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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정인’에 뜬 눈썹 달의 비밀

그림 속 데이트 시각 찾았다?


[신윤복의 ‘월하정인’. 그는 그림에 ‘월침침야삼경 양인심사양인지(달도 침침한 야삼경, 두 사람의 마음은 그 둘만이 알리라)’라고 써 넣었다.]

“또 언제 볼 수 있는지요.”

달빛이 희미하게 어둑어둑한 밤, 두 남녀가 서로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눈을 떼면 사라질세라 남자는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얼굴을 붉히는 여인은 감히 소중한 임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수줍게 땅만 바라본다. 동짓달 밤을 서리서리 접어뒀다가 굽이굽이 펴놓은 듯이 이 밤은 짧고도 길게, 덥고도 따뜻하게 지나간다. 묘하게 야릇한 분위기가 언뜻 보기에도 예사로운 연인의 모습은 아니다. 하늘에서 이들을 지켜보는 달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려 수줍기만 하다.

국보 135호 ‘월하정인’을 그린 사람은 혜원 신윤복(1758년~연도 미상). 신윤복은 김홍도, 김득신과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풍속 화가다. 중국 화풍을 따라 그리는 경향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세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리는 시도가 이뤄진 시기였다. 산과 물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양반과 서민, 기생들의 생활, 남녀 사이의 사랑을 그린 화가도 많았다.

특히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이 유명하다. 18~19세기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엿볼 수 있는 풍속화 30점을 모은 화첩이다. 갓을 쓰고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양반이 긴 담뱃대를 입에 문 기생을 따라 나선 그림(야금모행)이나, 공부에는 별 관심 없어 보이는 양반들이 기녀들과 함께 뱃놀이를 하는 그림(주유청강), 술에 잔뜩 취해 갓을 벗어던지고 옷고름까지 풀어헤친 채 한바탕 싸우는 양반들을 그린 그림(유곽쟁웅)도 있다. ‘유곽쟁웅’에는 싸움을 말리는 사람, 못마땅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기생, 그리고 부서진 갓을 들고 황당해 하는 사람의 모습도 실감나게 표현돼 있다.

한 점 한 점 재미난 상황 설정과 적나라한 애정행각, 절로 조소가 흘러나올 만큼 우스꽝스러운 작품으로 유명한 신윤복이지만 사실 언제 활동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정확히 몇 년도에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언제 생애를 마쳤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국내의 한 연구자가 신윤복이 ‘월하정인’을 그린 ‘정확한 날짜와 시각’을 알아냈다고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그림에 떠 있는 달 한 조각만 보고서 말이다.


[신윤복의 ‘야금모행’. ‘월하정인’처럼 눈썹 모양의 달이 떠 있다. 비스듬하게 서 있는 모양으로 보아 새벽 3~4시쯤에 뜨는 그믐달이다.]

그림자에 달 가려진 1793년 한 여름 밤

“달도 침침한 야삼경, 두 사람의 마음은 그 둘만이 알리라.”

비록 두 사람의 마음을 관객이 알 수 없을지라도, 그들이 밀회를 나눴던 때를 들켜버린 것일까. 이태형 충남대 천문우주과학과 겸임교수는 지난 7월 2일 “ ‘월하정인’ 속 연인이 만난 시각은 정확히 1793년 8월 21일 밤 11시 50분”이라고 주장했다(야삼경은 밤 11시부터 새벽 1시 사이의 시간을 말한다). 그가 증거로 제시한 것은 그림 속 하늘에 떠 있는, 사람 눈썹처럼 생긴 달이었다.

이 교수는 혜원전신첩에 속한 그림 중 ‘월하정인’을 비롯한 4점에 달이 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현장을 담벼락에 기댄 기생이 몰래 지켜보고 있는 ‘월야밀회’와 어스름해진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는 두 여인을 한 양반이 음흉하게 바라보고 있는 ‘정변야화’에는 보름달이 떠 있다. ‘야금모행’에도 ‘월하정인’과 마찬가지로 눈썹 모양의 달이 떠 있다.

이 교수는 신윤복이 사실과 무관하게 달을 그리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그림을 그린 시각을 추정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월야밀회’와 ‘정변야화’는 보름달이 낮게 뜬 것으로 보아 저녁이나 새벽의 상황이다. 또 ‘야금모행’은 그믐달로 비추어 봤을 때 새벽 3~4시쯤이다.

‘야금모행’과 달의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월하정인’은 특별했다. 눈썹 모양의 달이 흔히 보듯 비스듬히 기울여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을 향해 구부러져 있다. 초승달이나 그믐달로 보기 어렵다. 이 교수는 “이처럼 일상에서 거의 볼 수 없는 달이 그림 속 하늘에 떴다는 것은, 신윤복이 임의로 달을 그린 게 아니라 보고 그렸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그믐달이나 초승달이라면 달이 비스듬하게 서 있어야 하는데, 그림 속 달은 사람 눈썹처럼 아래로 휘어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뜨는 달은 없죠. 달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때 부분월식이 일어났다는 얘깁니다.”

월식은 달이 지구 그림자에 가려지는 현상이다. 태양-지구-달의 순서로 나란히 일직선상에 놓여 있을 때 나타나며 보름달일 때만 보인다. 1년에 3번 정도 일어나며, 밤인com곳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달이 지구의 본그림자에 들어가면 전체가 다 가려지고(개기월식), 지구의 반그림자에 가려지면 일부만 가려진다(부분월식). 즉 부분월식이 일어나면 반달이나 초승달, 한입 베어 먹은 사과처럼 보일 수 있다.

이 교수는 신윤복이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약 100년 동안에 부분월식이 일어났던 기록을 찾았다. 그리고 그림에 그려진 것처럼 달이 보인 것, 서울에서 관측할 수 있었던 것을 추려냈다. 1784년 8월 30일 밤 11시 50분과 1793년 8월 21일 밤 11시 50분, 이렇게 두 건이었다. 각각 신윤복이 26세, 35세 때다. 그가 작품을 했을 만한 시기로 ‘실제 달을 보고 그림 속에 남기는 버릇’이 있었다면 이때 ‘월하정인’을 그렸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월식이 일어났더라도 관측하지 못했을 수 있다. 구름에 가려졌을 때 말이다. 이 교수는 ‘조선왕조실록’과 ‘ 승정원일기 ’ 등의 기록을 토대로 실제로 이 시기에 서울에서 월식이 관측됐는지 알아봤다. 그는 ‘승정원일기’ 제1719책에서 “정조 18년(1793년) 7월 병오(15)일 밤 이경에서 사경까지(밤 9시~새벽 3시) 월식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았다. 양력으로 따지면 8월 21일로 맞아떨어졌다. 그림에 적힌 시간인 삼경과도 일치한다. 1784년 월식에 대한 이야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 교수는 “신윤복이 1793년 8월 21일 밤 11시 50분에 연인을 보고 그림을 그렸으며, 당시 부분월식이 일어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달이 지구 그림자에 가려지는 월식
지구 그림자는 태양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 본그림자와 태양빛이 일부 보이는 반그림자가 있다. 태양-지구-달이 정확히 일직선에 놓이면 달은 지구의 본그림자에 들어가 전체가 가려진다(개기월식). 하지만 달이 일직선에서 벗어나 있으면 일부분만 가려진다(부분월식). 월식은 지구에서 밤인 곳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파리 근교 오베르 쉬르 우와즈에 가면 고흐의 작품에 나오는 실제 모델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사진은 오베르 성당. 해당 작품이 성당 앞에 안내표지판으로 설치돼 있다.]

신윤복은 어떤 달을 그렸을까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몇몇 네티즌들은 “여름이라 하기에는 등장인물들의 복장이 너무 두툼하다”거나 “삼경이면 달이 남중고도(달이 가장 높이 떠 있는 높이)에 있을 때인데 너무 낮게 떠 있다”는 식의 의문을 제기했다.

일부 전문가들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천문학을 전공한 한 전문가는 “신윤복이 달을 똑같이 그렸다는 전제부터가 오류”라며 “실제처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면 그림 속 남자도 집보다 훨씬 작아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림 4점에 나와 있는 달을 보고 시간을 맞추는 일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혹시 당시 화가들 사이에서 해나 달의 모습을 본 대로 그리는 스타일이 유행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안타깝게도 당시 풍속 화가들은 그대로 베껴 그리기보다는 실감나는 상황 묘사와 인물의 몸짓과 표정, 분위기를 살리는 데 집중했다. 인물 주변의 바위나 냇가, 집, 나무, 달 등을 있는 그대로 그렸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얘기다.

홍선표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그림 속 자연현상을 과학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라며 “신윤복은 월식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홍 교수는 우선 신윤복이 예술가였다는 점을 꼽았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명령을 받고 사실화를 그리는 화원이 따로 있었습니139다. 왕이 능으로 쓸 땅을 찾아야 하는데 직접 갈 수 없거나, 왕자가 혼례를 올리거나, 기이한 자연현상이 일어날 때 기록하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대상을 관찰하는 동시에 그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왕이 월식을 기록으로 남기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가정하면, 화원은 달이 가려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자세히 관찰한 뒤 나중에 그림으로 기록했습니다. 즉 실제를 보고 그린 그림도 실제와 100% 같지는 않았다는 얘기죠.”

신윤복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수백 년이 흘렀고, 그림에는 시간만 적혀 있다. 그가 그림을 그리던 순간에 달을 보고 그대로 그려 넣었는지, 예전에 우연히 봤던 달의 모습(월식)이 떠올라 그려 넣었는지, 본인의 마음에 드는 모양의 달을 그렸는지에 대한 답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컴컴한 밤이지만 달이 아니라 해가 떠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월하정인’은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기 때문이다. 두 연인 사이에 흐르는 정이 전해지는 것도, 한 작품을 문학적, 예술적,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것도 그림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어 영원하지 않다는 한계가 있지만, 화가의 상상력과 예술성이 녹아 있는 작품이기에 그림이 주는 즐거움과 상상력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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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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