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② 변신의 명수 바이러스 퇴치 최전선

에이즈 무력화는 성공, 근절은 어려워

바이러스는 변신의 명수다. 치료제를 개발했다 싶으면 재빠르게 새로운 형태로 스스로를 변환시킨다. 에이즈를 퇴치하지 못하는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단계 바이러스 치료책은 어디까지 개발됐을까.

 


최근 ‘바이러스’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CIH(일명 체르노빌 바이러스)나 트로이 목마와 같이 컴퓨터와 관련된 바이러스들이다. 중요한 데이터가 저장돼 있는 하드디스크를 망가뜨리고 값비싼 컴퓨터를 고철덩어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매우 순간적이다.

흥미롭게도 컴퓨터 바이러스는 실제 자연계에 존재하는 바이러스와 여러가지 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자신만의 능력으로 스스로를 복제하지 못하고 다른 파일(생물체)의 도움을 얻어야만 복제가 가능한 점, 그리고 다른 개체로의 전염성 등 그 기본적인 특성을 공유한다.

컴퓨터 바이러스와 유사

치료 방법도 비슷하다. 컴퓨터에서 어떤 파일에 무해한 바이러스로 예방접종을 시행하면 유해한 바이러스는 파일이 이미 감염된 줄 착각하고 감염시키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인체에서의 전략 역시 백신을 개발하고 예방접종을 시행해 질병을 예방한다. 단지 감염대상이 컴퓨터인지 또는 생물인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컴퓨터 바이러스가 그 종류에 따라 감염시키는 파일이 다르듯이 자연계에 존재하는 바이러스도 감염시키는 생물의 종류가 다르다. 또한 그 병원성이 다양해 평생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어도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종이 있는 반면, 사람에 감염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도 있다.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영화 ‘아웃브레이크’를 보면 바이러스의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아프리카의 작은 마을에서 치명적인 출혈열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이 변종 바이러스가 원숭이를 통해 미국 내 한 마을에 순식간에 퍼진다. 이렇게 다수의 생명을 위협하자, 미국 정부가 그 마을에 핵폭탄을 터뜨리기로 결정하고, 핵폭탄 투여 직전 더스틴 호프만이 극적으로 숙주(원숭이)를 찾아 치료제를 개발한다는 줄거리다.

이것이 과연 공상과학 소설에서만 가능한 시나리오일까? 여러가지 소설적인 면이 있지만, ‘아웃브레이크’는 실제로 1976년 아프리카 자이레에서 출현해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간 에볼라 바이러스를 소재로 삼았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에이즈 바이러스(HIV)와 마찬가지로, 원숭이에게는 해가 없지만 사람에 감염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원숭이는 진화하면서 이 바이러스들에 대해 면역체계를 발달시켜 왔지만 사람은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는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대체로 ‘숙주 특이성’이 있다. 즉 특정 숙주에만 감염되고, 그 숙주는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체계를 발달시킨다. 그러나 변종이 발생하거나 우연한 이유로 다른 종에 감염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에볼라 바이러스 외에도 동물에서 인체로 종간(cross-species) 감염을 일으키면서 핵폭탄보다 더 큰 파괴력으로 인류의 삶 자체를 위협하는 바이러스가 여러가지 등장하고 있다. 역시 아프리카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마버그 바이러스, 라사열 바이러스, 최근 인도네시아에서 치명적인 뇌염을 일으키는 신종 바이러스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바이러스가 그 위세를 떨치며 점차 인간 세계로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는 반면 인간은 아직 적절한 대책없이 무력하게 쓰러져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많은 항균제가 개발되면서 세균 감염질환의 치료는 매우 향상돼 왔지만, 여기에 비하면 바이러스 감염질환의 치료는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곤하면 입가에 물집 생기는 이유

세균은 성장과 증식 과정에서 숙주 세포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대사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세균에만 특이적으로 독성 작용을 나타내는 약제를 개발하기 쉽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숙주 세포 내에서만 살 수 있다. 즉 숙주 세포에는 독성이 없이 바이러스에만 특이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항바이러스제의 개발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바이러스에만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약제를 개발하는 것이 현단계 과학자들의 연구 방향이다. 가장 기본적인 목표는 바이러스가 수행하는 여러 단계의 복제과정에서 각 단계를 차단하는 일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피곤하거나 열병을 앓고 난 후, 입 주위에 생기는 물집은 헤르페스 바이러스에 의한 질환이다. 이 바이러스의 특징은 몸 안에 잠복해 있다가 피로한 순간을 타서 가끔 재발한다는 점이다.

1970년대에 헤르페스 바이러스 감염을 치료하기 위해 약제(이독슈리딘과 비다라빈)가 개발됐지만 독성이 너무 강해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그 후에 개발된 약제가 아시클로버다. 아시클로버는 헤르페스 바이러스의 유전자 복제 과정을 억제한다. 즉 DNA를 만드는 효소의 작용을 억제함으로써 효과를 발휘한다.

그렇다면 이 약제는 바이러스뿐 아니라 인체 세포의 유전자 복제 과정도 억제할 수 있다. 하지만 비교적 이런 부작용이 적어 현재 널리 이용되고 있다. 아시클로버는 바르는 연고, 먹는 약, 주사용 약제처럼 다양한 형태로 시판되고 있다.

그러나 결점이 있다.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하는 효과만 발휘할 뿐 잠복해 있는 바이러스까지 퇴치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밤을 새워 시험 공부를 해서 심신이 매우 피곤해질 때 입에 다시 물집이 생기는 현상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아시클로버의 효과에 힌트를 얻어 새로운 치료제가 활발히 개발되기 시작했다. 20세기 흑사병으로 알려진 에이즈 치료제 역시 마찬가지다. 1980년대 중반에 최초의 에이즈 치료제인 지도부딘이 개발됐다. 바이러스가 감염됐다 해도 발병되기 까지의 기간을 지연시키는 효과가 발휘됐다.

하지만 항바이러스제 개발에는 커다란 걸림돌이 있다. 바로 영화 ‘아웃브레이크’에 나온 바이러스처럼 돌연변이를 쉽게 일으킨다는 점이다. 항바이러스제를 개발해 사용하기 시작하면 바이러스는 그 약제의 효과를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변이를 일으킨다.

지도부딘도 개발 당시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나, 곧 에이즈 바이러스가 내성을 획득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선진국에서는 에이즈를 정복하기 위해 많은 연구비를 들여가며 신약을 개발해 오고 있다. 그러나 새로 개발된 에이즈 치료제를 환자에게 투여하기 시작하면 에이즈 바이러스는 빠른 속도로 그 약에 듣지 않도록 변이를 일으켜서 치료제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다.

1990년대에는 바이러스가 내성을 갖도록 변하기 못하게 몇가지 약제를 같이 투여하는 병합요법이 시작됐다. 이 방법을 통해 미국의 농구 스타 매직 존슨의 에이즈가 완치됐다고 성급하게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현재의 에이즈 치료제는 바이러스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더이상 자신을 복제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 인체에 침입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사건 현장에서 조사단은 최첨단 방호복을 입어야 했다.


백신 개발에 주력

바이러스 감염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돌연변이에 대한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이 시급하다. 즉 돌연변이를 미리 예측해서 변종이 나타나기 전에 치료제를 개발하는 일이다. 아직 가시적인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독종 바이러스를 근절시키는 근본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많은 과학자가 여기에 매달리고 있다.

치료가 어렵다면 최선의 방책은 예방이다. 즉 바이러스가 몸에 침입해도 여기에 저항할 수 있는 면역 시스템을 인체에 갖추는 일이다.

원리는 간단하다. 바이러스 또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숙주 세포(항원)에서 미리 병원성을 제거해 만든 백신을 인체에 직접 주입한다. 이때 몸에서는 항원에 대항하는 항체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해도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진다.

바이러스 백신의 발달은 20세기 과학의 두드러진 진보 가운데 하나다. 바이러스 질환인 천연두가 지구에서 퇴치된 것도 성공적인 예방접종의 결과다. 현재 예방접종이 효과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바이러스 질환으로는 홍역, 풍진, 유행성 이하선염, 소아마비, 일본뇌염, 인플루엔자, B형 간염, 광견병 등이 있다. 머지 않은 시기에 소아마비도 근절될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에는 분자생물학의 성과가 백신 제조에 이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항원을 만드는 유전자를 비병원성 바이러스의 유전자에 삽입시켜 백신을 만들 수 있다. 또 바이러스 유전자를 세포배양시스템을 통해 대량으로 복제하고, 이를 항원으로 사용해 백신을 만들 수도 있다. 현재 B형 간염 바이러스 백신의 일부가 이 방법으로 제조되고 있다.

한편 바이러스의 종류에 따라 인체에서 감염되는 장소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감기의 원인인 라이노 바이러스, 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설사병을 일으키는 로타 바이러스는 주로 점막에서 증식한다. 따라서 인체의 다른 곳보다 바로 점막에서 주로 형성되는 항체를 만들도록 백신을 개발해야 한다. 다른 예로 소아마비나 간염, 홍역의 경우 혈액 내의 항체가 더욱 효과적이다.

에이즈 백신은 어디까지 개발됐을까. 현재 건강한 사람에게 투여하는 백신과 함께 이미 감염된 사람이라도 발병되지 않도록 작용하는 백신이 개발되고 있다. 물론 백신이 병원성을 가지는 형태로 변형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백신을 투여하는 일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 몇년 전 미국의 한 의사가 백신을 자신과 자원자에게 투여하겠다고 밝혔을 때 언론의 큰 관심을 끈 이유도 이것이다. 현재 건강한 사람에게 투여했을 때 면역 반응이 성공적으로 유도된 사례가 보고된 상태다.


에이즈 치료약으로 에이즈 바이러스의 모양을 만든 장면. 현재 에이즈 증세를 누그러뜨릴 약은 개발됐지만 근절까지는 어려운 형편이다.


실험할 동물 찾기 어려워

하지만 에이즈 바이러스가 쉽게 변이를 일으킨다는 점은 백신 개발에 중요한 장애 요인이다. 또 인간처럼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수성이 뛰어난 동물 모델이 없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예를 들어 침팬지는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해도 사람처럼 면역 기능이 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개발된 백신을 사람에게 시도하기 전에 안전성과 유용성을 검증할 동물 실험에 어려움이 따른다.

에이즈를 비롯한 난치성 바이러스 질환의 치료와 예방에 아직 풀어야 할 과제가 많이 남아 있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치사율이 매우 높아서 감염되면 며칠 내에 생명을 잃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탓에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는 정도가 약하다. 이에 비해 에이즈 바이러스는 빠른 속도로 전염이 되고 있지만 발병하기까지 몇년 이상의 잠복 기간을 가진다. 바이러스의 이런 특성들을 하나하나 밝히고 최대한 활용해 예방과 치료책을 찾아나간다면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시간이 머지 않아 다가올 것이다.


원숭이는 에이즈와 에볼라 연구에 상요되는 좋은 실험동물이다. 원숭이는 이들 바이러스에 감염돼도 사망하지 않는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1999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백경란 교수

🎓️ 진로 추천

  • 생명과학·생명공학
  • 의학
  • 약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