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그 행성은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바위 하나 개울 한 줄기까지 신들이 정성껏 가꾼 우주의 정원이었다. 그리고 그 정원에는 오직
평화롭고 아름다운 것들만이 평화롭고 아름답게 살아갔다.

그는 그 행성에 밤에 도착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밤이었다. 지구의 달보다 조금 더 큰 위성이 밤하늘에서 은은하게 빛났고 외계의 풀벌레들이 밤의 신들을 위해 작고 부드러운 소리로 울었다.

그는 자동 셔틀에서 내려 잔뜩 웅크린 채 서둘러 안전선 바깥으로 뛰었다. 모터를 끄지 않고 기다리던 셔틀은 딱 10초 뒤에 다시 중력을 뿌리쳤다. 잠시 밤하늘에 별 하나가 늘었다가 다시 줄었다.

그는 그 행성의 모든 신들이 이 낯선 방문객을 호기심 속에 들여다보는 듯한 편집증적인 기분 속에서 밤길을 걸어 숙소로 갔다. 모든 문이 열려 있었고 그는 그 중 한 방에 들어가 곧장 잠들었다.





늦은 아침. 그는 인간이 아닌 인기척에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일어났다. 방에 들어온 것은, 수술대 위의 우산 혹은 화분에 심은 말미잘, 혹은 상아 의족이 달린 풍선……. 이 행성의 토착 지성종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밤에 나오지 못한 점 양해해주시기 바랄 뿐입니다. 저는 햇살이 굵지 않으면 움직이기…….

그것이 들고 있는 통역기가 말을 꺼내자,
이해합니다. 그가 통역기로 말했다. 이들의 기본 생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후의를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말한다. 통역기의 상태가 의심스럽다. 그러나 그것이 들고 온 것을 내려놓자 통역기의 상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아침입니다. 지구의 전통식으로 준비했습니다. 그것이 쟁반의 덮개를 열었다. 접시 위에 담긴 것은 맥도널드식 햄버거와 김이 빠진 콜라 한 컵이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그는 그것의 안내로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숙소 밖에는 그것이 타고 온 탈것이 서 있었다. 바퀴가 달린 두 개의 축 위에 커다란 나무 상자가 놓인 조잡한 물건이었다. 엔진도, 핸들도 아무 것도 없었다. 뒤에 그가 올라타자 그것은 잠시 촉수들을 사방으로 곧게 뻗었다. 그러자 탈것의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바퀴의 신에게 기도하신 건가요? 그가 통역기로 묻자 그것이 힐끔 그를 향해 시각 기관이 달린 부분을 돌리더니 통역기로 답한다.

- 회전의 신 [통역 불가]에게 기도했습니다. 이쪽이 보다 직접적이지요.

그가 다시 물었다. 방향도 그분이 잡아주십니까?
- 네. [통역 불가]께서 양쪽 바퀴에 각각 다른 강도로 역사하시면 됩니다.

‘이 행성에서는 마치 믿음과 필요와 목적에 따라 수많은 신들이 새로 생겨나기라도 하듯 다양한 신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행성의 토착종―신들의 아이들―믿으믿들은 그들의 만신전을 가급적이면 복작거리지 않게 하려 한다. 그들의 기도는 마치 아름답고 간결하고 우아한 수학 공식을 연상시킨다.’ 이 행성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읽었던 스이바리 지바의 한 구절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고 그는 비로소 자신이 신들의 정원에 왔다는 사실을 마침내 실감했다.

이 행성에는 신들이 실재한다. 실재하는 신들이 그들의 피조물들을 보살피고 그 기도에 일일이 응답한다. 응답은 아주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행성에서 물은 중력이 아니라 신들의 뜻을 따라 흐른다. 신심 깊은 믿으믿의 기도는 시공간의 곡률마저 더 구부리거나 펼 수 있고, 행성의 자전과 공전 속도를 조절하여 해를 멈춰 낮을 늘이거나 밤을 줄일 수 있다. 믿으믿들의 믿음과 신들의 섭리 아래에서 기존의 물리 법칙은 모두 무너진다.

신들과 믿으믿들에 대한 주류 학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 1) 외재적 관점 2) 내재적 관점.
전자는 이 행성의 대기권역 내에서 작용되는 기묘한 현상의 원천을 외부 요인―주로 행성 주변의 미지의 장의 작용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 장의 존재는 결코 알려진 과학의 범주 안에서 파악되거나 검출되지 않았다.)

후자는 행성 표면의 기존의 이론으로 설명 불가능한 현상들에 대해서 신들이나 미규명 장 등을 일체의 공상으로 일축하고 그 대신 행성 원주민인 믿으믿들이 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장 심층적인 생체 스캔에서도, 믿으믿들이 외부 환경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에
너지와 물질 교환 방법 외의 수단을 사용한다는 증거는 포착되지 않았다.)

믿으믿들은 불멸로 보인다.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 어느 한 개체도 죽거나 분해되거나 소멸하지 않았다(그리고 어떤 개체도 새로 태어나거나 생성되거나 나타나지 않았다. 이 또한 불멸의 요건에 깔끔하게 들어맞는다)는 사실과 전체 개체수를 통계학적으로 고려한 추산이다.

은하 의회의 학문 윤리 위원회는 어떠한 경우에도 새로 발견된 행성계의 생명체에 대해 살아있는 개체의 표본 수집이나 해부 보존에 대해 허가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과 기관이 당대 최고 최신의 기기들을 동원해서 비파괴 검사를 진행했고, (믿으믿들은 모든 종류의 조사와 검사에 대해서 흔쾌히 응했다.)

그러나 믿으믿들의 생체 분석 결과 안에서 기도의 기적의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다. 가장 간단한 실험―종이팽이나 바람개비를 돌리게 하는 것에서부터 심지어 원자 하나를 옮기는 것까지 수차례에 걸쳐 시도되었다―에서조차 에너지는 홀연히 나타났고, 물질은 스스로 의지를 가진 듯 했다.

- 듣기로, 외재론과 내재론 양쪽 모두 배척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통역기를 통한 그것의 질문이 그의 상념을 끊었다. 네. 그는 약간 꺼림칙한 기분으로 답했다. 이것들은 과연 자신들에 대한 외부의 그 모든 설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특히나 내재론적 관점에 대해서는?)

그는 통역기로 말을 이었다. 아뇨. 저는 이적의 물리적 기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고리타분한 인문학자일 따름이지요.









그의 연구 주제는 신과 관련된 믿으믿들의 발화들을 수집해서 분석 말뭉치로 구조화하기 위한 초기 작업이었다. 순전히 학문적 호기심의 충족 외에는 절대 다른 효용이 있을 리가 없는 주제여서, 은하 의회 행성 탐사 위원회에서 처음 파견 명령서가 내려왔을 때는 그 자신도 놀랐었다.

아마 위원회 노인네들도 이제 망령이 든 게지. 가장 친했던 교수 중 하나가 지원 철회를 권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성간 연구 파견 지원서를 넣은 것은 한밤중 연구실에서 혼자 술 퍼마시다 만취한 상태에서의 만행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술이 깬 맨 정신에서도 순순히 행성 방문을 위한 자격 심사에 응했고, 통과했다. 이혼한 지 한 달 뒤였다.





믿으믿들의 언어는 은하계 안의 수많은 종족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독특하다. 어떤 면에서 그들의 말이 이 행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믿으믿들의 발성기관은 (대개) 그들의 몸 중앙에 뚫린 구멍이 전부이다. 그들이 말을 할 때는 신들이 그 구멍으로 바람을 불어 보낸다.(그래서 그들의 말소리는 휘파람을 닮았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믿으믿들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신들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일 뿐이라고.

신들과 믿으믿들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가설들을 일직선으로 배열하면 한쪽의 가장 끝에는 믿으믿들은 단지 신들의 꼭두각시라는 견해가 있다. 그에 따르면 이 행성의 실제 토착 지성체는 현재 과학으로 아직 검출되지 않은, 에너지 형태의 생명체로 믿으믿들이 신이라 부르는 존재이며, 그들은 일종의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접촉점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행성을 방문하는 외계인들에게 믿으믿들을 대신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다른 쪽 끝에는 믿으믿들이 바로 신이라는 견해도 있다. 내재론의 극단과도 통하는 이 가설은 믿으믿들이 이야기하는 신은 허구에 불과하며 기도는 믿으믿들이 내적 힘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그러나 신을 믿는 신들에 대한 가설은 인기가 형편 없다.)

믿으믿들이 신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태도는 어딘가 일일연속극에 대해 수다 떠는 아줌마들을 연상시킨다.

믿으믿들은 철저한 개인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어떠한 사회제도도, 정치 기구도 구성하지 않는다. 철저히 독립적이고 자주적이다. (신들이 직접 보살피는 세계에서 피조물들이 국가나 사회 같은 대리신을 구성할 필요가 있을까.)





철저히 자족적이기에 경제도 구성되어 있지 않은 이들이 어쩌다 마주치면 꼭 하는 이야기가 신들에 대한 이야기다. 어느 신이 무엇을 어떻게 했고, 어느 신이 어느 신과 어떻게 되었고…….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신들에 관한 이야기에 더 많은 흥미와 관심과 열정을 보였다. 그리고 자세히 관찰하면 이야기는 날마다 갱신되곤 했다. 마치 믿으믿들이 여기저기서 모여 신화를 새로 쓰는 것처럼…….

어떤 학자들은 믿으믿들 각 개체들은 일종의 뉴런들일 뿐이며, 이들의 네트워크에서 흘러 다니며 발생, 변이, 편집되는 ‘이야기’야 말로 신들의 정체라고 보기도 한다. 행성 전체가 일종의 컴퓨터이며, 신들은 그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프로그램이라고.

나아가, 프로그램 우주 안에서 믿으믿들이 바로 메인 프레임에 대한 직통 인터페이스라는 가설도 있다. 믿으믿들의 기도가 바로 메인프레임에 대한 접속이다. 심지어 우리가 사는 우주 자체가 믿으믿의 내면일 뿐이라는 가설도 있다. 이에 따르면 우주는 우주-믿으믿의 자각몽에 불과하고 우리가 보고 있는 믿으믿들은 내면으로 돌출된 우주-믿으믿의 일부분일 뿐이다.







가설만이 무성한 것은 은하 문명이 아직 광속의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은하계 전역에서 가장 뛰어난 외계학자들이 냉동 수면에 빠진 채 이 행성을 향해 달려오고 있지만, 정보와 달리 물질은 아직 빛의 속도 아래에 묶여 있기 때문에 이 행성에 대한 무인 탐색기의 탐사 결과가 보고된지 이미 일 세기 이상 지난 지금까지 실제로 이 행성에 와서 연구를 시작한 학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주는 그토록 광막했다. 모든 세계가 저마다 대학을 세우고 학자들을 양성해도 은하계의 다양한 세계들을 탐사하고 연구하자면 바다를 향해 한 줌의 모래알을 던져 넣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달이 지났다. 그의 작업은 예상 목표량의 2% 정도를 채웠다. 열세 개의 믿으믿들을 알게 되었고, 어렴풋이 앞으로의 작업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들이 대지를 활보하는 것도 두 번 보았다.

무인 관측기기에는 한 번도 기록되지 않았으며, 이 행성에 내려온 극소수의 학자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목격했던 광경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행성에 오자마자 두 번이나 볼 수 있었다. 둘 다 모두 흐린 날이었고, 안개 혹은 구름 속에서 신들은 마치 그림자처럼 희미한 형체
로 번져 나왔다. 그 모습은 믿으믿들과 유사했으나 훨씬 거대했고 보다 기묘했다.

믿으믿들은 모든 개체가 전부 모양과 구조가 다르다. 무인 탐색기가 집계한 바로는 모두 일억 칠천오백이십칠만 팔백삼십오 개의 개체가 살고 있는데, 모두가 조성 물질을 제외한 거의 모든 면에서 서로 달라서, 성간 학계에는 믿으믿 분류학 혹은 믿으믿 유형학이라는 새로운 학
문이 생겨났고 뒤이어 정신과 클리닉이 다시 호황을 누렸다.

그들의 신 역시 다양하고 변화무쌍하기로는 그들과 다를 바 없다. 믿으믿들로부터 전해지는 신들의 이름과 권능, 속성은 믿으믿들의 이야기에 따라 제각각 다 달랐으며, 심지어 동일한 믿으믿마저도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필요에 의해 기도를 해도 기도의 대상은 그때 그때 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믿으믿들이 변덕스럽게 신들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신들이 변덕스럽게 이름과 속성을 바꾸는 것처럼 보였다. 예를 들어, 믿으믿들이 말을 할 때 대개 기도하는 것은 바람의 신 [통역 불가]이다. 그러나 [통역 불가]는 공기의 신이자 흐름의 신이며, 때문에 물 혹은 강 혹은 비의 신 [통역 불가]와도 그 권역이 겹친다. 그 중에서도 비의 신 [통역 불가]는 다시 중력의 신 [통역 불가], 직선 운동의 신 [통역 불가], 가속도의 신 [통역 불가]와 어느 정도 겹쳐진다.

신들의 권역은 대개 자연 현상 혹은 자연 원리에 편중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 연구에서 많은 학자들이 믿으믿들의 종교 체계가 결여한 윤리 혹은 도덕적 측면을 지적했다. 믿으믿들의 종교는 결국 자연 현상을 신격화한 원시 종교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러나 믿으믿들에 대한 연구가 보다 진행되면서 이러한 견해는 자연스럽게 수정되고 배제되었다. 믿으믿들은 철저하게 독립적이고 자주적이고 자족적인 개체들이었으며, 일정 형식을 지닌 공동체를 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인 윤리나 도덕 규범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물질 대사는 마찬가지로 개체마다 모두 제각각 달랐지만 대개 동물보다는 식물에 가까워서 다른 개체로부터 영양을 취하지 않고 자연 에너지를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했다. 항성으로부터의 복사 에너지라든가 대기 중에 방전되는 전하, 혹은 행성 자기장이나 중력장과의 교섭을 통해 끌어온 에너지들로 말하고 움직이고 생각한다. 아무도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고 아무도 누군가를 잡아먹거나 누군가에게 잡아먹히지 않는 세상에서 윤리나 도덕은 별도로 필요하지 않았다.

믿으믿들이 그러하듯이 믿으믿들의 신들도 위계나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느 학자는 믿으믿들의 신들의 다양한 이름과 속성, 권능을 하나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면 우주의 가장 궁극적인 원리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수많은 신들이 결국 어느 한 신의 서로 다른 이름과 얼굴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신들의 수많은 이름과 얼굴 뒤의 진정한 하나의 이름, 진정한 하나의 얼굴을 알게 된다면…….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시도로 믿으믿들을(혹은 그들의 신들을) 과학 탐구에 이용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예를 들어 예의, 원자 하나를 옮기는 실험에서 영향을 받아 믿으믿을 일종의 입자 가속기로 써보려고 하거나 믿으믿을 통해 중력 상수 같은 우주의 기초 물리 상수들을 변화시키면서 다른 상수값들의 변화를 관찰하려는 시도들.

그러한 시도들은 하나같이 처참하게 실패했다. 믿으믿들은 학자들의 요청에 따라 친절하고 참을성 많게 몇 번이나 입자들을 던지고 중력 상수를 기울였지만, 막상 그 현상을 관측하려는 학자들의 기계들이 고장 나거나 오류값만을 출력하곤 했다.

결국에는 ‘신들은 기계를 싫어한다’는 농담 같은 격언만 남긴 채 모든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





이후의 일들은 너무 갑작스럽고 급격하게 벌어졌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최초의 징후가 무엇이었는지, 언제부터 어떤 변화가 생겼던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 행성에 내려온 뒤로 몇 번인가 꿈을 꾸기는 했지만, 잠에서 깬 뒤에는 기억에 남지 않는 꿈들이 전부였는데, 언제부턴가 기묘한 꿈들이 잠에서 깬 뒤에도 오래도록 그를 뒤숭숭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아들에 대한 꿈. 이혼한 아내에 대한 꿈. 별들의 거리 저편에 두고 온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에 관한 꿈. 그러니까 임신한 아내가 입에서 아버지를 꺼내는 꿈. 아버지가 발가락을 자르자 그것이 자신이 되는 꿈. 형제들이 서로 결혼하는 꿈…….

처음에는 단순히, 낯선 행성에서 낯선 믿으믿들에게 둘러싸인 고독이 꿈에 반영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꿈을 꾸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꿈의 기괴함의 강도가 심해지면서 그는 이것이 단순한 그리움이나 향수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치 누군가 그의 머릿속을 마구 뒤져서 헤집는 것 같았다.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다양하고 다채로운 믿으믿들이었기 때문에 눈치 채는 것이 아주 늦었지만, 믿으믿들에게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에게 가장 많은 언어 정보를 제공했던, 그만큼이나 가장 오래 친숙하게 지냈던 믿으믿 ‘손나팔’―손으로 사용하는 부속지 끝이 나팔 모양의 큰 흡반이어서 그가 붙여준 별명이었다―이 어느 샌가 무기력하고 쉽게 지치며 잘 움직이지 않는 것을 알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믿으믿들에게, 불멸자들에게도 병이 있나? 놀란 그의 눈에 차츰 다른 믿으믿들의 변화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많은 믿으믿들이 움직임이 굼떠졌으며 말수가 줄고 불안정해 보였다.

변화는 믿으믿들의 신화에서도 나타났다. 영화배우나 연예인처럼, 믿으믿들에게는 각자가 좋아하는 신, 기도를 주로 드리는 신이나 이야기를 자주하는 신이 있었고, 만날 때도 서로의 안부를 묻는 대신 상대가 좋아하는 신에 대한 최신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 인사였다. 그런데 여
러 가지 변화에 놀란 그가 가능한 많은 믿으믿들을 찾아 다니면서, 신들에 대한 믿으믿들의 이야기 자체가 줄고, 심지어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신의 이름에 대해서도 애매하거나 불안한 태도를 보이는 믿으믿들이 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세계 전체가 쇠락하고 사멸을 향해 치닫는 느낌 속에서 그는 절망적으로 성간 통신기를 열고 그를 불안하게 만든 모든 변화들을 두서없이 보고 했다. 그리고 안 좋은 예감 속에서 그를 데려갈 성간 셔틀을 예정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서 긴급 요청했다.

이제 그의 연구 주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성간 통신을 통해 원격 조작되던 다른 프로젝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무인기들이 그가 머무는 곳 상공을 날아다니며 그가 보고한 변화들이 실제로 발생했는지 관측하기 시작했고, 다른 대륙에 있던 상근 연구자들도 동원할 수 있는 가장 빠른 탈것을 타고 그가 있는 곳을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보았다.
‘손나팔’의, 평소보다 몇 배나 비대해진 흡반 하나가 마침내 ‘손나팔’의 부속지에서 떨어져 나오더니, 가늘고 여린 촉수들을 내어 걷기 시작하는 것을.

‘풍선 다리’라고 이름 붙였던 부유성 믿으믿을 구성하던 수많은 기포들 중 몇몇이 ‘풍선 다리’에게서 떨어져 나와 솜털 같은 다리를 흔들거리며 바람을 타고 흘러가는것을.

‘머리 나무’라고 불렀던 고정형 믿으믿의 뿌리에서 또
다른 작은 ‘머리 나무’들이 얼굴을 내미는 것을.

그는 경악했고, 또 그것마저 보았다.

저녁. 그 행성 특유의 보랏빛 황혼 속에서 다시 신들이 행진하는 것을. 그러나 믿으믿들을 닮은 신들은 믿으믿들과 마찬가지로 어딘가 불안정하고 굼떠 보였고, 행렬의 마지막 끝에는 믿으믿들의 신들을 좇아가듯 혹은 쫓아가듯 새로운 그림자가 어스름 속에서 비쳐 나왔는데, 그것은 두 다리로 걷고 두 팔을 흔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통찰이 그의 머리를 벼락처럼 내리쳤다. 신들의 실재가 인정되기 전에, 신들을 단지 믿음의 산물이라고 생각해서 붙여졌던, 믿으믿이라는 이름은 그러나 우주의 가장 냉혹한 농담 속에서 잔인하게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신들은 믿으믿들의 믿음-무의식적이고 원형적인 신화적 사고의 물리적인 반영이었다.

외재론과 내재론 모두 반만 맞고 반은 틀린 것이었다. 신들은 행성 전체를 둘러싼 알 수 없는 장에 믿으믿들의 관념이 투영된 결과물일 수도 있었고, 혹은 믿으믿들이 알 수 없는 힘으로 그들의 상상 속 신들을 無로부터 이름 붙여 불러낸 것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행성과 신, 믿으믿들은 기묘한 평형 상태, 일종의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행성에 그가 온 것이다.

그 개인은 종교나 신화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은하 의회는 특유의 철저한 신중함으로, 뚜렷한 이유나 근거 없이도 이 행성에 종교나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진 자가 들어가는 것을 엄격하게 막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몰랐을 것이다. 종교 교리나 의식, 신화 체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신화와 종교를 만들어내는 가장 원초적인 힘 중 하나가 무엇인지.

지금까지 이 행성을 방문했던 학자들의 종족은 모두 클로닝이나 자기 설계를 통해 세대 교체를 했다. 결혼과 출산이라는 낡은 방식을 쓰는 종족 출신은 그가 처음이었다. 분과 위원회의 의도적인 선별은 아니었다. 은하 고리를 이루는 종족들 중 절대 다수가 그러했을 뿐이었으니까.

비록 그가 명시적인 형태의 종교나 신화의 신봉자는 아니었을지라도, 그의 의식적인 사고 구조 어디에도 종교나 신화적 요소가 없었을지라도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부모와 자식에 대한 원형적 사고는 무의식 깊은 곳에 배태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행성에서 마침내 싹이 트고 자라난 것이다.








이상의 깨달음을 빠르고 조급한 말씨로 성간 통신기에 구술한 다음 마지막으로 그는 앞으로 자신이 할 일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보고했고,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더 이상 신들의 생태계가 오염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다. 오염원은 즉각적으로 제거되어야 했다. 성간 셔틀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는 자살했다. 그러자 죽음이 태어났다.







행성 ED-042는 외부 방문으로부터 영구 격리, 차단되었습니다. 무인 탐색기들에 의한 간접 관찰에 따르면 한때 믿으믿이라 불렸던 이 행성의 토착 지성종은 이제 더 이상 불멸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열매를 맺고 알을 낳고 분열을 하고 출산을 합니다. 그리고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극히 신중한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행해진 인터뷰에 따르면 이들은 이제 신들도 역시 태어나고 죽으며, 자손을 낳고 번창시킨다고 이야기합니다. 한때는 나지도 죽지도 않고 눈과 코와 입이 없는, 팔다리도 없는 기묘한 혼돈의 신들이 살았으나 이제는 아버지 하늘과 어머니 대지 사이에서 태어난 수많은 신들이 울고 웃고 싸우고 사랑하며 이행성을 다스리고 있다고…….






 

2013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박성환 기자

🎓️ 진로 추천

  • 종교학
  • 철학·윤리학
  • 문화인류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