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국 동부의 초등학교에서 총기 사고가 있었습니다. 30명에 가까운 유치원생과 선생님이 희생됐죠.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조금 다른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범인에게 몸을 던져서 총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려고 했던 교장 선생님, 담당 반의 어린이들을 벽장 속에 숨기고 범인을 다른곳으로 유도한 선생님, 아예 범인에게 돌진한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모성 보호 본능을 지닌 여성이기에 이렇게 영웅적인 행동을 했을까요.
월남전 출전을 위한 훈련 도중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막아서 부하를 구한 강재구 소령 이야기를 떠올려 봅시다. 전쟁터에 나가려는 군인은 어차피 목숨을 걸었으니까 이렇게 영웅적인 행동을 했을까요. 모두 예외적인 상황이 낳은 예외적인 사례일까요. 아닙니다. 극단적이지 않을 뿐, 남을 위해 손해를 보거나 심지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을 우리는 도처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돕는 것은 유전자의 명령
목숨을 걸고 집단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예는 동물의 세계에도 많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예는 개미와 벌입니다. 일개미나 일벌은 평생 일만 죽도록 하는 것도 모자라 침입자가 나타나면 몸을 던져 싸웁니다. 원숭이도 만만치 않습니다. 위험한 존재가 나타나면 큰 소리를 질러서 집단을 피신시킵니다.
대신 자신이 침입자의 주목을 끌어서 위험에 빠지지요. 개미나 벌, 원숭이 모두 멍청한 걸까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슬쩍 피하면 가장 이익일텐데, 왜 굳이 그러지 않을까요.
생물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개미와 벌은 모두 같은 암컷에서 태어나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전자가 같다면 이들 사이에 구분은 없습니다. 똑같은 ‘나’가 무리 지어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나 하나쯤 죽어도 또다른 ‘나’가 수없이 많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유전자의 입장에서 희생은 그렇게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닙니다.
원숭이는 약간 다릅니다. 원숭이는 개미나 벌처럼 모두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친족끼리 모여 살고, 따라서 비슷한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죠. 친족이 공유하는 유전자 비율은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형제는 나와 유전자가 50% 일치하고 사촌은 25% 일치합니다. 그래서 영국의 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턴(1936~2000)은 이를 근거로 ‘내가 죽는 대신 형제 두 명, 혹은 사촌 네 명이 살 수 있다면 유전자의 입장에서 결코 밑지는 죽음은 아니다’라는 계산 결과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같은 양의 유전자는 살아남으니까요.
그런데 인간은 또 다릅니다. 사회는 핏줄로 연결될 수 있는 범위 이상으로 거대합니다. 원숭이처럼 피를 나눈 집단만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거죠.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연락을 하거나 만난 사람을 생각해보세요. 대부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일 것입니다. 그 중 상당수는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이고요. 그런데 사람은 이런 생판 ‘남’을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원숭이에겐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의 세계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니까요.
180만 년 전부터 남을 도운 인류
인류는 언제부터 이런 특이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을까요. 우선 멸종한 친척 인류인 네안데르탈인에게도 이런 흔적이 보입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라샤펠오생에서는 이상한 네안데르탈인 화석이 발견됐습니다. 이 화석은 뼈가 심하게 구부러져 있었는데, 처음에 사람들은 네안데르탈인이 원래 구부정하고 입이 쑥 들어간 얼굴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뼈가 구부러진 것은 관절염을 앓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또 입이 쑥 들어간 것은 이가 모두 빠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라샤펠오생 화석은 이가 거의 다 빠진 상태로 발견됐는데, 특히 어금니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원래 죽은 다음에 이가 빠지거나 죽기 직전에 빠지면 빠진 자리가 그대로 구멍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이가 빠진 다음에도 계속 살아가면 빠진 자리는 메워지고 잇몸 뼈가 닳아 반들반들해집니다. 라샤펠의 화석도 구멍은 막히고 잇몸 뼈가 닳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결과를 종합하면 어떤 사실을 알 수 있을까요. 노인의 화석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화석에는 ‘라샤펠의 늙은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물론 노인이라고 해 봤자, 당시는 평균수명도 짧았고 삶이 워낙 거칠었기 때문에 아마 30~40세 정도였을 테지만요. 그렇다면 새로운 의문이 듭니다. 이도 빠지고 관절염으로 잘 걷지도 못하는 네안테르탈인 노인이 어떻게 눈 덮인 산골짜기에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인류학자들은 누군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다친 사람을 먹여 살린 흔적도 있습니다. 1950년대에 이라크의 샤니다르 유적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화석(샤니다르 1호)은 젊은 시절 큰 부상을 입은 모습이었습니다. 두개골 흔적으로 보건대 왼쪽 눈은 실명했습니다. 눈이 있는 부위의 뼈 한가운데에는 시신경이 지나가는 구멍이 나 있는데 이 구멍이 막혀 있습니다. 시신경이 죽었다는 뜻이죠. 왼쪽 뇌도 크게 다쳤습니다. 신체의 오른쪽을 거의 쓰지 못해 오른팔 뼈가 조그맣게 쪼그라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화석도 노인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즉 젊어서 크게 다쳐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지경이 됐지만, 누군가 먹여가며 오랫동안 살렸다는 뜻입니다.
최근에는 훨씬 먼저 나타난 초기 인류 역시 이런 이타적인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터키 북동쪽의 나라 조지아의 드마니시에서 발견된 인류 화석은 무려 180만 년 전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화석 중 일부 역시 이가 다 빠진 채로 살다 죽은 흔적이 보입니다. 이 때는 빙하기였습니다. 누군가 먹을 것을 갖다 주고, 이 없이도 삼킬 수 있게 어떤 ‘가공’을 해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시기입니다. 인류는 호모 속(종보다 상위 개념)이 막 태어났을 때, 친척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속에 비해 외모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비슷하게 작고 약했으며 머리가 좋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가 달랐습니다. 호모 속은 처음 지구에 나타나던 시기부터 서로 도왔습니다.
인류 최고의 무기, 협력과 이타심
그렇다면 인류는 어떻게 해서 서로 돕게 됐을까요. 생판 모르는 남에게 이타성을 발휘하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작고 약하다는 점, 그것이 이유였을지 모릅니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강해지는 대신 유연하게 적응하는 전략을 택해야 했습니다. 빙하기가 꼭 춥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변덕스럽게도 조금 따뜻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건조하거나, 반대로 비가 계속 쏟아지는 때도 있었습니다. 기후가 변하면 거기에 맞춰 동식물과 환경이 변했습니다. 지형도 바뀌었습니다. 바닷물의 높낮이가 달라져 섬이 육지가 되고 바다가 산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달라지는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류는 변하는 환경을 잘 살피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과거와 비슷한 환경이 되면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활용해 대처했습니다. 인류는 어느 순간부터 힘이 아닌 정보력에 의존하는 전략을 진화시켰고 효과적으로 생존했습니다. 정보력의 보고는 노인입니다. 쌓아온 시간만큼 정보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인의 정보력을 전수받고 활용하는 방법으로, 이제 인류는 다른 어떤 유인원도 가보지 못한 곳까지 적응해 살고 있습니다.
노인을 존중하고 돕던 인류는 언제부터인지 다른 동물에 비해 월등한 능력을 지니게 됐습니다. 힘이나 날카로운 무기가 아닙니다. 보편적인 협력과 이타심입니다. 생판 모르는 남과도 콩 한쪽을 나눠 먹고, 남을 위해 자신을 낮추거나 희생하는 능력입니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인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만약 남자로 태어났다면 군복무를 면제받았을 정도로 근시가 심한 제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누군가 안경을 개발해 준 덕분이라고요. 하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만약 안경 없이 네안데르탈인이나 그 이전 인류의 사회에 태어났더라도, 저는 살아남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제가 곰에게 잡아 먹히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