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엔 점조명이 비추고 있고 발레리나가 우아한 춤사위를 선보이고 있다.
그런데 관객은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하다.
혼자 춤을 추기엔 무대가 너무 넓다.
게다가 발레리나도 누군가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듯 자꾸만 어둠 속으로 손을 건넨다.
2막이 시작했다.
그제야 어둠에 익은 눈에 어둠 속의 댄서들이 보인다.
발레리나는 수십 명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DNA에도 ‘발레리나’와 ‘어둠 속의 댄서’가 있다. 생명현상이 드러나는 것은 단백질을 통해서다.
그래서 DNA 중에서도 단백질을 만드는 영역인 ‘엑손’이 발레리나 역할을 맡아 학계의 조명을 받아왔다.
반면 나머지인 DNA의 97%는 어둠 속의 댄서로 조용히 침묵을 지켜야 했다.
그런데 최근 어둠의 DNA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단백질 조절은 아무나 하나
건물 1층에서 우연히 코가 예쁘기로 유명한 연예인을 만났다고 생각해 보자.
코가 높기도 하거니와 끝이 마치 버선코처럼 살짝 올라간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내 코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저런 코도 있는데….’
집에 와 어머니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지금 내 모습은 유전자가 만든 형상이라는 것을….
코의 형태를 결정하는 유전자가 지난 9월 13일 ‘플로스 제네틱스’를 통해 그 정체를 드러냈다. 만프리드 카이저 네덜란드 에라스무스 MC대 의료센터 교수 연구팀이 ‘Prdm16’이라는 유전자가 코의 넓이와 높이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또 이 유전자의 특정 부위에 있는 염기 하나가 A(아데닌)인지, G(구아닌)인지에 따라 코의 형태는 크게 달라졌다.
연구팀은 코 모양 외에도 광대뼈와 미간의 길이 같이 얼굴의 형태를 결정하는 유전자를 네 개 더 발견했다. 이들도 염기 하나에 따라 각각 다른 얼굴 형태를 만든다.
이처럼 같은 DNA 지역에서 염기가 차이가 나는 것을 단일염기다형성(SNP)이라고 한다.
코 모양 유전자에서 발견된 다른 종류의 염기인 A와 G가 그 예다.
SNP는 꽤 많이 발견된다. 전체 DNA 중에 1000만 곳이 넘는다.
사람 게놈을 이루는 염기가 30억 개이므로, 300개 당 하나 꼴로 SNP가 있는 셈이다.
과학자들은 SNP를 연구하면 사람의 형질은 물론 질병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사냥을 하듯 경쟁적으로 SNP를 찾았다.
특히 고혈압, 자폐증, 고지혈증, 당뇨 같은 질병과 관련된 SNP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이렇게 찾은 질병 관련 SNP은 수천 개나 된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찾은 SNP의 93%가 단백질을 만들지 않는 DNA, 흔히 ‘정크 DNA’라고 부르는 부분에 있었다.
분자생물학 연구에서는 생명현상을 단백질의 기능으로 설명한다.
DNA에 변화가 생기면 다른 생리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단백질이 아예 만들어지지 않거나, 단백질의 모양이 달라져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이때 단백질에 영향을 주는 DNA의 변화는 엑손 부분에서 일어난 것을 말한다.
단백질이 되기 직전 잘려나가는 인트론 지역과 단백질을 만들지 못하는 다른 DNA에서는 염기가 변해봤자 단백질을 만드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유전자 스위치 원격 조종
과학자들은 정크 DNA에 염기가 변할 때도 단백질을 만드는 데 영향이 있는 경우를 여럿 찾아냈다. 단백질을 만들지는 않더라도, 유전자를 조절하는 부분인 프로모터에 염기가 하나라도 변한다면 단백질을 만드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다.
또 DNA에서 RNA를 만드는 전사조절인자가 붙는 부위에 이상이 생겨도 마찬가지다. 인트론에 SNP가 있다면 전령 RNA(mRNA) 성숙 과정에 영향을 줘서, 단백질의 양이 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해당 유전자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SNP가 있다면 위 방법으로는 유전자에 영향을 줄 수가 없다. 불행히도 SNP는 보통 이렇게 뜬금없어 보이는 곳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수 윤종신이 앓고 있다는 크론씨병이 대표적이다. 크론씨병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진 유전자는 ‘Trib1’인데, 이 유전자와 꽤 떨어진 곳에서 SNP가 발견된다. 과학자들은 이렇게 멀리 떨어진 SNP라도 분명 단백질을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SNP가 주로 유전자를 조절하는 지역(DHS)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 32개 연구실의 400여 명의 과학자들이 지난 5년 간 이 SNP가 어떻게 작용을 하는지 연구했다. ‘엔코드(ENCODE) 프로젝트’다.
그리고 지난 9월 초 네이처와 사이언스, 게놈 바이올로지에 30여 편의 논문을 냈다. 이에 따르면, 정크 DNA에서 발견한 ‘유전자 스위치’는 약 400만 개나 됐다. 이 중에 해당 유전자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원격 조종이 가능한 SNP가 있다.
어떻게 가능할까.
DNA를 죽 펴면 멀리 떨어져 보이지만 3차원으로 접히면 SNP와 해당 유전자가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SNP가 아예 다른 염색체에 있더라도 유전자의 스위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염색체끼리 서로 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를 이끈 이완 버니 유럽생물정보학연구소 박사는 “지금까지 생각과는 다르게 정크 DNA의 대부분도 생물학적 기능을 한다는 것을 밝혔다”며 “이제 ‘정크 DNA’라는 단어를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분명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주에는 강한 중력을 발휘하는 ‘무엇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
암흑물질에 대해 우리가 아는 전부다.
암흑물질은 별 등 눈에 보이는 물질보다 최소 5배 가량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생물에도 암흑물질이 있다.
DNA를 보조하는 불안정한 중간 물질로만 알던 RNA다.
특히 작은 비번역 RNA 조각들 즉 마이크로 RNA가 유전자의 조절을 담당하는 핵심 물질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수십조 개의 세포들은 거의 모두 동일한 유전자 정보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세포마다 모양과 기능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세포마다 유전 정보를 활용하는 정도와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생물체의 유전 정보는 DNA에 들어있는데, 이를 설계도로 해 다양한 유전산물을 생산하고 세포의 기능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신경세포는 신경전달물질의 유전자를 선택적으로 활성화하고, 근육을 이루는 단백질의 유전자는 억제한다.
분자생물학의 기틀이 마련되기 시작한 1950년대 이후로, DNA로부터 만들어지는 유전 물질 중 단백질만이 궁극적인 조절기능을 갖는다는 생각이 많았다.
DNA의 염기서열은 RNA을 생산하고, RNA의 염기서열은 단백질 생산과정에서 아미노산 서열을 결정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단백질이 세포의 각종 기능을 주관한다. 중심원리(센트럴 도그마)라고 부르는 이 이론에서 RNA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즉 RNA의 기능은 단백질 생산을 연결하는 ‘정보전달자’의 역할에 국한되어 있었다.
재평가 받는 RNA
하지만 작은 변화가 시작됐다.
RNA가 생명현상의 조절자로 새로 떠올랐다.
RNA는 DNA와 아주 유사한 화학물질이지만 DNA와 달리 단일나선을 포함해 다양한 구조를 띌 수 있다. 또 단백질, DNA, 다른 RNA 등과 결합할 수 있어 구조와 기능이 다양하다는 장점이 있다.
1960년대에, 단백질을 만드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전령 RNA, 리보솜을 구성하는 rRNA, 아미노산을 리보솜으로 전달해주는 운반 RNA 등 다양한 기능을 하는 RNA가 발견됐다.
2000년대에 상황은 또 변했다.
DNA에는 단백질 정보를 가지지 않은 비번역 DNA가 97%이상을 차지한다.
DNA의 기능을 밝히고자 엔코드 프로젝트와 팬텀 프로젝트같은 대규모의 연구를 한 결과 흥미롭게도 쓸모없어 보이는 DNA 부위에서 수많은 RNA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RNA, 즉 단백질을 못 만드는 RNA를 비번역 RNA라고 한다.
더구나 유전학과 생화학 연구를 통해 생물학적 활성을 갖는 RNA 조각들이 속속 발견됐다.
이러한 RNA들을 ‘리보핵산 조절자’라고도 한다.
현재 수천 종 혹은 수만 종의 비번역 RNA가 존재할 것으로 예측되는데, 그 중 기능을 잘 알고 있는 것은 100여 종 미만이다.
비번역 RNA 연구는 현대 생물학의 주요 트렌드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비번역 RNA 중 최근 10여 년간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필자도 연구하고 있는 ‘마이크로 RNA(microRNA)’다.
마이크로 RNA는 크기가 핵산이 22개 정도 되는 작은 RNA로, 1993년에 꼬마선충에서 처음 발견됐다. 당시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하다 1998년 RNA가 강한 유전자 억제현상을 유도한다는 ‘RNA 간섭(RNAi)’ 현상이 밝혀진 후 재조명됐다. 당시까지 마이크로 RNA는 큰 RNA의 분해산물로 여겨져 분석 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에, 이런 RNA 조각이 유전자 조절을 한다는 사실은 당시 거의 충격이었다.
세포에 항상 있었으나 학자들의 실험에서 무시됐기 때문이다.
‘생물계의 암흑물질’로 비유할 정도였다.
생명현상을 지배하는 의문의 조절자
마이크로 RNA는 단백질 정보를 담은 전령 RNA에 결합해 단백질이 만들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염기서열 정보를 활용해 특정한 전령 RNA에만 결합하기 때문에, 유전자를 선택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인간은 약 900종의 마이크로 RNA를 가지고 있고 각각 수백 종의 유전자를 조절하고 있다.
단백질 유전자의 대부분이 마이크로 RNA의 통제 아래에 있는 셈이다.
마이크로 RNA를 통한 조절 프로그램은 세포의 분화 발달 과정에 중요하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 RNA의 일종인 miR-1은 근육세포에서 생산된다.
이 마이크로 RNA는 방해 유전자를 억제해 세포가 근육세포로 분화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 miR-124는 신경세포에서만 만들어지는데, 마찬가지로 신경세포가 정상적으로 분화할 수 있도록 돕는다. 마이크로 RNA의 역할이 중요한 만큼 이들은 꼭 필요한 세포에서만 만들어지도록 철저히 통제된다. 만약 이 통제체제에 결함이 생기면 동물의 정상적인 성장에 문제가 생기고 암세포가 생길 수 있다.
필자의 연구팀은 2002년 마이크로 RNA의 생성과정에 대한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또 생성과정에 필요한 단백질들을 발견했으며, 그 작용 원리까지 밝혀냈다. 배아줄기 세포나 암세포와 관련한 연구도 했다.
동물의 성장을 돕는 마이크로 RNA도 알아냈다.
최근에는 마이크로 RNA 외의 다른 비번역 RNA로 연구 범위를 넓히고 있다.
비번역 RNA에 대한 연구는 우리 유전체에 숨겨진 수수께끼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밝혀진 유전자 조절의 새로운 원리는 면역, 발생, 뇌과학을 비롯해 모든 생물학 분야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 질병에 대한 이해와 진단, 치료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것이다.
생물학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여는 비번역 RNA 연구가 어떻게 펼쳐질지 지켜보는 재미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는 영국 소설가 루이 스티븐슨의 유명한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상한 사건’을 각색했다. 악의 화신 하이드는 또다른 사람이 아니라 약물 복용으로 다른 사람이 된 지킬 자신이다.
근본이 변하지 않았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이 가능할까. DNA에서는 가능하다.
똑같은 DNA에서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오는 현상, 후성 유전이다.
후성유전은 최근 생명과학의 커다란 화두다.
염기서열에 변화가 없는데도 유전자 발현이 달라지고 엉뚱한 단백질이 만들어진다.
이것은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부위의 크로마틴(히스톤 단백질과 DNA의 복합체. 염색질이라고도 한다)구조가 변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DNA 자체 또는 히스톤 단백질에 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발생한다.
후성유전의 두 가지 ‘스위치’
먼저 DNA 자체의 화학 변화인 메틸화를 살펴보자.
DNA의 염기 중에는 시토신(C)과 구아닌(G)이 길게 이어져있는 부분(CpG)이 있다.
그 중 시토신 분자에 메틸기가 결합하는 것이 메틸화다.
이 부분은 주변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하는데, 여기에 메틸화가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세포 분열 과정에서 DNA 메틸화 효소들이 작용하면 DNA 염기서열 변화 없이도 어떤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할 수 있고, 세대를 걸쳐서도 그 효과를 유지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DNA 변이 없이도 다양한 형질이 유전될 수 있다.
최근에는 수정란의 생성과 발달과정에서 DNA 메틸화 작용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현상도 발견됐다.
그간 DNA 메틸화를 사라지게 하는 효소 즉 ‘탈메틸화 효소’가 있다는 가설이 있었는데, 이번 발견을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또 각 조직에서 발견되는 암세포와 정상세포 사이에서 DNA 메틸화 분포가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도 연구하고 있다.
이를 통해 개체의 발달 과정에서 세포가 조직마다 어떻게 DNA 메틸화가 다른지 알 수 있다.
후성유전의 두 번째 스위치는 히스톤의 화학적 변형이다.
히스톤 단백질의 N-말단 부위의 아미노산에는 메틸화뿐만 아니라 ‘아세틸화’, ‘인산화’, ‘유비퀴틴화’ 그리고 ‘수모화’ 등 다양한 화학적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런 변화는 곧 유전자 발현, 즉 단백질 생산과 연결된다. 그래서 히스톤의 다양한 상태를 한 데 모으면 마치 바코드처럼 유전자 발현을 알 수 있다.
이를 ‘히스톤 코드’라고 부른다.
최근 활발히 연구하고 있는 것은 히스톤 단백질의 라이신 아미노산에서 일어나는 메틸화다.
특히 3번 히스톤의 4번째 라이신 아미노산에 메틸화가 일어나면 주변 유전자의 발현을 촉진한다.
반면 9번째와 27번째 라이신 아미노산에 메틸화가 일어나면 발현이 억제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메틸기가 붙어 있는 히스톤만 골라 염색질에 달라붙는 단백질을 통해서다.
이 단백질은 각각의 메틸화에 맞춰 서로 다른 고유한 단백질 복합체를 이룬다.
현재 이런 화학적 변형을 일으키는 효소와, 변형을 인지해서 발현을 조절하는 단백질 그리고 이 변화를 제거하는 효소가 차례로 밝혀지고 있다.
암을 예측할 수 있다?
암의 발생과 치료에도 후성유전학이 관여하고 있다.
그 동안 다양한 암 유전자와 신호 전달 체계 등이 발견됐지만, 전체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DNA 변이 외에 나머지 다른 원인은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해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런 원인을 설명해줄 수 있는 후보가 바로 후성유전학이다.
여러 가지 암세포의 DNA에서 메틸화가 과도하게 일어난 '과메틸화(Hypermethylation)’가 공통적으로 보인다.
비유 그대로 ‘지킬 DNA’에서 암이라는 하이드가 나올 수 있는 메커니즘인 셈이다.
암에 후성유전이 관여한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관여하는지 밝혀내면 암 진단과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차세대 분석기술을 이용해 어떤 후성유전학적 표지(예를 들면 과메틸화)가 전체 유전체 위에 어디에 어떻게 분포하는지를 마치 지도 위에 표시하듯이 나타내면 된다.
이것을 ‘암 후성유전체(Cancer Epigenome)’라고 한다.
최근 ‘엔코드 프로젝트’의 결과를 보면, 다양한 암세포에서는 후성유전학적 표지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환자 개인에 따라, 또 같은 환자라도 조직에 따라 암이 고유한 후성유전체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를 활용하면 환자 개인별 맞춤형 치료가 가능하다.
차세대 후성유전학, ‘크로마틴 코드’
그러나 현재의 후성유전학 지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현재 각각의 유전자에 대한 후성유전학적 조절은 증명이 되고 있다.
하지만 암이나 줄기세포, 배아 발달 등 단계에서 어떻게 다른 유전자들과 상호 작용하는지는 잘 모른다. 또 후성유전학을 일으키거나 인지하는 단백질은 소수인데, 어떻게 수많은 유전자와 전사체를 조절하는지도 미지수다.
환자 맞춤형 치료가 성공하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이를 위해 최근에는 DNA와 히스톤의 변화 이외의 또 다른 요소를 주목하고 있다.
크로마틴이다. 필자의 크로마틴 다이나믹스 창의연구단은 히스톤의 화학적 변화를 가져오는 효소가 히스톤뿐만 아니라 비(非)히스톤 단백질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히스톤을 메틸화시키는 효소가 크로마틴의 이동에 관여하는 단백질을 메틸화시키고, 그 결과 암이 진행되는 과정에 핵심적인 유전자가 발현되지 않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암세포가 죽거나 줄어든다.
반대로 히스톤 메틸화 효소가 암 억제 단백질을 메틸화해 분해시켜 암을 유지시키기도 한다.
필자는 DNA와 히스톤을 주로 다루는 기존의 후성유전학을 확장해 ‘크로마틴 코드’라는 새로운 개념을 연구하고 있다.
히스톤 변형 효소가 히스톤 외에 다른 단백질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을 추가해 확장한 개념이다.
후성유전학을 좌우하는 조절자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만약 확장된 개념인 크로마틴 코드를 발견하고 메커니즘을 밝힐 수 있다면, 질병을 가진 환자의 다양한 세포를 표현할 수 있는 ‘지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지도로 생명체의 수많은 현상을 설명하고, 문제가 일어난 부분을 쉽게 찾아 고칠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별 하나에 추억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 쓸쓸함과/…”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 실린 시집을 샀다.
늘 들고 다니기 번거로워 시가 나온 면만 종이에 복사했는데 뭔가 이상하다.
“별 하나에 추위와/별 하나에 사람과/별 하나에 쏠쏠함과/…” 원본을 펼쳐 보니 아무 문제 없다.
원본을 수정하지 않았는데 복사하는 과정에서 글자가 변할 수 있을까.
최근 연구 결과를 보면 RNA가 이런 일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물론 워낙 믿기 어려워 격렬히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세포가 생명과학의 '중심원리(센트럴도그마)’를 피해갈 수 있다.”
지난해 5월, 네이처는 다소 흥분된 어조로 이런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같은 날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 한 편 때문이었다.
비비안 청 미국 펜실베니아 의대 교수팀이 발표한 논문으로, 27명의 면역세포(B세포)에서 얻은 DNA(게놈)와 이를 토대로 만든 RNA 염기 서열을 차세대 염기서열분석기술로 읽어 비교했다.
이 논문이 왜 화제를 불러 모았을까.
복사본이 원본과 다를 수 있다?
상식대로라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없어야 한다.
생명은 유전자에서 단백질로 ‘번역’을 하기 전에, 유전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 견고한 저장고인 DNA로부터 한 벌의 복사본을 인쇄하는
과정이 있다.
원본을 곧바로 쓰긴 위험하고 불편하니, 가벼운 종이에 복사해 쓰는 것과 비슷하다.
이 ‘종이’에 해당하는 물질이 RNA다.
RNA는 활자를 복사했으니 당연히 활자와 똑같은 정보(염기서열)를 담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1958년 프랜시스 크릭이 제안한 ‘중심원리’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청 교수의 연구에서는 그렇지 않은 예가 발견됐다.
원본과 복사본 관계인 DNA와 RNA의 염기 서열에서 아주 다양한 종류의 차이가 발견된 것이다.
그것도 1만 210개라는 많은 수였다. 연구팀은 이 변이를 ‘RNA-DNA 차이’라는 뜻의 ‘RDD’라고 이름 붙였다.
사실 RDD는 생명과학계에서 완전히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에이다(ADAR)’와 ‘아포벡(APOBEC)’이라는 효소가 전령 RNA의 서열 중 A를 G로, C를 U로 바꾸는 ‘RNA 편집(RNA editing)’이라는 현상이 이미 밝혀져 있었다(아래 그림).
이는 대부분 체내에 들어온 RNA 바이러스로부터 세포를 방어하기 위한 메커니즘이다.
즉 바이러스의 RNA를 직접 공격해 바이러스를 무력화시킨다.
따라서 RNA 편집이 조금 일어났다고 해서 중심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청 교수의 논문은 이 현상이 다양한 형태로 매우 많이 존재한다고 밝히고 있다.
기존에 알려진 두 종류의 변이 외에 열 종류의 다른 변이가 추가로 발견됐다.
이는 유전자를 이루는 4개의 염기가 모두 각기 다른 염기로 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상 모든 변이가 가능한 것이다.
더구나 이 논문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논문 제출은 더 빨랐다) 필자의 연구팀도 비슷한 결론의 연구 결과를 ‘네이처 제네틱스’에 발표했다.
17명의 한국인으로부터 DNA와 RNA 염기서열을 비교 분석했는데, 여기에서도 12종류 1809개의 변이를 발견했다.
이 역시 예상보다 훨씬 많고 광범위한 것이다.
필자의 연구팀은 여기에 ‘전사 염기 변이(TBM)’라는 보다 적극적인 이름을 붙였다.
논란에 휩싸인 RNA 자체변이
이 현상은 곧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박스 기사 참조).
이것은 ‘RNA 자체 변이’에 대한 분자생물학적 메커니즘이 실험적으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현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은 실험을 하는 분자생물학자가 아니라 컴퓨터 생명과학자들이었다.
대규모 서열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문제들로 잘못된 결론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다음 주 네이처는 ‘RNA 자체 변이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다’라는 기사를 통해 이런 학계 분위기를 빠르게 전했다.
청 교수와 다른 연구자 사이의 논쟁이 아직 뜨거운 가운데, RNA 자체 변이에 대한 논문은 계속 나오고 있다.
2012년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에는 한 명의 개인 유전체에서 2만 2000여 개에 이르는 대규모 RNA 자체 변이가 발견됐다는 결과가 실렸다. 악성 종양, 정신분열 등 질병 조직의 예도 보고됐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날까.
아직 논란 중이라 섣불리 말하기는 어렵지만, 가설을 제시해볼 수는 있다.
필자는 동물에게 암을 일으키는 레트로바이러스가 사람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이것은 광범위한 RNA 편집을 통해 레트로바이러스의 RNA를 변형시키는 진화적 메커니즘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외부 바이러스의 RNA뿐만 아니라 자체 RNA마저 편집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만이 겪는 장수나 스트레스 등이 원인일 수 있다.
RNA 자체 변이에 관한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확실한 메커니즘이 발견되거나, 혹은 실험이나 분석이 잘못됐다고 밝혀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쟁을 통해 인간 유전체학은 발전한다.
머지 않아 RNA 자체 변이의 실제 존재 여부와 빈도, 그리고 생명현상이나 질병에 미치는 영향이 많은 과학자들의 손에 의해 정확히 평가될 것이다.
▼관련기사를 계속 보시려면?
INTRO. NEO DNA
PART 1. 당신이 알던 DNA
PART 2.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 네오 DNA
PART 3. DNA, 미래를 설계하다
PART 4. 마음을 유전자에 담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