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전압 투과전자현미경(HVEM)은 아파트 4층 높이인 14.5m의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큰 덩치에서 강력한 전자빔을 물체에 투과시켜 반도체나 세포 속의 원자 구조까지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공 모양의 물체에 전통 가옥에서 보던 육각형 문양이 새겨져 있다. 파란 이파리 사이로 노란 꽃이 예쁘게 피어있다. 추상화 같은 사진의 정체는 놀랍게도 ‘우두바이러스’의 껍질이다. 우두는 소의 몸에 돋아 고름이 나게 하는 피부 질병이다.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이하 기초연)에서 우두바이러스를 연구하는 이유는 뭘까. 현재경 선임연구원은 “우두바이러스는 마마바이러스와 같은 바이러스 집단에 속해 있으며 구조 역시 비슷하다”며 “우두바이러스의 구조를 알면 마마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의 치료법을 개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마마? 예상대로 마마는 옛날 어린이들이 무서워했다는 ‘호환마마’의 그 ‘마마’다. 호랑이에게 당하는 변인 호환과 천연두를 가리키는 마마는 선조들에게 피할 수 없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다행히 1796년 영국의 의학자 에드워드 제너가 우두를 이용한 천연두 예방법( 우두법 )을 개발한 뒤, 천연두는 1977년을 마지막으로 지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미국과 러시아에서 천연두 바이러스를 보관하고 있어 미생물 테러의 위협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또 다른 종의 마마바이러스가 전염병을 일으키고 있는 탓에 관련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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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백질의 3차원 구조, 원자 수준까지 보인다
마마바이러스는 껍질 단백질이 변질되면 전염성이 억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슷하게 생긴 우두바이러스를 이용하면 껍질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기초연 연구진은 전자결정학 기법을 통해 우두바이러스 껍질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얻을 수 있었다. 연구진은 먼저 유전자조작 기술을 이용해 우두바이러스의 껍질 단백질을 생산했다. 대장균의 플라스미드라는 고리 모양의 유전자에 껍질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를 끼워 넣은 뒤 배양했다. 이렇게 만든 단백질이 가득 들어있는 용액 위에 얇은 지방막을 올려두면 단백질과 지방막 표면이 상호작용하면서 2차원 결정체를 만들 수 있다.
다음으로 2차원 결정체를 투과전자현미경(TEM)에 넣고 사진을 찍는다. 투과전자현미경은 시료에 전자를 투과시켜 형광판에 맺힌 영상을 보는 장치다. 위쪽에 달린 전자총에서 쏜 전자빔은 진공 상태에서 높은 전압을 지나면서 가속돼 고에너지 상태로 전자렌즈를 통과한다. 전자렌즈는 자기장을 이용해 전자빔을 한 줄기로 모은다. 전자빔의 에너지가 높을수록 파장이 짧아져 더 작은 물체를 관찰할 수 있다. 기초연에 있는 초고전압 투과전자현미경(HVEM)은 1300kV의 전압으로 전자빔을 가속시킬 수 있어 원자 사이의 간격에 해당하는 0.12nm(나노미터, 10억분의 1m) 크기도 구별할 수 있다.
단백질의 모습을 찍은 사진 여러 장을 합성하고 평균 모습으로 만든 뒤, 단백질의 회절 패턴을 고려해 보정하면 3차원 구조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이처럼 초고전압 투과전자현미경을 이용하면 물질의 3차원 구조를 원자 수준까지 분석할 수 있다.
생체 현상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외부 충격으로 인한 기억상실증이 반전을 위한 소재로 자주 활용된다. 너무 진부하다는 의견 때문일까, 최근에는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이 극의 전개를 바꿔 놓고 있다.
알츠하이머병은 ‘베타 아밀로이드’라는 작은 독성 단백질이 대뇌에 쌓이면서 시작된다. 이 때문에 세포에서 호흡을 담당하는 미토콘드리아의 구조가 변하면서 뇌세포가 손상돼 일어나는 병이다. 권희석 선임연구원은 “지금까지 알츠하이머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방법이 꾸준히 연구되고 있지만 뇌세포가 파괴되는 과정이나 죽은 상태에 대한 구조적 연구는 부족했다”고 말했다.
기초연은 다양한 장치를 활용해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생쥐에서 일어나는 뇌세포의 구조 변화를 관찰하는 데 성공했다. 연구진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생쥐의 뇌 일부분을 잘라 ‘고압동결고정장치’에서 동결 고정시켰다.
생체 시료의 구조를 정밀하게 분석하려면 상온에서 일어나는 부패나 화학적 변화를 막기 위해 ‘고정’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포르말린처럼 박제를 만들 때 활용되는 화학약품을 쓰면 단백질이 약품과 반응해 구조나 형태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연구진은 영하 196℃, 2000기압이 넘는 고압에서 순간적으로 동결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시료 안에 들어있는 수분이 결정으로 변하는 것도 막을 수 있어 거의 원상태 그대로 고정시킬 수 있다.
고정된 시료는 ‘초박절편기’라는 장치로 잘라 깨끗한 단면을 얻는다. 이 장치는 생체 시료를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크기로 잘라주는 나노가공장비다. 생쥐의 뇌세포를 관찰할 때는 시료를 50~100nm 두께로 만든다.
이 세포의 3차원 구조를 분석하려면 전자단층촬영(ET)기법을 쓴다. 잘 알려진 CT(컴퓨터단층촬영)처럼 단층 사진을 여러 장 찍은 다음, 합성해 3차원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차이점이라면 CT는 환자가 장비 안에 들어간 뒤 장비안의 빔이 돌면서 사진을 찍지만, ET는 시료를 돌려가며 사진을 찍는다. 높이 14.5m에 무게가 자그마치 340t이나 나가는 HVEM의 거대한 전자빔을 돌리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시료를 1~2도씩 돌려가며 사진을 찍는데 HVEM은 좌우로 60도까지, 일반 바이오 TEM은 70도까지 시료를 움직일 수 있다.
연구진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생쥐의 뇌세포를 분석한 결과, 미토콘드리아의 대부분이 손상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미토콘드리아는 한정된 공간에서 면적을 최대로 넓히기 위해 ‘크리스테’라는 주름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면 이 부분에 파괴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과학자와 기술자 협력으로 바이오 이미징 기술 나날이 발전”
생명 현상을 연구할 때면 광학현미경과 전자현미경이 늘 함께 쓰인다. 광학현미경으로 관찰하다가 특이한 생명 현상을 발견하면 전자현미경을 이용해 정확하게 확인하는 식이다. 문제는 광학현미경에서 관찰하던 시료를 전자현미경에서 그대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광학현미경은 빛의 회절 현상 때문에 200nm 이하의 물체는 구분하기 힘들다. 반면에 전자현미경은 시료를 두껍게 만들면 전자가 투과하지 못해 관찰이 불가능하다. 결국 광학현미경으로 보던 시료를 전자현미경에서 보려면 얇게 가공해 또 다른 시료를 만들어야 한다. 두 현미경으로 같은 시료의 동일한 부분을 관찰할 수 없다는 뜻이다.
기초연은 두 현미경에서 같은 부분을 관찰할 수 있는 상관현미경 기법을 개발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원자에서 세포 수준까지 동시에 고해상도로 볼 수 있는 현미경 시스템도 구축할 예정이다.
이석훈 전자현미경연구부장은 “기초연에는 HVEM을 비롯한 대형연구장비들이 모여 있어 생명이나 물성과학 분야의 다양한 이미징 연구가 가능하다”며 “연구장비개발 부서가 협조 속에 연구에 필요한 장비를 개발하고, 장비의 특성을 잘 아는 전문가들이 새로운 연구 기법을 제안하는 등 협력 시스템이 잘 갖춰져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