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티의 부두교 주술사들이 만들어낸 좀비 이야기는 공포 영화와 소설에 자주 등장했다. 웨이드 데이비스 박사처럼 사실에 입각해 소설(‘뱀과 무지개’)을 쓰기도 하지만,좀비가 공포의 대상이 되면서 카니발리즘(사람 또는 동물이 같은 종을 잡아먹는 풍습)이 더해지게 됐다. 그래서 영화에 나오는 좀비는 시체를 파먹거나 살아 있는 사람을 공격해 잡아먹는다. 칼로 찔러도, 총으로 쏴도 끝없이 살아나 다시 산 사람을 공격한다. 최근 만들어진 영화에서는 더 자극적이고 섬뜩한 전개를 위해 자각이 없는 좀비가 생각을 하거나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좀비가 점차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좀비가 영화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68년이었다. 미국 SF공포 소설가 리처드 매드슨의‘나는 전설이다’를 읽고 영감을 얻은 미국 영화감독 조지 로메로는 근처 오두막집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자기 친지들을 동원해 현대 좀비 영화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을 제작했다. 그 후 좀비는 공포영화의 한 장르를 차지하게 됐으며 게임과 융합된 새로운 형태로도 발전했다. 도대체 좀비의 어떤 매력이 사람을 스크린으로, 게임으로 끌어들였을까.
나랑 닮은 존재에 대한 거부감, ‘언캐니 밸리’
좀비 영화에 대해 말할 때 사람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질적 존재에 대한 거부감과적대감을 빼놓을 수 없다. 사람은 아예 다르게 생긴 존재는 잘 받아들인다. 오히려 자기와 닮았는데 특성이 다른 존재에 대해 불안함과 공포를 느낀다. 그래서 개나 고양이 귀신보다는 사람처럼 생긴 얼굴로 말하고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는 귀신을 무서워한다. 2005년 KAIST에서 인간형 로봇 휴보에 아인슈타인 얼굴을 뒤집어 씌운 ‘알버트 휴보’를 발표 했을 때 사람들은 흥미와 동시에 섬뜩함을 느꼈다. 이것은 일본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토가 말한 ‘언캐니 밸리’, 즉 로봇의 외양이 사람에 가까워질수록 우리가 느끼게 되는 거부반응이다. 차라리 곰 인형을 뒤집어씌웠더라면 친근하게 다가왔을 로봇이 사람 얼굴 가죽을 뒤집어씌우자 괴물로 느껴졌다. 우리와 닮았지만 우리가 아닌, 이런 존재는 우리 정체성을 위협한다. ‘나도 결국 저런 존재가 아닐까’하는 불쾌감과 거부감, 그리고 공포심이 투사된 결과다.
좀비도 언캐니 밸리에서 기어 나온 존재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사람의 옷을 입고 사람처럼 걸어 다니지만 결코 사람이 아닌 존재가 좀비 아닌가. 그래서 조지 로메로 이후 거의 모든 좀비 영화는 사람이 같은 사람에게 갖는 공포심을 은유해왔다.

좀비 영화에는 좀비의 대량살상과 함께, 거의 언제나 좀비가 발생한 지역을 격리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일정 지역에 대한 격리는 결국 그 지역 사람들에 대한 무자비한 적대행위로 이어진다. 좀비와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좀비와 똑같은 대접을 받는 것이다.그 이유는 좀비인지 아닌지 당장 겉모습만 봐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는 좀비가 우글거리는 오두막에 있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흑인이라는 이유로 좀비로 간주되어 사살 당한다. 영화 ‘둠스데이’에서는 스코틀랜드 지역에 좀비가 발생하자 영국 정부에서 아예 스코틀랜드의 경계에 거대 장벽을 쌓는다. 그리고 영화 ‘28일 후’에서는 영국에 좀비가 발생하자 전 세계가 영국을 격리시켜 버린다. 이것은 베를린 장벽과 같은 이념이나 특정 지역에 대한 압살적인 차별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좀비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차별하는 자의 입장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차별당하는 자의 입장이 되기도 한다.
무차별한 전염으로 친구를 잃는 공포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이 치매에 걸린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치매에 걸리기 전에 그가 얼마나 영민하고 친절하며 유머가 넘치는 존재였는지 생생하게 기억할수록, 치매에 걸려 영혼이 빠져나간 그의 모습은 당신의 가슴을 후벼 팠을 것이다. 겉모습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는데, 더 이상 그와 예전처럼 대화할 수가 없다. 그는 재기 넘치는 유머 대신 헛소리를 내뱉고, 심지어 당신을 눈앞에 두고서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치매 환자를 둔 가족의 고통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 온다. 차라리 그의 예전 모습을 몰랐더라면 덜 속상할 지도 모른다.
좀비 영화는 비슷한 감정을 자극한다. 앞서 말했듯 좀비 영화는 리처드 매드슨이 뱀파이어 전설을 전염의 기제로 해석한 걸작 ‘나는 전설이다’에서 영감을 얻어 시작됐다. 당연히 좀비 영화는 질병의 전염 기제를 인용한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주인공을 모순된 감정에 빠뜨린다. 처음에 좀비에 물린 사람은 피해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가 가해자인 좀비가 돼 버린다. 만약 그 피해자가 주인공과 가까운 친지이거나 주인공의 애인이라면, 주인공은 엄청난 갈등에 빠지게 된다. 내 친구와 가족이 결국 나를 공격하는 적이 되고마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눈길로 바라보던 눈동자가 이제는 그저 먹이를 갈구하는 짐승의 눈이 됐다. 따뜻하던 손길과 입술이 이제는 나를 움켜쥐고 뜯어먹으려는 아귀가 됐다. 누구는 여기에 냉정하게 대응하고, 누구는 차마 그를 죽이지 못해서 희생당한다. 하지만 그들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가면서 가슴에 구멍이 하나씩 뚫려간다. 공포와 상실의 고통이 적절히 분배되면 영화의 깊이가 더해진다. 아무리 막아도 번지고야 마는 전염성, 그것이 좀비 영화가 우리를 자극하는 또 다른 공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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