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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죽여라! 죽여라!”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는 18세기 말 프랑스혁명 시기의 파리가 생생히 묘사돼 있다. 교과서에는 프랑스혁명이 민주주의를 불러온 인류 역사의 승리로 묘사돼 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소설을 통해 당대 현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혁명의 한가운데는 단두대로 상징되는 처절한 보복과 처형이 자리잡고 있었다. 평민의 가난을 자신이 키우던 동물의 안위보다 하찮게 여겼던 귀족과 왕족은 즉결처분의 대상이었다. 서로를 ‘시민동지’로 부르던 같은 시민들 사이에서도 밀고와 약식재판, 광기 어린 처형이 끊이지 않았다. 파리에서만 하루 수십 명이 공개적으로 목이 잘렸다. 사람들은 분노와 복수심에 불탔고, 그 속에 역사를 온전한 방향으로 이끌겠다는 냉정한 이성이나 의지 같은 것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의문이 든다. 과연 사람에게 의지가 있을까. 해묵은 철학 주제지만, 이는 신경과학자를 고민에 빠뜨리는 문제기도 하다. ‘자유의지는 없다(시공사)’의 저자 샘 해리스도 그 중 하나다. 과연 우리는 생각할 자유가 있고 그 생각대로 선택할 의지가 있을까. 어렵게 고민할 필요 없다. 오늘 아침에 무엇을 먹고 마셨는지 생각해보자. 따끈한 우유와 사과를 먹었다면, 이제 물어보자. 그게 당신의 의지와 관련이 있는가. 우유와 사과를 좋아해서 선택했다면, ‘좋아한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자신이 의지로 결정한 문제인가. 만약 사과가 귀하고 바나나가 더 흔한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당신은 지금 사과 대신 바나나를 매일 아침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평소 우유만큼 좋아하던 커피가 앞에 있었다면 갈등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사과와 우유를 먹은 것은 전혀 자유의지 때문이 아니다.

분노와 복수심 역시 마찬가지다. 뉴스에 오르내리는 잔혹한 범죄를 하나 떠올려보자. 아직 사형제도가 명목상 남아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종종 사형 판결이 난다. 사람들은 ‘그래야 정의가 살아난다’며 흡족해한다. 그런데 다음 날 사형수를 진찰했던 의사가 뜻밖의 말을 한다고 해보자. “진찰 결과 감정과 행동충동을 조절하는 뇌의 부위에 종양이 발견됐다.” 혼란스러워진다. 그의 범죄는 남에게 해를 끼칠 의도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니다. 생물학적인 현상에 굴복한 것뿐이다. 여기에 의지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계속 비난해야 할까. 또 어떤 때엔 인간행동에 의지가 개입하고 어떤 때엔 개입하지 않는다면, 의지를 보편적이라고 볼 수 있는 걸까. 그에 따라 분노와 복수심이 혼란을 겪는다면, 의지가 개입하지도 않은 대상을 비난하는 데 쓰이는 분노란 소모적일 뿐 아닐까. 차라리 자유의지란 개념은 없는 게 낫지 않을까.

저자의 주장은 도발적이다. “창궐하는 전염병과 싸우려 할 때 그것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듯이, 범죄자를 향한 복수심과 분노 역시 인간이 자유의지라는 환상을 버리면 (앞선 행동충동장애자의 경우처럼) 상당수 누그러질 것이라고 본다. 논란이 많겠지만 실용적일 수 있는 주장이다.

분노와 화에 대한 또다른 설명을 볼 수 있는 책은 ‘인간다움의 조건(사이언스북스)’이다. 분노는 이 책이 제시한 10가지 감정 중 하나지만, 여기에서도 비이성적으로 불이 붙어 거대한 소요까지 발전하는 분노와 복수심의 사례를 가득 발견할 수 있다. ‘두 도시 이야기’의 맹목적 광기가 어른거린다.

이제까지 복수성과 분노를 한 줄기로 봤다. 하지만 서양 고대 로마 시대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세네카는 둘을 구분한다. 그는 ‘화에 대하여’에서 인간의 맹목적 잔인함(야수성)의 원인이 분노이며, 복수심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야수성은 자신이 위해를 당한 만큼 갚아주기 위해 상대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다. (…) 이들은 복수가 아닌 쾌락을 위해 채찍질을 하고 남의 살을 찢는다.”

세네카의 주장에 따르면, 분노는 곧 쾌락이 되고, 최종적으로 악행을 불러온다. “처음에는 화로 시작되지만 자주 되풀이되면서, 관용도 인간으로서의 유대감도 모두 상실하고 마침내 잔인함으로 변해버린다.” 아침에 우유와 사과를 의지로 선택한 내가 없었듯, 쾌락으로 변해버린 악을 ‘의지로 선택한’ 나도 보이지 않는다. ‘내 행동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인 자유의지는 확실히 무력해 보인다. 2000년 전 살았던 세네카는 물론 과학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화를 억제하지 못하는, 자신의 행동을 적절히 선택할 줄 모르는 나약한 인간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다.

2013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윤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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