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 토요일 저녁 8시. 사무실.
“아아, 혼이 나갈 정도로 피곤하다. 안 되는데. 아직 기획기사가 남았는데.”
사무실에서 트위터에 이런 문장을 남겼다. 정말 피곤했다. 잠시 의자에 기대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퇴근하던 디자이너가 깨워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전날까지 한 주 내리 야근을 했지만 ‘피로’ 기획기사는 잘 안 풀렸다. 주말인 토요일도 회사에서 과학동아 독자위원회를 진행했고(169쪽), 오후엔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재능기부 행사의 회의에 잠시 참석했다. 그리고 다시 회사로 돌아와서 기획기사를 궁리했다. 이미 스스로 설정한 원고 마감 기한이 지난 시점이었다.
생각해보니 회사 안팎의 일로 두어 달 동안 거의 주말이 없었다. 피로했다. 속도 쓰렸다. 마감이 끝나고 쉬면 되겠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어떤 것도 누가 강제로 시킨 일이 아니었다. 다 스스로 선택해하던 일이었다. ‘피로’ 기사도 편집장의 제안에 ‘제가 해보죠’하고 자원했다.
이렇게 ‘일을 만들어가며’ 일하는 건, 당연히 일이 즐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하지 않으면 불안한 심리도 있다. 쉴 때도 뭔가 관련된 일에서 손을 놓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평소 노력하지 않으면 중요한 것을 놓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이게 드문 상황일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딱히 시험 기간도 아닌데 친구와 영화라도 보려고 하면 괜히 불안해지는 수험생, 지친 퇴근 길에 자기계발서를 펼치는 직장인. 이들은 막연한 불안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들볶는다. ‘불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현대인의 사자, 스트레스
9월 16일 일요일 밤 11시. 침실.
숙제를 잊은 학생의 심정. 중요한 회의를 앞둔 직장인의 마음. 기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일요일 내내 원고를 붙들었지만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남은 분량을 보며 시간만 흘려 보냈다. 결국 1시 40분, 불편한 잠에 들었다. 다음 월요일 아침 출근길 지옥을 걱정하며….
불안은 생물학적인 본능이기도 하고, 인간만의 감정이기도 하다. 모든 동물은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상황 앞에서 불안해질 ‘의무’가 있다. 미국의 신경과학자이자 영장류학자 로버트 새폴스키 스탠퍼드대 생물학과 교수의 저서 ‘스트레스’는 초원의 야생동물의 삶과 현대인의 삶을 비교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아프리카 세렝게티의 초원에 사는 얼룩말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사자의 습격에 대비해 늘 주위를 경계한다. 세렝게티를 다룬 수많은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볼 수 있듯, 이들은 밥(풀)을 먹으면서도 끊임없이 주위를 둘러보고 귀를 사방 팔방으로 쫑긋거린다.
그러다 정말 사자가 위협권에 들어오면 모든 것을 멈추고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도망간다. 맹수를 피하는 데 당장은 불필요한 생식이나 식욕, 소화 작용 등은 억누르고 정말 모든 생물학적 역량을 온전히 걸음(뜀)에 집중한다. 이런 역할을 하는 스위치는 호르몬이다. 당질 코르티코이드, 에피네프린, 노르에피네프린이 분비되면서 교감신경이 활성화된다. 혈압이 오르고 다리 근육에 혈액과 함께 에너지가 공급된다. 얼룩말의 몸은 순간 스포츠카처럼 뒤바뀐다.
이 역할을 하는 호르몬을 ‘스트레스 호르몬’이라 부른다. 스트레스 호르몬은 동물의 생존확률을 높이는 중요한 물질이다(위험 앞에서 도망가는 행동 외에, 공격적인 행동을 할 때 나오기도 한다.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주먹이 불끈불끈). 그런데 왜 ‘스트레스’ 호르몬일까. 생사가 걸린 엄청난 위협과 그로 인한 불안이 바로 자연 속 스트레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호르몬이 사람에게는 조금 다르게 작용한다. 도시에 사는 우리는 맹수에 잡힐 위험이 별로 없다. 대신 다른 종류의 대상에 스트레스를 느낀다. 집값이 떨어질까 전전긍긍하거나 2년 앞으로 다가온 수능을 걱정하거나, 또는 10년 뒤 장래를 걱정하며 속을 끓인다. 지각을 두려워하거나 ‘개도 안 하는’ 돈 걱정을 한다.
문제는 이런 ‘보이지 않는 문제’를 걱정하고 불안해 할 때도, 즉 실제로 닥치지 않은 위험에 대한 예상만으로도 ‘스트레스 반응’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늦잠을 잔 월요일 아침의 교통체증에 아직 만나지 않은 선생님의 화난 얼굴, 상사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리고 사태가 진정된 뒤에도 잘 사라지지 않는다(호르몬이 천천히 떨어진다). 그 결과 멀쩡히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 때때로 교감신경이 지나치게 활성화하고, 긴장, 숨가쁨, 두근거림, 동공확장, 식욕 부진, 성욕 감퇴 등의 증세가 나타난다. 모두 많이 겪어 봤음직한 익숙한 현상이다. 잘 모르겠다면 내일 갑자기 영어 말하기 시험이 생긴다거나 사장실에 불려갈 거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고 생각해 보라.
우리를 피로하게 하는 것
9월 17일 월요일 오전 9시. 지하철 안.
지각이다. 늦잠 때문은 아니다. 월요일인데다 태풍 ‘산바’가 다가오고 있어서 평소보다 10~20분 정도 일찍 출발했다. 길이 워낙 막혀 출근하는데에만 두 시간이 꼬박 들었다. 늘 그랬듯,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어질 정도로 지쳤다.
이런 스트레스 호르몬이 뭔가 몸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먼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새폴스키 교수는 “스트레스가 아프게 하거나 아플 위험성을 높이는 경우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정말 스트레스가 해가 없다는 게 아니다. “스트레스는 (그런 아픔을 줄)질병에 걸릴 위험을 늘린다.” 두 번째로 병은 아니지만, 삶의 질과 관련한 변화를 일으킨다. 세 번째는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갖는 주제, 즉 만성 피로다. 그런데 이 세 번째 경우는 다른 두 가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끼친다(140쪽에서 다룬다).
먼저 일부 질병은 피로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특히 그 중 하나는 따로 짚고 넘어가야 한다. 피로와 관련된 다른 종류의 질병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 호르몬이 나오면 몸은 위험에 대비해 근육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할 준비를 한다. 그러기 위해 혈압이 높아진다. 강한 압력과 함께 심장에 들어간 혈액은 심장에서 이들을 맞는 좌심실에 강하게 부딪힌다. 좌심실은 이 압력을 버티기 위해 근육을 발달시킨다. 스트레스가 반복되면 그 사람은 고혈압이 되고, 좌심실 근육은 더욱 발달해 두꺼워진다. 균형을 잃은 심장은 불규칙한 활동을 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혈관역시 압력에 너덜너덜해진다. 결국 총체적인 심혈관계 질환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람들이 흔히 묘사하는 ‘가슴을 부여잡고,’ 혹은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병은 교대근무나 과로 등 ‘일 권하는 사회’에 많은 병이기도 하다(과학동아 2011년 7월호 ‘잠을 잊은 당신 건강한가’). 스트레스와 과로, 질병 사이의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두 번째인 생리반응을 살피기 전에 심리학에 대해 알아보자. 심리학에서는 스트레스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먼저 강렬하고 충격적인 사건에서 오는 ‘트라우마’와, 그보다는 작지만 지속시간이 긴 ‘일상생활 스트레스’다. 위에 설명한 사람들의 스트레스는 다 일상생활 스트레스다. 반면 트라우마는 얼른 들어도 차원이 다르다. 작년 동일본 대지진 같은 천재지변이나 9·11 같은 테러, 전쟁, 교통사고, 큰 사기 사건 피해 등이 트라우마의 예다. 이들이 주는 강력한 스트레스는 일단 피로와는 별개니 논외다.
일상생활 스트레스 가운데 장애인 자녀를 키우며 평생을 사는 부모처럼 다소 극단적인 경우도 있지만, 일상생활 스트레스는 교통체증처럼 대개 잔잔한 수준이다. 실험에서도 그리 극적인 변화가 없다. 취재를 도와 준 한 임상심리전문가 겸 대학 심리학과 연구원은 “오래 긴장 상태를 유지하거나 과로 상태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경우 의사결정, 인지기능이 조금 다르다고 나오지만, 확 드러날 정도는 아니다”며, “장애인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염색체 텔로미어 길이가 짧아져 있다는 연구(노화가 일어났다는 뜻)가 있는 게 그나마 극적인 연구 결과”라고 말했다. 이는 일상생활 스트레스가 노화를 가져온다는 뜻으로, 흔히 “스트레스 때문에 늙는다”고 하는 말이 생리학, 심리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새폴스키 교수도 저서에서 당질 코르티코이드 과잉이 노령 동물의 사망으로 이어지는 예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일상생활 스트레스는 우리를 피로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기자는 아침마다 평균 1시간 50분을 대중교통에서 서서 온다. 심지어 이 날은 아침에 일어나서 비를 뚫고 출근하고, 지각하고, 바로 원고 쓰기에 돌입해 저녁까지 시달리며 하루 종일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렇다면 혹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만성 스트레스’ 아닐까.
“심리학에서 말하는 만성 스트레스는 아니에요. 만성이라면 재난이나 테러, 교통사고 등이죠. 쓰나미로 집이 사라졌거나 교통사고로 사고 이후로도 계속 아픈 거죠. 한번 일어나고 바로 사라지는 스트레스는 해당되지 않아요.”
하지만 평소 우리를 힘들게 하는 스트레스가 바로 이렇게 금세 사라지지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적인 스트레스다. 이렇게 반복되는 스트레스는 스트레스 반응을 제대로 끄지 않아 몸을 계속 일종의 ‘긴장’ 상태로 이끈다. 이렇게 계속되는 스트레스 반응은 질병 위험성을 높인다. 스트레스 호르몬도 고갈돼 몸도 피로해진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9월 17일 월요일 오후 6시. 사무실.
깜짝 놀랐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독일 영화 제목이다. 그런데 봤던 것 같은데 도무지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혹시 스트레스성 기억력 감퇴가 아닐까. 기억을 못 한다니 정말 ‘영혼이 잠식당하는’ 기분이다. 걱정이 돼서인지 식욕도 없었다. 목만 탔다. 그래도 막상 식사하러 가서는 잘 먹었지만.
그럼 스트레스가 일으키는 생리 반응 가운데 피로와 관련이 있을 법한 것들에 무엇이 있을까. 기억과 습관이 있다.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아,” “스트레스 받으면 뭘 자꾸 먹어”라고 자주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놀랍게도 심리학과 생리학 연구 결과를 보면 이들은 정말 관련이 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주의할 게 있다. 생리학은 주로 쥐와 영장류를 대상으로 연구했으며 트라우마나 만성스트레스일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 결과를 사람의 일상적 스트레스와 연관 지어 해석할 때에는 주의해야 한다. 참고 정도로만 받아들여야 한다.
먼저 기억을 감퇴시킨다. 쥐의 경우 해마가 코르티솔의 농도를 조절한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쥐는 해마 크기가 작아진다. 문제는 해마가 기억을 관장하는 부분이라는 점이다. 영장류의 경우는 해마 외에 전전두엽 역시 코르티솔 조절에 관여하는데, 그래도 해마가 영향을 받는것은 마찬가지다.
의사결정도 영향을 받는다. 대표적인 예로 습관적인 행동이 많아진다. 예를 들면 배가 불러도 평소와 같이 습관적으로 계속 먹는 행동을 보인다. 쥐로 실험을 해보면, 스트레스를 받은 쥐는 단물을 실컷 먹인 뒤에도 평소처럼 단물이 나오는 버튼을 계속 눌러 또 먹는다. 반면 정상 쥐는 배가 부르면 누르지 않는다. 이 쥐의 뇌를 해부했다. 습관적인 행동을 관장하는 부분은 뇌의 뒷부분에 위치한 ‘선조체’에 있는데,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 부분이 발달한다. 반면 뇌의 전전두엽과 연합령 부분은 줄어든다. 디아스-페레이아 포르투갈 민호대 생명보건과학연구소 교수팀이 2009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연구다. 임상심리전문가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약하긴 하지만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고 귀띔했다.
기자가 저녁에, 스트레스로 식욕이 별로 없다고 하면서도 막상 식당에 가서는 반찬 하나 안 남기고 싹 비우고 온 것도, 어떻게 보면 스트레스 때문에 습관적인 행동에 굴복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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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피로사회 - 우린 왜 아프게 불사르며 살까
Part I. 불안이 몰고 온 현대의 비극, 스트레스
Part II. 스트레스가 남긴 고통스런 흔적, 만성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