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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2. 다강체_물질계의 엄친아

차세대 메모리 소자 후보 1순위

‘신소재의 새로운 물리 현상 발견’은 그 학문적 가치뿐 아니라 응용 가능성도 큰 현대 물리학의 핵심이다. 새롭게 발견된 물질과 현상은 종종 친숙한 상용 제품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대표적인 예로 1950~1960년대 발견된 니오븀주석 (Nb3Sn)과 니오븀티타늄(NbTi)에서 나타나는 저온 초전도 현상이 있다. 초전도 현상은 병원에 있는 자기공명영상 (MRI) 장치나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초전도 자석으로 응용되고 있다. 철크롬(Fe/Cr) 금속 다층막의 저항이 자기장의 미세한 변화에도 크게 변하는 거대자기저항(GMR) 현상은 하드디스크에 적용돼 집적도를 획기적으로 높였다. 이 현상을 밝힌 과학자들은 그 공로로 2007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2003년 이후로 고체물리학계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평가받는 다강성(multiferroic) 물질, 즉 다강체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물질은 일반적으로 함께 존재하기 힘들다고 알려진 서로 다른 ‘강성(ferroic)’이 결합돼 있는 물질이다.



강유전성과 강자성의 결합



물질의 어떤 특성이 외부작용으로 바뀐 뒤 외부작용이 사라진 뒤에도 바뀐 상태로 유지할 때를 그 특성의 강성이라 고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철화합물은 강한 자기장 안에 두면 자석이 되는데(자화) 자기장이 사라져도 자성(磁性)이 유지된다. 그런데 여기에 반대방향으로 자기장을 걸면 자석의 N극과 S극이 바뀌고 역시 바뀐 상태를 유지한다. 자성에서 이런 강성을 보이는 물질을 ‘강자성체’라고 부른다.



물질의 전기 분극(물질의 한쪽이 양(+)극성, 반대쪽이 음(-)극성을 띠는 현상)이 외부 전기장의 작용에서 강성을 띨 때는 ‘강유전체’, 형태적 특성(변형)이 외부 힘의 작용에서 강성을 띨 때는 ‘강탄성체’라고 부른다.



다강체란 두 가지 이상의 강성을 동시에 보이는 물질이다. 최근에 각광받는 다강체는 강유전성과 강자성 사이의 상호작용이 강한 물질인 ‘자기전기성 다강체’다. 즉 외부 자기장의 변화가 물질의 전기 분극을 바꾸거나 외부 전기장의 변화가 물질의 N극과 S극을 조절할 수 있다. 이런 특성은 학문적으로도 매우 흥미로울 뿐 아니라 차세대 메모리 소자 같은 다양한 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자기전기성 다강체를 이해하려면 먼저 강유전성과 강자성을 알아야 한다. 전기적인 관점에서 고체는 도체, 반도체, 부도체로 나눌 수 있다. 부도체는 전자가 고체 내부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물질이다. 물질 내부에서 양전하와 음전하가 가까운 거리에서 쌍을 이루고(전기 쌍극자) 있는 부도체를 유전체라고 부른다. 유전체에 전기장이 가해지면 전기 쌍극자가 전기장에 따라 재배열되면서 일정한 방향을 가진다. 이에 따라 물질은 전기 분극, 즉 물질의 특정 방향은 양(+)극성을, 반대 방향은 음(-)극성을 띤다.



유전체 중에서 전기장의 방향에 따라 분극 방향이 바뀌고 전기장이 사라진 뒤에도 그 방향을 유지하는 물질을 강유전체라고 일컫는다. 1920년 미국의 물리학자 조셉 발라섹이 로쉘염에서 강유전성 현상을 처음 발견했다. 이후 많은 연구가 따랐고 전자기기의 고용량 축전기, 민감한 화재 감지기, 고성능 적외선 카메라 등 수많은 곳에서 강유전체가 활용됐다. 최근에는 메모리 소자로의 응용이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강유전체의 특성을 이용하면 0과 1 두 가지로 상태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비휘발성 메모리 소자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강자성은 물질을 이루는 원자의 스핀(spin) 때문에 생긴다. 스핀은 양자역학적 현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원자핵 주변의 전자가 팽이처럼 도는 작은 자석으로 비유되곤 한다. 각각의 전자는 스핀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원자가 자성을 띠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스핀이 상쇄돼 없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물질 속의 원자는 이 값이 상쇄되지 않고 남아서 고유한 스핀 값을 갖고 있다. 이런 물질 가운데 외부 자기장에 의해 스핀이 일정한 방향으로 정렬돼(자기장 방향으로 나침반 바늘이 놓이듯이) 자화가 되고, 자기장이 사라져도 자화가 남아 있으면 강자성체라고 부른다.



강자성체의 역사는 강유전체보다 훨씬 더 오래됐다. 기원전 그리스에서 철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 물질을 마그넷(magnet), 즉 자석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바로 처음 발견한 강자성체다. 강자성의 응용은 우리 생활에 아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냉장고 자석, 스피커, 이어폰, 모터, 발전기에 이르기까지 자성 물질은 현대 기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료다. 또한 강유전체와 마찬가지로 강자성체도 비휘발성 메모리 소자로 쓸 수 있다.



한국 과학자들이 르네상스 열어



“그렇다면 강유전성과 강자성이 동시에 한 물질에서 나타날 수 있을까. 그런 물질이 있다면 실생활에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까.”


 





이런 궁금증에서부터 다강성에 대한 연구가 시작됐다. 다강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물질 구조의 대칭성과 전자 스핀 사이의 상호 작용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1894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가 처음 이론을 제시했으며 1960년대 구소련 과학자들이 좀 더 체계적인 이론을 세우고 실험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발견된 다강체는 종류도 얼마 안 됐고 다강성도 약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강유전성과 강자성이 일어나는 근본 원리가 서로 배타적이라는 데 있다.



강유전성은 기본적으로 물질 내부의 전하 분포가 변하면서 생기는데, 이때 물질을 구성하는 이온 중 하나가 움직여야 한다. 이러한 이동은 보통 양이온의 스핀이 0이어야 잘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강자성은 원자 자체의 스핀이 0이 아니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연구결과가 2003년과 2004년 과학저널 ‘네이처’에 연달아 발표됐다. 일본 연구진(2003년)과 재미 한국인 연구진(2004년)은 희토류 원소인 터븀망간산화물이 외부 자기장에 놓이면 전기 분극에 매우 큰 변화를 일으키는 강한 다강성을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히 미국 럿거스대 물리학부 정상욱 교수팀(논문의 제1저자는 당시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허남정 현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이 만든 터븀망간산화물(TbMn2O5)은 영하 270℃의 극저온에서 강한 자기장(지구자기장의 약 4만 배에 해당하는 세기)에 의해 전기 분극이 양에서 음으로 완벽하게 바뀌었다.



그런데 자기장의 변화가 어떻게 전기 분극의 변화를 일으킬까. 이는 터븀망간산화물의 독특한 구조 때문으로 보인다. 즉, 자기장의 변화로 스핀의 자성 정렬의 형태가 변할 때 구조가 불안정해지면서 특정 이온이 약간 이동하는데, 그 결과 물질의 전기 분극이 바뀐다. 이 결과가 발표된 이후 산업이나 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다강체를 만드는 연구가 폭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전력 소모 낮은 다강체 소자



다강체는 자기장으로 유도된 전기 분극 변화뿐 아니라 전기장으로 유도된 자화 변화도 나타날 수 있다. 이들 새로운 현상을 이용하면 지금까지 예상하지 못했던 기능성 소자가 탄생할 가능성이 높다. 가장 기대되는 효과로는 0과 1의 두 가지 상태로 데이터를 저장하는 메모리 소자에서 전기 분극과 자화가 각각 +, -로 변하면서 생기는 네 가지 상태를 동시에 사용하는 메모리 소자를 예상해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강유전성과 강자성의 상호 작용이 아주 클 경우에는 자기장의 미세한 변화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다. 즉 자기장의 미세한 변화가 전기 분극 변화를 일으켜 전압 형태의 신호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드디스크의 읽기 쓰기에 이용되는 ‘리드 헤드(read head)’를 다강체로 바꾸면 전력 소모를 훨씬 줄일 수 있으며 정확한 읽기가 가능하다.



다강체는 라디오파와 마이크로파 주파수 대역을 이용하는 통신 소자로도 쓰일 수 있다. 자성이나 전기적인 공명 현상을 응용하는 통신 기기에 사용하는 자성체나 유전체는 공진 주파수가 일정하기 때문에 주파수를 변화시키려면 복잡한 회로가 필요하다. 만일 다강체로 이런 소자를 만들면 자성체의 공진 주파수를 전기장으로, 유전체의 공진 주파수를 자기장으로 제어할 수 있으므로 기기 자체를 훨씬 간단하게 설계할 수 있다.



다강성 물질의 연구는 최근 6, 7년간 이해한 내용이 지난 50년 동안 알아낸 것보다 많을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해오고 있다. 아직 발전은 계속되고 있으며 고체물리학의 거의 모든 영역(결정학, 자성, 유전성, 역학)을 포괄하는 근본적인 연구 주제임과 동시에 구체적인 응용 제품을 목표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분야이다.



특히 상온에서 다강성을 띠는 물질을 찾는다면 응용가능성이 무척 크기 때문에 필자의 연구팀도 현재 이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머지않아 산업계에 실제로 응용되는 다강체 소자가 출현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필자를 비롯한 한국의 물리 학자들이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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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노벨상 예약한 수상한 물질 삼형제
Part1. 초고체_원자 따로 노는 '구름' 결정
Part2. 다강체_물질계의 엄친아
Part3. 모노폴_극이 하나뿐인 자석


 

2011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김기훈 교수/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김재욱 연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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