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 호르몬이 부족하다
9월 14일 금요일 오후 1시. 진료실.
“만성피로로 찾아온 환자들의 타액을 하루 네 번 채취해 호르몬 검사를 해보죠. 그러면 코르티솔 수치가 아침부터 바닥으로 쫙 떨어집니다. 기력이 떨어지는 거죠. 만성피로예요.”
3잠시 과거 회상. 기자는 귀를 쫑긋 세우고 3일 전 이동환 서울 고도일병원 만성피로클리닉 원장(만성피로연구회 회장)을 인터뷰할 때 녹음한 파일을 듣고 있다. 잘 안 들릴 때마다 살짝 스트레스 호르몬이 나왔겠지만, 다행히 그럭저럭 받아 적고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 원장의 한 마디에 가슴이 철렁했다. 앞서 이야기하던 스트레스의 메커니즘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앞에서는 분명 스트레스 호르몬이 시도 때도 없이 분비되고, 수치가 잘 떨어지지 않거나 느리게 떨어지는 게 문제였다. 그런데 같은 호르몬이 잘 안 나오는 게 만성피로라니. 그렇다면 기자는 지금껏 헛물만 켠 것일까. 갑자기 스트레스에 온몸이 촉촉히 젖어드는 것 같았다. 뒷목이 뻐근….
“스트레스를 받으면 코르티솔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 여기까진 아는 내용이다!) 그런데 호르몬이 계속 나오면 어떻게 될까요. 고갈되기 시작하겠죠. 완전 고갈은 아니에요. 하지만 기능이 떨어집니다.”
앞서서 스트레스 호르몬이 나오면 교감신경이 활성화된다고 했다. 이 말은 몸의 긴장 상태를 이끈다는 뜻이다. 반대로 이 호르몬이 지나치게 적어지면 몸의 활력이 떨어진다. 이 원장이 말하는 상태는 호르몬이 너무 많이 나와(즉 반복된 스트레스로 소모돼) 더 나올 호르몬이 별로 없는 상태라는 뜻이다.
이제서야 조금 안심이 됐다. 아주 다른 이야기는 아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스트레스 자체는 피로가 아니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반복해 쌓이면, 많은 사람이 고통 받는 만성피로라는 질환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만성피로의 원인은 모두 스트레스 호르몬의 부족 때문일까. “피로의 원인은 다양합니다. 먼저 질병이 있어요. 간기능 저하나 당
뇨, 결핵, 갑상선 질환, 암 등에 걸려도 피로를 느낍니다. 그래서 피로를 호소하는 환자에게 먼저 종합검진을 받아보라고 하죠. 그런데 거기
서도 이상이 안 나타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 저희는 세포의 ‘기능’을 진단합니다.”
이 원장이 국내에 보급한 세포 기능 진단은 병이나 질병 상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상도 아닌 애매한 ‘중간’ 상태를 진단하는 방법이다. 보통 세포의 성분을 분석해 특정 지표를 본다. 만성피로가 바로 이 ‘애매한 중간’ 단계의 증세다. 부신에서 코르티솔을 반복해서 많이 만들었다. 부신이 지쳐서(비유) 이 호르몬이 분비되는 기능이 떨어졌다. 몸이 노곤하고 기운이 없다. 하지만 코르티솔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는 아니다. 완전히 고갈되면 ‘에디슨 병’이라는 병으로 분류된다. 스트레스 호르몬이 전혀 나오지 않아 정작 재빨리 대처해야 할 긴급하고 위급한 상황에 무기력해지는 무서운 질병이다.
“이렇게 부신 기능이 떨어진 상태를 ‘부신피로증’이라고 불러요. 만성피로의 원인 중 하나지요. 만성피로를 일으키는 원인은 이 밖에도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의 기능이 떨어지거나, 영양 불균형이 있을 때, 그리고 ‘장누수증후군’이 있을 때, 이렇게 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 중 장누수증후군은 스트레스와 약물(진통제나 술), 인스턴트 음식 등으로 장의 점막이 손상돼 장내 화학물질이나 미생물 세포벽 등 독소가 체내로 스며드는 증세다. 이들 물질이 혈관을 타고 돌다 간에서 해독되는데, 이 과정에서 간에 부담을 준다. 잘 알려져 있듯 간이 무리하게 일을 많이 하면 피로가 온다.
“보통 ‘과민성장증후군’이라고 부르는 증세가 있습니다. 종양이나 궤양이 없기 때문에 병원 검사에서는 특별히 병으로 분류되지 않지요. 그런데 논문을 보면 이런 환자의 10~70%는 장누수증후군을 함께 가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화학물질이 많이 들어 있는 인스턴트 음식을 많이 먹거나, 설탕이 많은 음식을 먹었을 때(장내 미생물을 이상 증식시켜 독소를 증가시킨다) 이 증세는 더 심해진다. 이런 식생활은 자연히 영양 불균형으로 이어진다.
가만 보면 장누수증후군도 생활습관과 스트레스와 연관이 많다. 청소년이나 직장인이 인스턴트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은 시간이 없거나 바빠서다. 밤 늦은 시간에 학원 수업을 마치고 배가 고파진 학생들이 과일이나 샐러드를 찾아 먹는 일은 드물다. 편의점에서 쉽게 찾는 게 라면이고 햄버거다. 매운 음식이나 술을 찾는 직장인은 스트레스를 해소할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렇게 만성피로의 원인은 어떻게든 스트레스와 연관이 돼 있다. 따라서 갈수록 스트레스 관리가 중요하다. 이 원장도 기능 회복 치료 외
에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줄이고 생활을 관리할 수 있게 하는 데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명상과 상담, 심리치료가 주다. 만성피로는 쉬어서 다스리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를 관리해서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피로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과로와 수면부족, 영양 결핍, 질병 등이 모두 포함된다. 하지만 스트레스 역시 빼놓을 수없다. 스트레스 반응이 지속돼 부신이 피로증을 느끼고 스트레스 호르몬이 고갈되면 만성피로가 된다는 설명이다. 흔히 ‘스트레스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생리학자 한스 셀리에 박사도 만성피로를 이렇게 정의했다.]
스스로가 엔진이자 연료가 된 피로사회
9월 17일 월요일 오후 11시. 사무실.
믹스 커피 한 잔을 탔다. 오늘 세 잔째. 이제는 카페인의 힘을 조금 빌어볼 때다. 기사는 다행히 막바지를 향해 가지만, 하지만 여전히 다루지 못한 부분이 많다.
밤이 깊은 지금, 집에 가지 않고 기사를 쓰고 있다. 누가 몇 시까지 기사를 내라고 선을 그은 것은 아니다. 스스로 정한 선을 넘겼기에 조
바심을 내고 있다. 기자는 스스로를 들볶고 있는 중이다. 올해 우리나라에서도 꽤 인기를 끈 철학책으로 한병철 독일 조형예술대 교수가 쓴 ‘피로사회’가 있다. 거기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도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44쪽)
어려워 보이지만 요점은 단순하다. 이렇게 스스로를 들볶는 것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엔진처럼 돌린
다. 연료는 당연히 자기 자신이다. 한 교수는 이를 자신을 소진한다고 해서 ‘소진증후군’이라고 표현했다(비유일 뿐 진짜 병이 아님에 유의).
스스로 주인이자 노예가 돼 자신을 연소시키며 스트레스와 피로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우리는 모두 소진증후군 피해자다. 피로의 원인은, 과학 이전에 사회에 있다. 낮밤을 가리지 않은 채 쉬지 않고 달리는 삶은 과학만으로 구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기사 첫머리에서 피로하다는 트윗 문장을 하나 썼다고 했다. 재미있게도 그 글에 비슷한 직종(방송작가)에 있는 분이 답을 했다. “바로 이럴 때 핫xx 음료를 마시는 모양이네요. 악마에게 혼을 파는 심정으로요.” 농담이었지만 요즘 전국적으로 이런 에너지 음료가 대유행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주로 카페인의 각성 효과에 기대는 이들 음료는 일시적으로 잠을 쫓는 효과를 내지만 몸에 무리를 준다. 말 그대로 몸을 갉아먹는 셈이다. 장기적으로는 피로를 더 불러온다. 하지만 눈 앞의 성과 때문에 눈 꾹 감고 들이킨다. 마치 운동선수가 금지된 약물을 복용하는 ‘도핑’ 같다. 그래서일까. 한병철 교수도 ‘도핑사회’라는 말로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있다.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우리의 결론이 스스로의 몸을 화학적으로 도핑하는 것이라면,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오늘날의 삶은 역설적이다. 실제 우리의 삶과 식생활은 피로를 추구하고 있다. 야밤에 카페인을 타 마시며 못다 이룬 오늘을 만회하기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 있다. 피로를 감수하고, 스트레스를 모른 척하며.
“요즘 사람들이, 시키지 않아도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 많이 시달리는 것 같아요.”(기자)
“네. (그런 분들이) 많이 늘었어요. 다들 일에 대한 부담과 불안이 굉장히 많은 것 같아요. 미래에 대한 불안도 늘었어요. 그 결과가 (피로의 형태로) 몸에도 나타나고요.”(이동환 원장)
자, 이제 당신 이야기를 해보자. 당신의 불안은 무엇인가. 어떤 스트레스를 받는가. 왜 피로한가.
▼관련기사를 계속 보시려면?
Intro. 피로사회 - 우린 왜 아프게 불사르며 살까
Part I. 불안이 몰고 온 현대의 비극, 스트레스
Part II. 스트레스가 남긴 고통스런 흔적, 만성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