
여자는 상상했다. 거리의 모양을 바꾸어 생각했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각자의 복장으로 수다를 떨며 걸어가는 모습을, 허리를 뒤튼 건물이 도시를 채우고 거리에 에메랄드빛이 깔리는 풍경을, 마천루 위로 사람들의 꿈에서나 나올 것 같은 우주선이 날아가고,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이 카페에서 걸어 나오고, 이계의 문이 어느 과자가게 귀퉁이에서 열리는 생각을. 그러자 간신히 숨통이 트였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건가요?’
머릿속에서 남자의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한 번도 도피해 본 적 없어요.
여자는 마음속으로 남자의 질문에 답했다.
한 번도 내 현실을 외면한 적이 없어요. 나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달아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내 삶과 마주합니다. 내 삶은 내가 아침에 눈을 뜨면 접하는 모든 것이며, 내가 잠이 들 때 베갯머리로 들어오는 모든 것입니다.
내 삶은 전쟁터며 이것은 내가 매분 매초 치르는 전쟁입니다. 사람들이 장난이며 가벼운 유흥거리이며, 딴짓이라고 비웃는 모든 것이 나를 살게 하고, 내 생을 유지시켜 줍니다. 참으로 우스꽝스럽고, 절실하고 치열하며 바보스러운 전쟁입니다.
여자는 자신이 만든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남자나 단추에 대한 것은 까맣게 잊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