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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의 종결자 강풀이 또 하나의 러브스토리를 탄생시켰다. 이번엔 만화가 아니라 영화다. 그의 이야기를 눈독들인 곽경택 감독이 애달픈 사랑이야기를 스크린에 펼쳐냈다. 덕분에 우리는 매주 애타게 기다려야 하는 강풀의 연재물이 아닌 104분짜리 영화 한 편으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짧지만 강렬했던 영화 속으로 잠시 들어가보자.


[동현은 피가 나면 멈추지 않는 혈우병 환자다.]

작은 상처도 치명적인 그녀

우리 몸안에는 출혈을 막기 위해 세 가지 안전장치가 있다. 첫 번째가 혈관 지혈 체계이고, 다음이 혈소판, 세 번째가 혈장 응고 시스템이다. 혈관 지혈 체계는 출혈이 시작된 혈관이 자연히 수축하면서 출혈량을 줄이는 과정이다. 혈소판은 혈관과 혈장 응고계의 진행에 모두 관여한다. 마지막으로 혈장 응고 시스템에는 혈우병이 생기는 원인이 숨어있다. 혈장 응고 시스템에는 총 13가지의 단백질이 관여한다. 이 단백질들이 시계 안의 수많은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야 지혈이 성공적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혈우병 환자는 유전적 결함으로 단백질 일부가 몸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톱니바퀴 한두 개의 부재로 멈춰버린 지혈 시계가 혈우병의 본모습이다.

부모를 모두 병원에서 떠나보낸 동현에게 병원은 치료를 향한 돌파구가 아닌 생의 마지막 종착역이다. 그래서 그녀는 병원을 찾지 않고 혼자 병을 치료한다. 냉장고에서 약을 꺼내 스스로 주사하는 모습은 관객들에게 섬뜩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혈우병 치료에 사용하는 응고인자 보충요법이다. 타인의 피에서 얻은 혈장 단백질을 농축하거나 유전자재조합 방식으로 만든 혈장 단백질을 주사약형태로 몸에 공급해 지혈 시스템을 정상 가동하도록 하는 치료법이다.

그런데 응고인자 보충요법에도 간혹 문제가 뒤따른다. 영화에도 나타나듯이 주사약에 대한 항체가 핏속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 몸안의 면역 체계는 외부에서 들어온 해로운 항원에 대해 항체를 만들어 공격하고, 같은 항원이 또 들어올 때를 대비한다. 어릴 적 볼거리나 수두 등의 바이러스 질환을 앓고 나면, 평생 다시는 같은 병에 걸리지 않는 이유가 항원·항체 반응이다. 그런데 우리 몸은 지혈을 위해 투여한 타인의 응고 단백질을 외부에서 들어온 위험인자(항원)로 인식하고 항체를 만들어낸다. 슬프게도 중증A형 혈우병 환자의 항체 발생률은 15~50%, 평균적으로 30% 정도다. 경증·중증 혈우병 환자의 3~13%에서도 항체가 생성된다.

항체가 생성되면 주사제로 투여하는 응고인자가 항체의 공격을 받아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여주인공 동현이 처한 상황이 그렇다. 그리고 담당의사에게 수천만 원대의 치료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것은 실제 항체 생성환자에게 처방되는 우회제제를 염두에 둔 설정이다. 우회제제는 주사한 혈장 응고인자가 항체를 피해서 지혈 과정을 돕도록 개발된 신약이다. 가격 또한 엄청나게 비싸다.

강풀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혈우병을 동현을 통해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리고 그녀 곁에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남순이 있다.
 

[남순은 온몸의 감각을 잃었다. 몸과 마음의 상처가 심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

우리는 오감(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해 세상을 경험한다. 세상의 본질과는 별개로, 우리가 느끼는 세상은 오감이라는 다섯 가지 물감으로 칠해진 그림과 같다. 그래서 다섯 중 하나를 잃고 살아가는 세상은 남들과 같을 수 없다.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남순은 촉각 인지 장애를 갖고 있다. 어릴 적 자신의 실수로 가족 모두를 잃은 자동차 사고 이후 통증이라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촉각은 체성감각계를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다. 체성감각계는 우리 몸의 전신에 분포된 네 종류의 수용기로 구성돼 있다. 각각의 수용기는 개별적으로 온도자극, 물리적 자극, 화학적 자극, 그리고 통증 자극에 반응한다. 수용기를 통해 모인 정보가 감각신경과 척수를 따라 뇌에 전달되면 촉각이라는 감각의 실체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감각의 전달 통로인 감각신경이나 척수에 손상이 발생하면 촉각이 무감각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중증 당뇨병 환자에서 동반되는 당뇨병성 말초 신경병증이 대표적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척수를 다쳐 생긴 하반신 마비에서도 감각이 사라진다. 물론 이 경우는 촉각을 느끼지 못하는 통증 감각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남순처럼 유독 통증 감각만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다. 바로 ‘선천성 고통 무감각증’이라는 희귀병이다. 통증 수용기에 국한된 유전적 결함으로 인해 환자는 태어날 때부터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하루에도 수차례씩 통증을 느끼며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들에 비하면 한편으로는 행복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 병이다. 어쨌거나 통증이란 우리에게 무척 불쾌한 느낌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통증은 필수다. 통증을 일으키는 일의 대부분은 실제로도 몸에 위험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선천성 고통 무감각증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크고 작은 상처를 달고 산다. 결국엔 그런 상처들 탓에 정상인보다 평균 수명도 짧다. 통증은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더 아픈 일을 막기 위한 극단적인 신체 방어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메커니즘이 망가진 남순은 혈우병에 걸린 동현보다도 실은 더 연약한 몸으로 인생을 헤쳐가고 있는 것이다.





[(좌)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남순과, 조그만 상처도 위험한 동현은 운명처럼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우) 혈우병 환자는 주기적으로 응고인자를 넣은 주사를 맞는다. 지혈 시스템을 정상적으로 가동시키기 위해서다.]

혈우병 환자 오래 살 수 있다

주연부터 조연, 심지어 단역배우까지 모든 배우가 열연한 덕분에 영화는 시작부터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덕분에 필자도 의사로서의 직업의식을 잠시 내려놓고 쉽게 영화에 빠져들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의 톤이 지나치게 사실적인 까닭에 허구와 진실의 경계가 모호해 아쉽다.

혈우병 환자의 평균 수명은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스무 살 전후로 짧지 않다. 1960년대 초 즈음이었으면 모를까. 최근 혈우병 환자의 평균 수명은 의학의 발달로 정상인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

남순이 정신적 충격으로 통증에 대한 감각을 잃었다는 설정도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전쟁이나 스포츠 경기 중에 발생한 외상에서 간혹 일시적으로 통증을 적게 느낀다는 보고는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오히려 정신적 충격으로 지나치게 통증에 예민해지는 환자는 더러 있다. 남순처럼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일은 현실에선 쉽사리 찾아보기어렵다.

만일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환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미각을 함께 느끼지 못한다는 설정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촉각은 체성감각계에서 받아들인 뒤척수를 거쳐 뇌에 도달한다. 하지만 맛을 구성하는 미각과 후각은 시각 신경처럼 뇌에서 직접 뻗어 나온 뇌신경을 통해 척수를 거치지 않고 직접 뇌로 전달된다. 통증과 체성감각계를 공유하는 온도 감각이나 화학적 감각이라면 함께 감소하거나 소실될 수 있지만,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남순이 맛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적 상상력에 기인한 설정이다.

과학적 사실과 다른 작은 흠이 있지만 강풀은 치밀하게 설계한 현실적 배경을 그렸다. 그리고 적재적소에 영화적 재미를 주는 허구적 장치를 배치해 슬픈 사랑 이야기를 완성했다. 이 이야기는 곽경택 감독의 손을 거쳐 날 선 칼이 되어, 내 심장 언저리 어딘가에 거침없이 들어와 꽂혔다. 깊어가는 가을, 여러분도 동현과 남순의 사랑 앞에서 크게 소리 내 울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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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김종립 기자, 김종엽 피부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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