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일어난 낭충봉아부패병과 미국과 유럽에서 일어난 CCD는 원인 측면에서 뚜렷하게 대조된다. 낭충봉아부패병은 동양 꿀벌(토봉)에만 감염되는 바이러스가 일으킨 재앙이다. 문제는 원인이 명확하다고 해서 병을 치료하기 쉬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CCD는 반대다. 수많은 이유가 제시됐지만 어느 하나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4년이 지난 지금은 약간 주춤하는 기색이지만, 아직 단정짓기는 이르다. 이번 파트에서는 환경 요인 등기존에 알려진 요소 외에 새로운 각도에서 꿀벌이 사라진 원인을 살펴본다.
키워드 1 초개체
벌은 ‘초개체(Superorganism)’다. 한 마리 한 마리가 벌이라는 곤충 개체를 이루기도 하지만 한 데 모여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꿀벌이 초개체로 진화한 것은 여러 가지 생물학적, 진화적 장점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로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은 약할지도 모른다 .
초개체, 환경변화에 취약한가
‘경이로운 꿀벌의 세계’를 쓴 독일의 곤충학자 위르겐 타우츠는 꿀벌에게 척추동물, 그 중에서도 포유동물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꿀벌 군락은 포유동물처럼 번식률이 낮다. 여왕벌이 하루에 많게는 3000개나 되는 알을 낳지만, 생식능력이 있어서 실질적인 자손이라 할 수 있는 새끼 여왕벌은 한 번 번식할 때 두세 마리밖에 태어나지 않는다. 적은 수의 자손을 갖는 포유류와 비교된다.
벌집은 온도 항상성을 유지한다. 애벌레가 들어 있는 벌집 근처에 있는 벌을 관찰해 보면 끊임없이 날개를 떨고 있다. 이는 어깨 쪽 비행근육을 진동시켜서 온도를 높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온도는 약 35℃.
포유류의 체온 36℃와 거의 비슷하다. 그 외에 복잡한 의사소통 체계와 인지능력, 그리고 ‘집단 지능’을 통해 발휘하는 의사결정 능력도 포유류 못지 않다. 이런 장점은 외부에서 충격이 가해졌을 때 협업으로 이겨 내기에 유리하다. 2009년 9월 미국 웨이크포레스트대 에린 펄프교수 연구팀은 또 다른 초개체인 개미가 특정 장소를 발견하고 동료들에게 알리는 방식을 흉내 낸 프로그램을 만들어 네트워크의 취약성을 찾아 보완하는 연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이명렬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잠사양봉소재과장은 “하나의 개체에 비해, 초개체는 군집이 깨질 위험 요인이 더 많다”고 말했다. 벌은 개별 생존과 번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단 군집이 무너지면 생존할 수 없다. 낭충봉아부패병이 대표적인 예다. 감염병이라는 충격에 대응하는 일종의 ‘면역 기능’이 작동해 감염된 개체(애벌레)를 버렸는데, 동양벌은 애벌레를 너무 빨리 빼내 버려 군집 자체가 해체됐다. 벌집의 온도를 35°C로 유지한다는 것도 온도 조건이 맞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가축처럼 진화한 것도 꿀벌의 환경적응력을 약화시켰다(128쪽 참조). 이승환 서울대 농생명공학부 교수(곤충학 전공)는 “꿀벌은 사람이 주는 먹이와 인공생태계(과수농장이나 채소밭)에 의존하는 생활 때문에 생태계 규모의 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착시 가능성은 없나
CCD 현상으로 최근 4년 동안 매년 30% 내외의 벌들이 사라졌다. 하지만 CCD가 발생하기 전에도 꿀벌은 상당한 비율로 줄어들고 있었다. 2006년에 갑자기 생긴 문제가 아니라 초개체인 꿀벌 집단의 일상적인 문제일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미국 농무부 통계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로 미국의 꿀벌 수는 매년 17~20%씩 줄어들었다. 이미 1994년 ‘사이언스’에 꿀벌 수가 감소해 농작물 피해가 크다는 기고문이 실려 있을 정도다. 게다가 90년대 이전에도 큰 폭으로 개체수가 감소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1984년에는 꿀벌 기문(숨구멍)에 감염하는 기생충이, 1987년에는 꿀벌응애라고 불리는 기생충이 창궐했다. 이중 꿀벌응애가 피해가 크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꿀벌응애는 일벌과 수펄의 애벌레와 성충에 기생해 체액을 빨아 먹는 기생충이다. 여왕벌의 생식 능력도 떨어뜨린다. 기생충이지만 꿀벌의 크기에 비해 무척 커서(1.5mm정도) 사람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메이 베렌바움 미국 어바나-샴페인 일리노이대 곤충학과 교수는 “사람으로 치면 몸에 바닷가재(로브스터)만 한 기생충이 달라붙어 피를 빨아 먹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꿀벌응애는 꿀벌의 번식 능력을 크게 떨어뜨려 6개월~2년 안에 봉군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그래서 미국의 야생 꿀벌을 거의 사라지게 만든 주범으로도 꼽히고 있다.
낭충봉아부패병은 주기설도 제기되고 있다. 독감 같은 사람의 감염병이 수~수십 년의 주기를 갖고 창궐하듯이 꿀벌의 전염병도 심하게 유행할 시기가 따로 있다는 뜻이다. 이승환 교수는 “동일한 병이 동남아시아나 중국 등지에서 발병한 적이 있다”며 “대략 15년 주기로 발병하는데 이번에 유독 심한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평소에도 감소 현상이 있었거나(CCD) 주기적으로 발병한다고 해서(낭충봉아부패병) 지금의 사태가 심각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2006년 겨울부터 시작된 지금의 CCD는 이전 15년 동안의 꿀벌 개체수 감소 비율보다 두 배 가까이 높다. 4년째 감소 비율이 줄어들지 않았다는 사실도 단순 착시는 아니라는 증거다. 한두 가지 원인으로 꼭 집어 밝힐 수 없다는 점도 이전과 다른 점이다. 낭충봉아부패병은 전례 없을 정도로 피해가 심각하다.
꿀벌은 가축이다. 축산법시행규칙 제2조에 오리, 당나귀, 개 등과 함께 당당히 가축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로얄젤리, 꽃가루, 봉독 등 벌이 만드는 생산품은 축산물이다. 그런데 법적으로만 가축인 것은 아니다. 오늘날 가축이 사육당하며 겪는 문제점도 고스란히 함께 겪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사육밀도
꿀벌은 공장식으로 밀집사육되는 대표적인 가축이다. 사람으로 치면 벌통은 벌이 모여 사는 큰 사육장이다. 그런데 이 사육장이 보통 농가마다 수백 통씩 있다. 전문적으로 벌통을 치는 미국 농가는 수천 통씩 키운다. 일종의 아파트인 셈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200만 개의 봉군이 있다. 이 가운데 30만 개는 동양 꿀벌이고 나머지가 서양 꿀벌이다. 동양 꿀벌이 3분의 2가 죽었다고 계산해도 현재 우리나라에는 180만 개의 봉군이 있는 셈이다. 우리보다 국토 면적이 훨씬 넓은 미국 전체에 250만 봉군이 있는 것과
비교하면(CCD 이후. 이전에는 약 400만 봉군이 있었다) 대단히 밀도가 높다.
밀도가 높으면 우선 질병에 취약하다. 특히 같은 종이한 데 모여 있으면 병원체 입장에서는 천국이다. 감염할 숙주가 줄줄이 옆에 대기하고 있어 병을 퍼뜨리기 최적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국립수의과학감역원 꿀벌질병관리센터는 지난 5월 낭충봉아부패병에 걸린 애벌레 한 마리가 어른 벌 10만 마리를 감염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동양벌 벌통 하나에 보통 3만 마리의 벌이 있으니 최소한 근처 세 개의 벌통은 순식간에 ‘대학살’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사육 밀도가 높은 데 반해 꿀벌의 활동반경은 대단히 넓다. 이승환 교수는 “꿀벌 한 마리가 최소 500m에서 1km 범위를 돌아다닌다”며 “멀리는 20km까지 꿀을 모으러 다니기도 한다”고 말했다. 꿀벌은 한 번에 0.02~0.06g의 꽃꿀을 나를 수 있으며, 꿀주머니가 가득차면 벌통으로 돌아온다. 농촌진흥청의 자료에 따르면 꿀벌은 이 과정을 20번쯤 반복하면서 약 8000송이의 꽃을 방문한다. 한 번 꿀을 모으러 나갈때마다 수백 송이의 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벌의 밀도가 높아지면 이렇게 많은 꽃을 찾기 어려워진다. 산이나 들에 있는 자연상태의 꽃은 사육되는 꿀벌 말고도 야생 꿀벌이나 다른 꽃벌(국내에만 500종이 넘는다), 그리고 나비와 같은 곤충에게도 요긴하다. 따라서 꿀벌은 만성적으로 꿀이 부족한 상태다. 이런 꽃 부족 현상은 꿀벌의 ‘편식’ 문제(130쪽)와도 연관이 깊다.
잦은 이사, 꿀벌은 피곤해
서양 꿀벌이 사는 아파트형 밀집 사육공장은 이사를 자주간다. 매년 늦봄(5월 초) 남부지방을 시작으로 조금씩 바로 아래까지 간다. 우순옥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연구사는 “6월 첫째 주 강원도 철원에 갔더니 양봉업자들이 여럿 와 있었다”며 “꽃이 피는 시기에 맞춰 벌통을 이동한 것”이라고 말했다.
벌통 옮기기는 벌이 일을 마치고 집(벌통)에 들어가 쉬는 밤에 이뤄진다. 벌이 다 돌아왔다고 생각되면 트럭에 싣고 달린다. 농작물의 꽃가루받이를 주목적으로 하는 미국은 전문 양봉업자들이 직접 농장을 찾아 다니기 때문에 이런 이동식 양봉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도 약 절반이 이동식이다. 동양 꿀벌은 재래식으로 키우기 때문에 이동하지 않고 농장에서만 키운다.
벌 입장에서는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갔다 아침에 나오니 새로운 산이나 들로 자리가 바뀌어 있는 일을 반복해 겪는다. 혼란을 겪지는 않을까. 벌의 예민함은 상상 이상이다. 농촌진흥청 자료에 따르면 일벌 중 꿀을 따는 젊은 벌(대략 성충이 된 지 2주쯤 된 벌이 맡는다)은 하루 평균 40~50회 일하러 나간다. 그런데 기억력이 좋아서 처음 꿀을 딴 꽃의 종류와 색을 기억해 두고 적어도 그날 하루는 그 꽃에서만꿀을 모으는 습성이 있다(그 덕분에 꽃가루가 다른 식물의 암술에 붙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이는 꽃과 꿀벌이 함께 진화한 결과이기도 하다). 식물 종과 지형에 민감하다는 뜻으로, 반복되는 ‘이사’에 스트레스를 받기 쉽다. 베렌바움 교수도 “꿀벌은 예민하기 때문에 이동하는과정에서 쇠약해지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생물이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방법은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단백질을 생산하는 것이다. 적절한 때에 적절한 단백질을 만들지 못하면 면역력이 떨어지고 환경 적응력은 약해진다.
편식은 꿀벌에게도 문제
가축이 된 꿀벌에게는 먹이가 늘 문제다. 개체수가 크게 늘고 밀집돼 있다 보니 꿀을 생산할 식물이 부족하다. 우순옥 농업연구사는 “강원도 철원에서 벌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평화롭고 부지런한 일벌이 서로 싸울 때는 먹이가 부족한 경우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꿀벌이 마음껏 꿀을 모을 식물(밀원식물)이 부족한 나라에 속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밀원식물은 아카시 나무인데 많이 사라졌다. 더구나 야생 꿀벌과 뒤영벌 등 다른 경쟁자들도 있다. 미국은 꿀벌이 농작물의 수분을 돕는 것이 주 목적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꿀을 채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꿀 수확을 높이기 위해 벌에게 설탕물을 먹이로 주기도 한다(미국도 액상과당(HFCS)을 준다). 그런데 이런 인공먹이는 자연 상태의 꿀에 비해 영양구성이 단조롭다. 자연에서 접할 수 있는 꿀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농장이 대표적이다. 과수원이나 밭은 대개 한 가지 종을 넓은 지역에 걸쳐 키운다. 벌 입장에서는 처음엔 ‘꽃가루와 꿀이 흐르는’ 천국으로 보이겠지만, 사실은 한 가지 꽃에서 나온 먹이만 편식할 수 있어 영양 불균형이 일어나기 쉽다.
먹이의 성분은 꿀벌의 영양 측면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포유동물과 마찬가지로 꿀벌의 몸속 장에도 미생물이 산다. 일종의 공생이다. 이들 미생물에게는 장 속에 들어오는 영양 성분이 중요하다. 먹이의 다양성이 몸속 미생물의 조성까지도 바꾸는 셈이다. 베렌바움 교수는 “우리는 벌의 몸속 미생물이 무엇이며 먹이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모른다”며 “꿀벌의 생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단백질 생산을 막는 바이러스
베렌바움 교수는 2009년 7월 유전자 마이크로어레이(DNA Microarray) 기법을 이용해 벌의 유전자를 연구한 뒤 그 결과를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 이 기법은 관심의 대상이 되는 특정 유전자가 생물 안에 있는지 여부를 검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유전자 분석 방법이다.
그 결과 베렌바임 교수 연구팀은 농약에 반응하는 유전자와 면역을 담당하는 유전자는 CCD와 큰 연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대신 CCD에 걸린 벌의장 내 유전자 속에 파괴된 리보좀 RNA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단백질 생산에 문제가 생겨 면역력이 약해질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이 유전자는 피코나(picorna) 류에 속하는 여러 종의 바이러스 때문에 생긴 것으로, CCD에 이들 피코나 바이러스군이 어떤 식으로든 관여한다는 뜻이다.
베렌바임 교수는 “이 바이러스군이 CCD의 원인이라는 뜻은 아니다”라며 “하지만 어떤 꿀벌이 CCD 증상을 보이는지 진단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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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벌의 죽음
Part 1. 꿀벌 여왕의 독백
Part 2. 꿀벌에게 무슨 일이?
Part 3. 꿀벌 없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