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통약 주세요.”
사람들은 약국에 가서 대개 이렇게 말한다. 약의 구체적인 성분은 의사나 약사의 전문 분야지, 내가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의 몸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본인이다. 약사도 개인마다 약에 대한 민감도나 부작용을 잘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증상에 맞게 약을 골라줘도 그 선택에는 한계가 있다.
지난 5월 일반의약품 슈퍼 판매에 관한 약사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올 11월부터 진통제, 소화제, 감기약, 파스 등 사람들이 자주 찾는 24개 일반의약품을 슈퍼에서 살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동안 약국에서 약을 구입하던 모습을 살펴보면 슈퍼 판매 이전에 일반의약품에 대한 인식이 먼저 이뤄져야 할 것 같다.
생리통약 먹고 속이 쓰렸다면
필자가 의과대학을 다니기 전, 생리통이 있으면 약국에 가서 ‘진통제’를 찾았다. 그 때 종종 ‘이부프로펜’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는 약을 받았다. 그런데 먹을 때마다 속쓰림 증상이 나타났다. 필자는 그 이유가 약 성분 때문인 줄도 모르고 생리를 할 때는 속이 쓰리다고 잘못 생각했다.
그렇다고 약사가 약을 잘못 내 준 것은 아니었다. 이부프로펜은 부루펜, 애드빌 등 200여 가지 진통제 제품에 들어가 있는 성분으로 생리통의 1차 선택제제이기 때문이다. 속이 쓰린 이유는 이부프로펜이 통증을 억제하는 방식 때문이다. 이 성분은 우리 몸에 염증을 만드는 콕스(cox)라는 효소를 억제해 통증을 없앤다. 그런데 이 효소가 억제되면 위 점막보호물질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처럼 민감한 사람
은 속이 쓰리기 쉽다.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 같은 질환이 있는 사람이 먹는다면 문제는 더 커질 수 있다.
진통제 식사 전에 먹어도 된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진통제는 특정 부위의 통증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몸전체에 작용한다. 따라서 두통, 근육통, 생리통, 치통 관계없이 약에는 비슷한 성분이 들어있다. 아스피린, 이부프로펜, 아세트아미노펜, 이 3가지가 대표적인 성분이다.
일반적으로 약은 식후에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세트아미노펜은 식사 여부와 상관이 없다. 다른 성분은 앞서 말한 콕스 효소를 억제하지만 아세트아미노펜은 다른 방법으로 통증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진통제에는 카페인이 들어 있는 제품도 있다. 보통 한 알에 커피 한 잔에 들어 있는 것보다 조금 적은 양이 들어 있다. 카페인은 혈관을 수축시키고 통증이 있는 부위의 혈류량을 줄인다. 혈액 속에 있던 통증이나 염증을 일으키는 물질의 양도 줄어들어 진통효과를 낸다.
이처럼 약은 개인 상황에 따라 효과와 부작용이 조금씩 다르다. 어떤 성분의 약이 자신에게 맞는지 평소에 알아둘 필요가 있다. 또 약의 성분을 잘 모르는 탓에 약을 과다 복용하게 되고 이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고열이 날 때 ‘타이레놀’을 먹고 열이 떨어지지 않는다며 다른 해열제인 ‘써스펜’이나 ‘세토펜’ 등을 추가로 먹는 일이 있다. 하지만 세 제품은 모두 약 성분이 같다. 따라서 고열은 해결되지 않고 같은 성분을 과량 복용하면서 새로운 문제가 생기게 된다.
약의 이름과 성분을 모두 기억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자주 찾는 약의 성분과 그 성분이 우리 몸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고 있다면 좀 더 자신에게 맞는 약을 고를 수 있을 것이다.


감기약 먹고 변비에 걸렸다?
감기에 걸릴 때마다 약을 찾는 사람이라면 한 가지 실험을 해 보자. 다음에 감기에 걸리면 약을 먹지 않아보는 것이다. 아마 감기가 낫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을 먹었을 때와 비슷할 것이다. 오히려 더 짧아질지도 모른다. 이유는 감기약의 역할 때문이다. 감기약은 기침이나 가래, 콧물, 고열 등의 증상을 완화시켜 준다. 하지만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를 없애서 감기를 치료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약을 먹고 증상이 나아졌다고 해서 푹 쉬지 않는다면 오히려 감기가 더 악화될 수 있다.
감기약 처방전을 쓰다보면 환자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잠이 오게 하는 성분은 빼달라는 것이다. 사실 푹 자고 쉬는 것이 감기에 좋다. 그러
나 이런 요청을 받으면 1세대 항히스타민제제와 슈도 에페드린 성분은 뺀다. 두 성분은 콧물과 코막힘, 재채기 등을 완화해 주지만 졸립고 몸을 축 쳐지게 한다. 이 때문에 졸음운전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받기도 한다.
감기약을 먹고 나면 입안이 바짝 마르고 소화도 잘 안되며 변비에 걸리는 사람까지 있다. 이유는 슈도 에페드린에 있다. 이 성분은 교감신경을 흥분시켜 염증으로 부은 혈관을 수축시킨다. 덕분에 콧물이 덜 나오는데 이 과정에서 근육도 함께 이완된다. 이 때문에 소화도 잘 되지 않고 장운동도 둔감해져 변비가 생기는 것이다. 침을 내보내는 근육도 함께 늘어져 입 안이 마르는 것이다. 감기약도 진통제와 마찬가지로 성분은 같은데 이름이 다른 약들이 무수히 많다. 빈속에 먹어도 괜찮은 약도 많이 있다. 경험에 따라 나에게 알맞은 약을 찾아보자.



소화제 속을 더 불편하게 만들기도
속이 더부룩해 소화제를 먹었는데 오히려 증상이 더 나빠지거나 복통이 심해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또 제산제를 먹고 설사나 변비로 고생한 독자도 있을 것이다. 소화제를 오래 복용했다가 의도치 않게 눈을 깜빡이거나 입맛을 다시고, 얼굴을 찌푸리는 만발성 운동장애를 경험해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날까.
더부룩함이나 복통 등의 위장장애는 위장의 운동 속도나 소화효소의 양에 이상이 생길 때 나타난다. 따라서 배가 아프거나 불편할 땐 진통제보다는 소화제나 제산제, 변비약, 지사제, 진경제, 정장제 등 소화기관에 작용하는 약을 먹는 것이 좋다.
문제는 가장 흔하게 먹는 약이면서도 증상과 원인에 맞지 않게 복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배가 아픈 것은 장운동이 너무 활발해서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너무 느려서일 수도 있다. 그런데 TV광고에서 배가 아프면 무조건 자사의 제품을 먹으라고 하니 무작정 따라하면 오히려 먹고 나서 복통이 더 심해질 수도 있다.
제산제는 속이 쓰릴 때마다 먹곤 하는데 대체로 위에서 위산 분비를 담당하는 세포에 작용한다. 위산 분비를 줄여주거나 이미 분비된 위산을 중화시켜준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복용하면 마그네슘이 포함된 제산제는 설사를, 알루미늄이 포함된 제산제는 변비나 소화불량을 일으킬 수 있다. 마그네슘을 과량 복용하면 장 내부에 삼투압이 증가한다. 장에서 몸으로 수분이 이동하지 못하고 많은 양의 수분이 대변과 함
께 배출된다. 이 때문에 마그네슘은 변비 치료제로도 쓰인다.
위장운동을 촉진시켜주는 메토클로프라마이드라는 성분은 여러가지 소화제에 포함돼 있다. 오래 복용하면 앞서 설명한 만발성 운동장애가 나타날 수 있다. 다른 성분과 달리 크기가 매우 작은 지용성 성분이어서 뇌를 감싸고 있는 혈관을 통과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소화가 잘 안될 때 습관적으로 탄산음료를 마시거나 속이 쓰릴 때 우유를 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탄산음료는 마시는 즉시 청량감을 주지만, 습관적으로 마시면 소화를 방해할 수 있다. 우유를 마시면 바로 위산이 분비돼 속쓰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에너지드링크 피로를 풀어주진 않는다
시험 기간, 피로를 풀기 위해 에너지드링크를 마셨는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 여러 병 마셔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당연한 결과다. 에너지 드링크의 주성분은 타우린과 카페인이다. 타우린은 아미노산으로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서 ‘피로 회복’이라는 말의 뜻을 잘 생각해 봐야 한다.
타우린은 정맥을 통해 간으로 들어온 젖산 등 피로물질의 분해를 촉진한다. 또 체내의 콜레스테롤을 낮추어 성인병 예방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타우린이 바로 피로를 풀어주는 것은 아니다. 또 타우린을 복용한다고 해서 잠이 깬다거나, 그날 잠을 못 이루게 되는 일은 없다. 각성 효과는 타우린이 아니라 카페인 성분 때문에 생긴다. 보통 에너지드링크에 들어 있는 카페인의 양은 30~80mg 사이다. 커피 한잔에 들어 있는 카페인 50~120mg보다도 적다. 커피를 아무리 마셔도 잠이 안 깬다는 사람이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고 바로 잠이 깬다면, 그건 플라시보 효과가 더 크지 않을까 싶다.
오히려 잠을 달아나게 하고 싶어 에너지드링크를 장기적으로 복용하면 카페인에 내성이 생겨 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없다. 하루에 너무 많은 양의 카페인을 먹는 것도 문제다.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는 카페인의 일일 최대 섭취량을 성인은 400mg, 임산부는 300mg로 권고하고 있다. 이 이상 마시면 카페인 중독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내가 오늘 카페인을 얼마나 먹었는지 알고 싶다면 에너지드링크뿐만 아니라 카페인이 들어있는 커피, 초콜릿, 콜라, 홍차, 녹차 등의 음식, 그리고 카페인 성분이 포함된 진통제까지 모두 합쳐서 계산해 보자.
약 충돌 같이 먹으면 몸이 상할 수 있다
간혹 전립선 환자 중에 감기약을 먹고 응급실에 실려 오는 경우가 있다. 전립선 치료약은 방광의 평활근에 작용하는 교감신경 길항제인데 코 감기약에 들어있는 슈도 에페드린도 교감신경에 작용한다. 이 때문에 길항작용이 무너지면서 전립선 환자들이 소변을 못 보게 된다. 전립선 치료에 맞춰 조절되던 교감신경이 슈도 에페드린에 의해 흥분되면서 방광 근육이 이완돼 소변을 내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갑상선 약 역시 교감신경 길항제로 코 감기약과 함께 먹으면 기능이 충돌한다.
이렇게 약 중에는 같이 복용하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특히 혈압약, 갑상선약, 심장약, 우울증약, 전립선약 등을 복용하는 사람들이 코 감기약을 먹으면 원래의 증상이 더 악화되거나 감기약의 부작용이 심해질 수 있다. 수면제와 코 감기약을 같이 먹는 것도 위험하다. 또 우울증약과 수면제에는 근육을 이완시키는 성분이 들어 있는데 여기에 슈도 에페드린이 더해지면 축 늘어지는 것 이상의 무기력함이 나타난다.
일반의약품을 찾게 되는 증상들은 대개 일상적인 문제에서 시작한다. 스트레스 없이, 매일 규칙적인 식사를 하고, 적당히 운동하고, 기분좋은 생활을 한다면 ‘아픈’ 일은 지금보다 훨씬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고 약을 찾게 된다. 약을 반복적으로 먹는 사람들은 생활 패턴을 바꾸지 못하면 약을 먹는 패턴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어떤 불편한 증상을 느끼고 약을 찾게 될 때, 내 생활의 어떤 부분이 이런 증상을 만들어 내는지 조금만 관심을 갖고 관찰해 보자. 더 효율적으로 증상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반복적으로 복용하는 약만이라도 이름과 성분 그리고 나에게 어떤 효과와 부작용이 있는지 기억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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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사람 살리는 약, 사람 잡는 약
Part 1. 사전피임약 VS 사후피임약
Part 2. 감기약 먹었는데 왜 변비가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