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신, 의식, 마음. 우리가 자주 쓰는 단어다. 몸과 구별되는 비물질적인 존재면서도 우리 몸을 움직이는 주체다. 그렇다면 과연 정신은 어디에 있는 걸까. 오늘날에는 정신이 뇌의 활동으로 생긴다고 여기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의 뇌처럼 작동하는 인공 뇌를 만들면 거기에도 자연스럽게 정신이 생길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정신 없는 기계에 머물고 말 것인가.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예전부터 정신과 몸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져 왔다. 기원전 200년 무렵 그리스의 해부학자이며 의사였던 갈레노스는 우리 몸의 운동은 근육에 연결된 희끄무레한 줄, 즉 바로 신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 줄을 통해 혼백 또는 심령이 근육으로 전달되면 근육이 부풀어 몸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런 생기론은 1900년대에 신경계의 작용이 밝혀질 때까지 정설로 인정받았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생기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모닥불 옆에 있다가 뜨거운 불똥이 다리에 튀면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치우게 된다. 데카르트는 이와 같은 동작이 불의 미립자가 우리 몸을 변화시켜 내부에 있던 생기를 신경을 통해 근육에 흘려보내 운동을 일으켜 생긴다고 설명했다.
비슷한 시기의 네덜란드 생물학자 얀 스왐머담은 신경이 붙어 있는 개구리 다리를 떼어내 유리관에 넣고, 근육이 움직일 때 부피가 변하는지 실험했다. 그는 이 실험으로 근육이 움직이려면 혼백이 있어야 한다는 생기론이 틀렸음을 증명했다. 실험 결과 근육이 움직여도 부피는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즉, 혼백처럼 외부에서 유입되는 물질이 없다는 뜻이다. 19세기에는 독일의 생리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츠가 신경의 운동신호 전달 속도를 측정했다.
현대에 와서 뇌의 모든 작용은 뉴런의 이온채널에 의한 작용이라는 게 밝혀졌다. 뉴런 외부와 내부에 있는 여러 이온의 농도 차이로 세포막은 -70mV의 전압 차이를 유지한다. 그러다가 외부의 자극이 들어오면 세포막에 붙어 있는 이온채널이 표면을 따라서 순서대로 열리고 닫히면서 전기신호가 발생하고 전달된다. 신경계는 이런 신호에 의해 작동된다.
1863년 프랑스 해부학자 폴 브로카는 전두엽의 특정 부위가 손상된 환자는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1874년 독일의 의사인 칼 베르니케는 좌측 측두엽의 특정 부위가 손상되면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런 연구 결과 이후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뇌의 여러 부위가 어떤 기능을 담당하는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최근 신경계에 관한 연구를 돌아보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으로 옮기는지를 곧 밝힐 수 있다는 기대를 하기 쉽다. 게다가 요즘에는 컴퓨터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많이 대신하며, 일부 역할에서는 인간보다 뛰어난 기능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신경계 혹은 전자회로를 바탕으로 마음이 어떻게 신체를 움직이는지 설명할 수 있을까. 궁극적으로 인공 뇌는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근본적 질문에 먼저 대답해야 한다. 우리는 마음의 정신 작용을 신경계나 반도체 칩과 같은 물질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현재 우리는 정신 작용이 모두 뇌의 물질 작용에 의해 이뤄진다고 인정한다. 그럼에도 세계적으로 저명한 철학자들은 물론 저명한 인공지능 연구자 중 많은 이들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어 아무리 뇌과학과 컴퓨터 과학을 발전시켜도 물질로 정신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 마음은 생각하는 능력, 즉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이 있다. 철학자들은 이를 ‘지향성’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미래에 아무리 고도로 발달한 컴퓨터를 만들더라도 인간이 만든 프로그램에 따라 작동한다면 그것이 지향성을 갖는다고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뇌과학 연구와 컴퓨터공학은 정신 작용을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 마음에는 무엇을 하려는 의도가 있다. 철학자들은 이를 ‘자유의지’라고 부른다.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컴퓨터는 도덕적 의지에 의해 작동한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뇌과학과 컴퓨터 연구로 정신 작용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아주 결정적인 반론은 컴퓨터에 관심이 많은 연구자에게서 나온다. 이 주장을 ‘기능주의’라고 부른다. 마음의 기능은 뇌나 컴퓨터의 물리 장치와 구별되므로 물리적 장치에 대한 연구가 정신적 기능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증들은 모두 순환 구조로 전제가 증명하려는 결론을 포함한다. 따라서 이런 논증은 정신을 물질로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을 증명하지 못한다.
현대 철학에서는 이런 질문을 “마음의 작용을 물질로 환원 가능한가?”라고 표현한다. 어떤 현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인지는 자신의 이론적 개념체계 내에서 인정된다. 따라서 마음이 물질로 환원되느냐는 마음을 인정하는 이론의 개념체계를 뇌과학과 전자공학 이론의 개념체계로 설명할 수 있는지에 달린 문제다.
철학자 처칠랜드 부부는 신경과학을 연구하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마음의 기능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간질병이 악마가 깃들어 생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 신경과학에서는 대뇌피질의 외측억제가 정상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설명한다. 또한, 남자 아기가 임신 중에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의 영향을 받으면 뇌가 여성의 뇌 구조로 발달하게 되며, 나중에 자란 뒤에는 동성애자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을 신경과학으로 설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자아’도 마찬가지다. 현대 신경생물학의 관점에서 자아란 하나의 표상이며, 표상이란 뇌 속에 있는 뉴런 집단의 활동패턴이다. 우리 주위의 여러 감각 정보에 반응하는 활동패턴을 포괄하는 패턴이 있다면 우리는 그 패턴을 어떤 대상에 관련시킬 수 있다. 이런 가정을 확장하면 우리는 자신과 관련된 수많은 정보에 대응하는 활동패턴들을 포괄하는 패턴을 추상적 개념인 자아와 관련시킬 수 있다.


물질에 기반을 두지 않은 영혼이 있을까. 이 물음은 오랜 예전부터 철학자들의 숙제였다. 오늘날에는 우리의 정신이 뇌의 전기화학적 작용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뇌는 여전히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인공 뇌의 인권도 인정할까
물론 우리는 아직 의식, 의지 등이 무엇인지 신경과학으로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여러 세부 분야에 걸쳐서 신경과학자들은 신경계 어느 영역의 장애가 의식에 영향을 주고, 정서에 영향을 주는지 활발히 연구하고 있다. 앞으로 밝혀질 이러한 연구 결과는 정신에 대해 지금까지 인류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설명을 내놓을 전망이다.
이 중에는 인공지능에 관한 것도 있다. 뇌를 인공적으로 만들려는 시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과 구별할 수 없는 인공지능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도 미래의 인공지능을 가능하게 할 이론적 배경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당장은 사람 모습을 하고 사람처럼 생활하는 로봇이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군사용 무인정찰기, 무인자동차처럼 당분간은 특정 기능을 담당하는 인공지능이 주로 쓰일 전망이다. 엄밀히 따지면 인공지능이라기보다는 요즘 유행하는 스마트 제품이다.
물론 종국에는 SF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인공 뇌를 가지고 사람처럼 생각하는 로봇도 등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을 기계로 대해야 할까, 아니면 사람과 똑같이 대해야 할까. 사람처럼 대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그래야 할까. 인공지능의 인권도 존중해야 할까. 더 나아가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뛰어난 판단력을 지니고 있고, 우리가 그들의 조언을 얻는 수준에 이를 수도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우리는 인공지능에게 우리 사회의 운영을 맡겨도 좋을까. 인공 뇌가 완성돼 인공지능이 널리 퍼진다면 이와 같은 다양한 고민거리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아직 우리는 의식이 무엇인지 신경과학으로 명확히 설명하지도 인공적으로 의식을 만들지도 못한다. 그런 문제를 두고 고민하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신경과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여러 분야에 걸쳐서 신경계가 어떻게 정신에 영향을 주는지 연구하고 있다.
쿤에 따르면, 하나의 패러다임 아래에서 중요했던 문제가 다른 패러다임 아래에서는 문제로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앞으로 다가올 뇌과학 연구의 성과에 따라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면 용어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 지금까지 의문으로 여겨온 문제 또한 문제가 아니게 될 수 있다.
“마음 혹은 정신을 물질로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새롭게 등장할 뇌과학의 연구에 따라서 무의미한 질문이 될 수도 있다. 뉴턴의 역학 체계 내에서 물체가 갖는 고유한 성질로서의 질량이 아인슈타인의 체계 내에서는 에너지로 바뀔 수 있는 질량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이처럼 우리 후손은 당연히 마음은 물질이고 인공 뇌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혹은 먼 미래에 우리는 지금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관점에서 정신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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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인공 뇌
Part1. 뇌 vs 컴퓨터
Part2. 인공 뇌 만들기
Part3. 뇌보다 똑똑한 인공 뇌
Part4. 인공 뇌에도 마음이 있을까
Part5. 이사하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