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PARTⅠ 소립자·생화학·면역학 단골 수상

80년대 수상자와 연구의 흐름

고온초전도현상발견(87년) 단백질자동합성(84년) 옥수수 전이유전자발견(83년) 등이 80년대 노벨상 과학부문의 돌출 사건이었다.

지난 10년간(1980~89년) 과학부문의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12개국 61명에 이른다. 나라별로는 미국 35명, 독일 8명, 영국 4명, 프랑스 3명, 이탈리아 스웨덴 일본 스위스가 2명씩 그리고 캐나다 네덜란드 아르헨티나가 각각 1명씩이다.

알프레드 베른하르트 노벨의 유언에 따라 '가장 많은 이익을 인류에게 공헌한 사람에게 준다'는 노벨상의 부문별 수상업적내용을 보면 70년대까지 물리학부문에서는 무선 X선 전자분야에서 가장 많은 수상자를 배출했고, 화학부문은 생화학 그리고 의학 생리학 부문에서는 신경조직과 유전자 및 분자생물학 분야에서 많은 수상자가 탄생했다. 그중에서도 50년대까지는 물리학의 양자론분야에서 가장 많은 수상자를 냈으나 60년대이래 유전자 분자생물학분야가 두드러지고 있다. 그래서 분자생물학 같은 새로운 분야의 과학은 노벨상 덕택으로 빠른 성장을 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고온초전도의 돌풍

80년대 물리학부문 수상대상에서는 80년의 '중성K 중간자의 붕괴에서 기본적 대칭법칙이 무너지는 것의 발견'(제임스 크로닌과 발 피치<;미국>;)을 비롯하여 84년의 'W Z˚입자발견에 대한 공헌'(카를로 루비아<;이탈리아>; 반 데미르<;네덜란드>;)에서 88년의 '중성미자의 발견을 통한 경입자의 2중구조 해명으로 물질의 기본구조와 우주생성이론의 규명에 이바지한 공로(잭 스타인버거, 멜빈 슈바르츠 및 레온 레더먼<;미국>;)에 이르기까지 소립자관련연구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오늘의 소립자물리학자들은 소립자의 세계로 파고 들어 가서 물질의 기본구조는 물론 우주탄생과 진화 그리고 사멸을 규명하면서 마이크로(미시)와 매크로(거시)의 세계를 함께 섭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87년도 수상대상이 된 요하네스 베르노르츠(독일)와 칼 뮐러(스위스)의 '세라믹 물질에서의 초전도현상발견'은 고온초전도재료개발의 열풍을 몰고와 온 세계 과학계를 들끓게 만들었다. 이 연구는 적어도 전기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에서 미국과 일본은 국책사업으로 채택하기에 이르렀고 그 뜨거운 열기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초전도열풍을 몰고온 베르노르츠(왼쪽)과 뮐러(87년 물리학상)

앞서 가는 핵산연구

1980년대 화학부문 수상대상의 특징가운데 하나는 여전히 생화학분야의 연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80년에는 '핵산의 생화학적연구 및 핵산의 기본구조결정'(폴 버그, 월터 길버트<;미국>; 프레드릭 생거<;영국>;) 82년의 '결정전자 현미경검사법개발과 핵산단백질 복합물질구조의 규명'(A.크루그<;영국>;), 84년의 '단백질 펩티드 대량생산법의 개발'(브루스 메리필드<;미국>;), 87년의 '천연단백질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단순한 화합물의 합성'(도널드 크램, 찰스 피터센<;미국>; 장 마리에 랑<;프랑스>;) 그리고 89년의 '리보 핵산의 촉매특성발견'(알트먼 체크(미국))등의 업적이 수상했다.
역경을 이겨낸 입지전적 과학자 메리필드(오른쪽 84년 화학상)
 
그런데 84년도 노벨화학상 수상자는 좀 뜻밖이라는 학계의 반응이었다. 종래의 노벨화학상은 거의가 이론적인 분야의 업적에만 주어졌으나 단백질자동합성의 길을 연 메리필드(록펠러대학)의 업적은 실용적으로 큰 의의를 갖는 기술적인 업적으로 분류되는 성질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왕립아카데미도 '이 방법은 새로운 의약품의 개발이나 유전공학에서 중요한 실용성을 갖고 있다'고 밝히면서 이런 점을 시인했다. 그러나 가난한 가구행상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시절 40개의 학교를 전전하는 역경을 이겨 내고 끝내는 세계 과학계정상에 오른 메리필드의 감격적인 성공담은 어려운 처지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었다.

85년도 노벨화학상 공동수상자인 허버트 하우프트먼과 제롬 칼은 1937년 뉴욕시립대학을 졸업할 때 수학과 자연과학에서 각각 최우등상을 받았다. 전공이 다른 이 두사람은 서로 다른 인생길을 걷다가 졸업후 10년만에 미 해군연구소에서 만나게 되면서 힘을 모아 연구한 결과, 분자구조의 결정에 복잡한 통계적 방식을 도입하여 발전시킨 업적으로 마침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면역학에 새로운 돌파구

지난 10년간 노벨의학·생리학상 수상대상에서 80년의 '인체면역과 유전관계연구'(B.베나세라프<;미국>;), '이식면역학설의 수립'(G.D. 스넬<;미국>;), '자동면역질병의 연구'(J.도세<;프랑스>;), 84년의 '면역반응 해명과 단클론 항체 개발'(게오르게스 퀼러<;독일>;세자르 밀스테인<;아르헨티나>; 닐즈 야네<;프랑스>;) 그리고 87년의 '항체생성에 관한 유전법칙발견'(도네가와 스스무<;일본>;) 등의 업적은 면역학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런데 81세의 고령으로 노벨상 사상 일곱번째의 여성수상자가 된 83년도 수상자 바바라 매클린토크(미국)는 옥수수의 전이(轉移)유전자를 발견한 뒤 32년만에 그 업적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경우가 되었다. 그녀의 업적이 한참 뒤늦게 인정된 배경에는 여성과학자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녀의 연구가 너무나 선구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매클린토크가 구식의 멘델방법을 통해 밝혀 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재결합 DNA 기술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최후의 멘델인'이라고 불리는 매클린토크의 업적은 1953년 발견된 DNA의 2중나선구조와 함께 우리 시대 유전학의 2대 발견중의 하나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최후의 멘델인 」이란 칭호를 얻은 매클린도크(83년 의학 ·생리학상

선정에 대한 시비

노벨상은 엄청난 명예와 막대한 상금이 붙어 있기 때문에 수상자의 선정을 둘러싸고 심심찮게 항의와 심지어는 소송사태까지 발생한다. 89년 의학·생리학상이 발표되었을 때 프랑스의 학계와 언론계는 수상자의 선정이 잘못되었다고 한바탕 법석을 떨었다.

이들의 주장은 1989년 수상대상이 된 '발암유전자에 관한 기초연구'(수상자는 마이클 비숍 및 해롤드 바머스<;미국>;)는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의 도미니크 스텔링박사가 처음 시작했는데 그의 이름은 쑥 빠져 버리고 뒤에 이 연구에 뛰어 든 두사람의 미국인 교수만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비숍과 바머스는 1976년부터 일련의 실험을 통해 닭의 발암유전자는 본시 세포의 성장과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정상적인 유전자였으나 담배연기나 방사선과 같은 발암물질때문에 생긴 돌연변이의 결과, 빗나가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나 프랑스학계는 이 연구에서 가장 핵심적인 실험에 착수한 것은 스텔링이었으며, 두사람은 스텔링의 실험결과를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텔링은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으로 건너가 비숍교수의 연구실에서 레트로바이러스에 의한 닭병인 루스육종의 생성과정을 연구하고 있었다. 스텔링 비숍 및 바머스의 공동연구결과는 분자생물학회지에 실렸고 1976년 3월에는 저명한 과학전문지 '네이처'에도 게재되었으며 저자의 이름은 스텔링 비숍 바머스 그리고 보그트의 차례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실험을 하던 당시 그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스텔링이 연구팀의 핵심멤버이기는 했으나 바머스와 비숍의 지도하에서 작업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고, 설사 스텔링이 핵심적인 연구를 했다고 해도 연구의 지속성문제를 놓고 볼 때 후속작업은 비숍과 바머스연구실에서 수행한 것이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 노벨상위원회는 50인 선정위원회의 결정을 지지하기로 했다. 아무튼 이들의 발표이래 연구자들은 인간에게 암을 일으키는 40종이상의 변이유전자를 확인하게 되었고 이런 발견으로 의사들은 이제 암의 발생을 진단하거나 예측하기가 훨씬 쉽게 됐다.

불어 나는 상금액

알프레드 노벨은 1896년 3천1백만 크로네 (현 화폐가치로 1억5천만달러 )의 기금으로 노벨상을 창설하면서 이 기금은 '안전한 유가증권'에 투자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1953년 스웨덴정부가 노벨재단에 증권시장 진출을 허가할 때까지 공채에만 투자되어 상금의 가치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줄어 들 수 밖에 없었다. 노벨재단은 부동산값의 상승과 스웨덴정부의 부동산세 증세조치 때문에 스톡홀름과 고텐부르크의 오피스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산하의 부동산회사를 주식시장에 상장하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87년의 노벨부동산회사의 시장가치는 58%나 뛰어 오른 1억달러를 넘어서게 됐고 88년의 상금은 각부문당 15% 올린 41만 8천달러를 주게 되었다. 88년에는 투자자본의 시장가치는 2억3천8백만달러가 되고 이익도 71%나 증가한 9백10만달러를 거둬 들여 상금을 다시 부문당 20% 늘어 난 47만 3천달러로 끌어 올렸다. 그러나 실가치로 볼때 이것도 1901년의 첫번째의 상금 4만여달러(현 화폐가치로 63만~78만8천달러)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그동안의 슬기로운 투자로 8억달러라는 탄탄한 재정기반을 구축한 노벨재단은 앞으로 꾸준히 상금을 늘려 당초의 가치수준까지 끌어 올릴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후보지명과 쇼비니즘

노벨상 후보지명에서 쇼비니즘(맹목적 애국주의)이 작용한다는 소문은 그동안 심심참게 흘러나왔으나 80년대 10년간 노벨상위원회의 화학분과 위원장을 맡았던 보 말름스트롬이 이를 공개적으로 밝혀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1988년 12월 캘리포니아공대의 세미나에 참석했던 말름스트롬은 '사이언스'지와의 회견에서 미국인지명권자들이 가장 업적이 큰 화학자들을 지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미국인들 만을 지명한다는 사실 때문에 선정위원회 위원들은 불행한 몇 해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실토했다.

해마다 약 50개의 미국연구대학중 10개교의 화학교수들이 수상후보자 지명차 스웨덴에 초청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자기들과 가까운 화학자를 지명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1988년 노벨화학상은 '광합성과정을 물리적인 접근을 통해 밝혀내어 광합성의 3차원구조를 규명한 공로'로 다이젠호퍼 후버 미헬 등 3명의 독일 화학자들이 10개국으로부터 지명을 받았으나 그들중 누구도 미국인 화학자의 지명을 받지 못했다. 말름스트롬은 "미국인들이 외국학자들의 업적에 관해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쇼비니즘의 탓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특히 하버드대학과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과 같은 큰 대학이 심하다고 덧붙였다. 지난 10년간 화학부문에서 20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했는데 미국인은 12명이었다.

동양인 수상자들의 수상비결-서구 과학계의 계보에 편입

1901년 첫번째 노벨상이 수여된 이래 1989년까지 과학부문(물리 화학 및 의학생리학)에서 28개국 3백79명의 노벨상수상자를 배출했다. 그러나 아시아국가출신의 노벨상 수상자가 처음 탄생한 것은 1930년이었다. 이 해에 '라만효과의 발견'으로 인도의 찬드라세카라라만이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됐다. 일본은 60년간 유가와 히데(1949년 물리학상) 도모나가 신이치로(1965년 물리학상) 에사키 레오나(1973년 물리학상) 후루이 겐이치(1981년 화학상) 및 도네가와 스스무(1987년 의학생리학상) 등 5명의 수상자를 배출했고, 중국은 양진녕(楊振寧, 1957년 물리학상)과 이정도(李政道, 1957년 물리학상) 등 2명을 그리고 파키스탄은 압두스 살람(1979년도 물리학상)을 배출하여 4개국에서 모두 9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했다.

아시아가 세계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면서도 노벨상 수상자 수는 고작 40분의 1을 약간 웃돌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시아가 결국 노벨상의 불모지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아시아인들이 서양에서 발상한 근대과학의 '세례'를 받은 것은 비교적 근세의 일이었고 더욱이 아시아의 전통적인 사회제도나 환경이 노벨상을 탈만한 창의적인 재질을 계발(啓發)하는데 걸림돌이 되어왔다. 또한 거리상으로 너무나 떨어져 있어 과학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의 교환이 어려워 결국 연구에서 뒤질 수 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보다 직접적이며 그럴싸한 원인을 우리는 다른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능력있는 스승을 만나야

컬럼비아대학의 과학사회학자 해리엣 즈커맨교수는 그녀의 역저 '과학 엘리트-미국의 노벨수상자들'에서 노벨상 수상에는 뛰어난 재질도 물론 필요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스승과 제자간의 사회적 유대라고 지적하고 있다. 즈커맨은 이 책에서 미국인 노벨수상자의 태반이 이미 노벨상을 탔거나 앞으로 수상하게 될 스승밑에서 대학원생 또는 박사학위취득자로서 결국 노벨상대상이 되었던 연구를 했다고 밝혔다. 1970년 제2회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폴 사뮤엘슨은 스톡홀름에서의 수상강연에서 "어떻게 하면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는지를 여러분에게 알려 드릴 수 있다. 그 방법은 바로 위대한 스승을 갖는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것은 아시아출신의 몇몇 노벨과학상 수상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은 거의 모두가 '훌륭한 스승'을 만날 수 있었던 과학계의 행운아들이었다. 예컨대 30대의 젊은 나이에 1957년 '패리티보존법칙의 반증연구'로 이정도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된 양진영의 경우는 중국에서도 후미진 지방도시인 곤명(昆明)의 남서연합대학을 나왔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대물리학자인 엔리코 페르미와 유진 와그너 밑에서 대학원과정을 밟기 위해 1945년말경 갖은 고생을 하면서 뉴욕에 도착하여 페르미가 재직했던 컬럼비아대학을 찾았다.

그러나 당시 시카고대학과 로스알라모스연구소에서 원자폭탄 개발이라는 최고기밀사업에 종사하고 있던 페르미는 양을 지도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되어 에드워드 텔러에게 지도를 부탁했다. 텔러는 양의 관심을 실험물리학에서 이론물리학 쪽으로 돌리게 함으로써 6년 뒤 노벨 물리학 수상자로 탄생시켰다.

1987년 노벨 의학·생리학상 수상자인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인 일본과학자 도네가와(利根 川 進)는 "과학자란 운이 따라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나는 매우 운이 좋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교토대학 재학 당시 교토대학 바이러스연구소 교수였으며 '일본분자생물학의 선구자'로서 이름을 떨치던 와타나베 교수의 핵산에 관한 일련의 특강을 듣게 된 것을 계기로 분자생물학을 전공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1963년 교토대학 바이러스연구소의 대학원생이 되었으나 5월에 와타나베교수가 게이오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미국유학을 권했다. 20대전반에 미국유학의 행운을 안게 된 그는 같은 해 9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샌디에고) 생물계 대학원에 들어갔다. 1970년 박사학위를 받은 도네가와는 둘베코박사(1975년 노벨의학 생리학상 수상)의 소크연구소에 들어가 암바이러스연구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둘베코는 바이러스학자지만 캘리포니아 공대에 있을 때 분자생물학의 창시자인 델브뤼크(1969년 노벨 의학생리학상 수상)의 영향을 받아 분자생물학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둘베코는 도네가와에게 앞으로 면역분야가 재미있을 것이라고 권하면서 세계면역학의 메카인 스위스의 바첼연구소를 소개해 주었다.

1971년 바첼연구소에 입소한 그는 차츰차츰 연구성과가 오르면서 소장 닐즈 야네(1984년 노벨의학생리학상 수상)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고 마침내 '몸 세포의 DNA 유전정보는 모두 생명현상의 기본으로서 일정불변하다'는 종래의 정설을 뒤엎고 'DNA는 생물체내에서 불변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변화하고 움직이는 다이내믹한 존재'라는 결론을 얻어 노벨수상 대상이 되었다.

1981년 바첼연구소 10년의 생활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MIT의 루리아(1969년 노벨의학생리학상 수상)가 이끄는 암연구소에 정착함으로써 둘베코 야네 루리아 등과 함께 일하는 행운을 잡았던 것이다.

제3세계 과학자의 대부, 살람

1926년 인도 펀잡지방에서 태어난 압더스 살람은 펀잡대학를 마친 뒤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에 진학한 1년만에 박사학위를 따내 수백년 케임브회지 역사에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1950년에는 그동안 여러 이론전개에서 난관이 되어 왔던 수학 물리학분야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약관 24세의 나이로 하루아침에 입자물리 학계의 유명인이 되어 버렸다.

1951년 3년간의 영국유학생활을 마친 살람은 부푼 가슴을 안고 파키스탄으로 '금의환향'하여 라호르대학 수학교수로 임명되기는 했지만 제대로 문헌을 갖춘 도서관 조차 없고 같은 분야를 연구하는 동료도 없는 고국에서의 생활은 모두가 허송세월이었다. 마침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강사로 초빙하겠다는 제의가 와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이른바 '두뇌유출'의 대열에 끼게 되었는데 그것은 파키스탄 출신 과학자가 처음으로 노벨상을 탈 수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1979년 런던 임페리얼대학교수 살람은 하버드대학의 셀든 글래쇼 스티븐 와인버그와 함께 전자력과 약한 핵력을 통일하는 이론을 발전시킨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학문때문에 영국으로 건너와야 했던 그 마음속에는 언제나 가난한 고국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가난한 나라에 태어났기 때문에 여러가지 제약으로 재능을 마음대로 발전시키지 못하는 후진국 이론 과학자들의 안타까운 처지를 도우는데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저개발국가들의 필요에 특별히 초점을 맞춘 국제이론물리학연구소(ICTP)가 1964년 이탈리아정부의 지원으로 트리에스트에서 발족하게 되었고 몇해 안가서 세계 가난한 나라 과학자들이 정상급 과학자들과 한자리에서 만나 얼굴을 맞대며 이론물리학을 토의할 수 있는 '학문의 메카'로 성장하게 되었다. 지난해 창설 25주년을 맞은 이 연구소에는 그동안 2만2천명의 가난한 나라의 과학자들이 찾아와서 세계첨단과학을 접할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수십명의 과학자들이 이곳을 다녀왔다.

1990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현원복 과학 저널리스트

🎓️ 진로 추천

  • 물리학
  • 화학·화학공학
  • 생명과학·생명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