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통난이도 | 세상을 바꾸는 여성 엔지니어
“입구에서 조금 번거로운 보안 검사를 거쳐야 들어올 수 있을 거예요.”
3월 10일 대전 유성구 LG화학 기술연구원. 전날 윤효정 책임연구원의 안내 문자대로 입구에서는 보안 검사가 이뤄졌다. 방문객 보안 안전 교육을 듣고 나자 신분증 확인, 스마트폰과 노트북 등 각종 전자기기와 소지품 검사가 이어졌다. 공항 보안 검색만큼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연구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배터리 수명 늘리려 연구에 매진
“특허 출원을 앞둔 신기술이 개발되는 곳이라 보안 절차가 엄격합니다.”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던 윤 책임연구원이 설명을 덧붙였다. LG화학은 세계적인 배터리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LG그룹의 핵심 계열사다. 설립 초기 치약과 비누를 생산했던 LG화학은 현재 석유화학 기초제품, 의약품과 전자제품 소재뿐만 아니라 전기차용 배터리를 생산하는 등 차세대 기술 개발에 힘쓰고 있다. 현재 이곳 기술연구원에 근무하는 연구원만 3000명이 넘는다. 이들이 LG의 미래를 만드는 셈이다.
윤 책임연구원은 배터리 개발을 맡고 있다. 전기자동차 배터리는 LG그룹이 미래 성장 동력의 핵심으로 꼽고 있는 기술이다. 지금까지 LG화학이 2차전지로 출원한 국제특허만 1만6685건(2019년 3월 기준), LG화학의 배터리가 장착된 전기자동차는 세계적으로 270만 대에 이른다.
윤 책임연구원은 “새로운 배터리 하나를 개발하려면 재료 선정부터 디자인, 제작 공정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며 “양극, 음극, 전해액, 분리막 재료 개발은 물론, 이런 원재료를 이용한 전극 개발과 조립, 활성화 공정, 기기에 따른 최적의 구동 조건까지 유기적으로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윤 책임연구원은 ‘장수명 배터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배터리 업계에서는 전기자동차 배터리의 경쟁력이 앞으로는 수명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배터리 사용 시간과 운행 거리, 충전 횟수, 운행 방식 등에 따라 배터리 수명이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전기자동차가 대중화될수록 오래가는 배터리가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그는 “전기자동차 배터리 수명은 대략 10년”이라며 “배터리 수명을 지금보다 혁신적으로 늘리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고 밝혔다.
‘싫은 일은 하지 않는다’는 기준 세워
전기자동차를 포함해 스마트폰 등 각종 전자기기에 가장 많이 쓰이는 리튬이온배터리는 최근 산업계에서 가장 ‘핫’한 기술로 꼽힌다. 2019년에는 리튬이온배터리를 처음 개발한 과학자들에게 노벨 화학상이 수여되면서 산업계에서 배터리 기술의 파급력이 학문적으로도 인정받았다.
주목받는 연구를 하고 있지만, 윤 책임연구원이 처음부터 이 일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연구자의 길을 꿈꾼 것도 아니었다. 어릴 때는 일찍이 자신의 꿈을 정했거나 타고난 재능이 있는 친구들을 마냥 부러워했다.
“특출나게 잘 하는 것도, 당장 하고 싶은 것도 없어 진로에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서 일단 하기 싫은 일부터 하나씩 지워나가기 시작했죠.”
고등학교 때는 역사 공부에 영 취미가 붙질 않았다. 대신 과학은 재미있었다. 그래서 이공계로 진학했다. 대학 입학 후에도 ‘싫은 일은 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룰에 충실히 따랐다. 그중 하나는 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회사에 취직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취직’이라는 길은 왠지 평범하고 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업을 제외하자 다른 선택지를 찾아야 했다. 마침 학부 때 1년간 어학연수를 다녀오면서 그에게는 외국에서 공부해보고 싶다는, 외국 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 어떨까. 그길로 유학을 결심했다.
백발의 할머니가 고급 스포츠카에서 내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도시 샌디에이고에 반해 그는 2011년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샌디에이고)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도시의 낭만과 대학원생의 삶 사이에는 괴리가 컸다.
좋은 연구와 논문을 내기 위해 학교와 집만 오가는 생활이 계속됐다. 다 그만두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때마다 윤 책임연구원을 버티게 해준 것은 그의 삶의 철학인 ‘싫은 일은 하지 않는다’였다. ‘미래의 나’가 싫어하는 걸 생각해보니 중도 포기는 안 될 것 같았다고.
“힘들다고 포기하고 한국에 돌아가면 인생을 살면서 계속 후회할 것 같았어요. 욕심 없이 편하게 사는 인생이 부럽다가도 막상 그런 미래를 상상해보면 현실에 안주하는 삶인 것 같아서 싫더라고요. 성취감과 자기만족을 느끼고 싶었어요.”
아무것도 이룬 게 없이 사는 삶은 싫다고 결론 내린 그는 ‘미래의 나’가 ‘과거의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학업에 매진했다. 결국 그는 유학길에 오른 지 5년 만인 2016년 고에너지, 고출력 배터리를 위한 재료 합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귀국해 LG화학 기술연구원에 입사했다.
그는 “매일 새로운 일을 해서 질릴 틈이 없는 게 엔지니어라는 직업의 매력”이라며 “하기 싫은 일을 지워나가다 보니 결국 원하는 일을 찾았고, 지금은 이 일이 천직이라 매일이 즐겁다”고 말했다.
후배들에게 엔지니어 롤모델 되고파
“이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없다.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다.”
지도교수인 셜리 멍(Shirley Meng) UC샌디에이고 나노공학과 및 재료공학과 교수는 윤 책임연구원이 연구 결과가 예상대로 나오지 않아 힘들어 할 때마다 이렇게 격려해줬다.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려야 해결될 문제이고, 힘들어하는 이 시간조차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과정의 하나이니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따뜻한 배려와 응원의 메시지였다.
“지금 해결하지 못한 기술적인 문제도 10~20년 뒤 후배 연구원들은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어릴 때 과학상상화에 등장한 기술이 지금은 대부분 실현됐잖아요? 당장 전기자동차만 해도 그렇고요.”
그는 이런 자신의 경험을 후배들과 나누고 싶어 모교에 찾아가 멘토링을 하고, 사내 교육 봉사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진로가 고민인 청소년들에게 다양한 삶과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요. 지금은 유튜버나 아이돌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저를 만나고 나서 과학자나 연구원을 꿈꿀 수도 있지 않을까요.”
윤 책임연구원은 엔지니어를 꿈꾸는 여학생들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지금은 능력과 의지만 있으면 여성도 뭐든 할 수 있는 시대”라며 “지금까지는 여성 엔지니어의 롤모델이 별로 없었던 만큼 후배들의 롤모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Q1 이 일을 또 할 것이다?
(전생(?)을 기억하고 있어서) 이 일을 안 해봤다면 다시 배터리 연구원을 할 것 같아요. 보람도 많이 느끼고 재밌거든요. 하지만 전생에 이 일을 한번 해봤다면, 중학생인 제게 다른 일을 선택하라고 하고 싶어요. 다양한 경험을 해보면 좋잖아요.
Q2 이건 꼭 해보고 싶다?
책을 많이 읽을래요. 위인전을 읽으면 교훈과 함께 독후감을 써내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공감이 잘 안 됐죠. 당시에는 위인전을 왜 읽는지 몰라서 그랬던 것 같아요. 위인들이 이룬 성과를 간접 체험한다고 생각하고 책을 읽었더라면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위대한 성과를 내기 위해 무엇을 했고 어떤 방식으로 접근했는지 들어 본다고 생각하고 책을 읽었다면 아마 지금 저에게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요(웃음).
Q3 학업을 위해 이건 꼭 고치고 싶다?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면 좋겠어요. 유학 시절에 만난 미국 친구들은 선택에 주저함이 없더라고요. 보통 한국 학생들은 하던 분야가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도 ‘몇 년 더 버텨서 끝내자’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그간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우니까요. 그런데 미국 친구들은 그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더 하고 싶은 일을 과감하게 선택하더라고요. 당시 박사과정 동료 중 한 명은 지금 가구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답니다.
Q4 지금의 내가 중학생인 내게 하고 싶은 말은?
‘대학 입학이 끝이 아니다. 대학 입학 이후가 진짜 시작이다.’ 학창시절에는 좋은 대학 가는 걸 목표로 삼는 경우가 많잖아요. 저도 그랬고요. 그런데 막상 대학에 입학하면 그때부터가 진짜 진로 고민의 시작이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청소년들에게 대학을 목표로 삼지 말고 더 멀리 보라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이때 정말 하기 싫은 일은 하지 말라고도 얘기해주고 싶고요. 하기 싫은 이유가 분명 있기 마련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