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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실험실’ 죽은사람이 어떻게 노예가 됐을까?


1980년 서인도제도에 있는 아이티의 아르티보니트 계곡에 위치한 땅이 비옥한 마을. 그날은 유난히도 태양이 쨍쨍 내리쬐던 봄날이었다. 한 남자가 쇠뭉치처럼 무거운 발을 한걸음씩 내딛으며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헤벌린 입에 파리가 들어가도 모를 정도로 넋이 빠진 그는 눈동자마저 흐리멍덩했다. 밭에 나가던 안젤리나는 흐느적거리며 걸어오는‘느려터진 형체’가 누구인지 가까이 다가와서야 겨우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는 18년 전에 죽은 안젤리나의 오빠, 클레어비우스 나르시스였다.아이티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살았던 10대 소년 윌프리드 도리센트는 어느 날 갑자기 원인 모를 병을 심하게 앓기시작했다.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면서 온몸이 마비돼 갔다. 눈이 노래지면서 심하게 몸이 부풀던 그 소년은 결국 발병한 지 8일 만에 사망했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를 땅에 묻고 몇주가 흐른 뒤, 윌프리드는 클레어비우스처럼 마을에 다시 나타났다.

1983년 10월, 미국 시사 잡지 ‘타임’에는 ‘좀비’가 나타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아이티 사람들은 이 ‘살아 있는 시체’를 부두교 주술사가 시체에 마법을 걸어 환생시킨 것이라고 믿었다. 서아프리카의 민간신앙인 부두교는 흑인들이 서인도제도에 노예로 팔려오면서 아이티에까지 전해졌다. 부두교의 주술사는 비밀스런 주문을 외거나 약물을 이용해초자연적인 일을 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중 하나가 죽은 사람을 땅속에서 꺼내‘묘약’으로 부활시켜 좀비를 만드는 것이다. 좀비들은 뻣뻣한 몸으로 움직일 수는 있지만자각이 거의 없어 주술사의 명령에 따라 사탕수수나 독말풀 농장의 노예로 일을 했다고 한다.

복어 독과 두꺼비 침 들어 있는 좀비 묘약

과학과는 거리가 먼 듯한 좀비를 의·과학적으로 풀어보고자 평생을 바친 학자가 있다. 1980년대부터 좀비를 연구하기 위해 아이티를 수차례 방문하고, ‘사이언스’, ‘민속식물학 저널’ 같은 저널에 여러 논문을 실었던 캐나다 민속식물학자 웨이드 데이비스 하버드대 교수다. 데이비스 박사가 생각하는 좀비는 아이티 사람들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그는 좀비가 주술사의 주문으로 부활한 시체가 아닌, 어떤 과학적인 현상이며 정상적인 사람이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1980년대 아이티를 처음 찾아간 그는 좀비를 만든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2400달러(약 288만 원)를 들여 주술사 8명에게 좀비 묘약을 하나씩 샀다. 묘약에 들어간 재료의 종류와 양은 마녀가 만든 수프처럼 주술사마다 달랐다. 시체의 손톱을 잘라 넣은 것도 있었고, 피부를 간지럽게 하는 성분의 풀이 든 것도 있었다. 그런데 8개의좀비 묘약에는 공통적으로 포함된 재료가 있었다. 복어 독과 자이언트두꺼(Bufomarinus)의 침, 그리고 독말풀(Datura stramonium)이었다.

데이비스 박사는 좀비를 만드는 첫 번째 비밀이 복어 독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근거를 일본에서 찾았다. 회를 많이 먹는 일본에서는 잘못 손질한 복어 회를 먹다가 복어의간과 생식기관에 들어 있는 맹독(테트로도톡신)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해마다 100명 가까이 나왔다. 사망하지 않는 경우에는 가사상태(생리기능이 약화돼 죽은 것처럼 보이는 상태)에 빠져 있다가 며칠 뒤에 회복했다. 테트로도톡신은 근육세포에 있는 나트륨 이온채널을 차단해 신경 신호가 전달되는 일을 방해한다. 결국 근육이 점점 마비되면서 온몸이 감각을 잃고 혀가 꼬여 발음이 부정확해진다.

데이비스 박사는 좀비가 되는 현상도 마찬가지로 가사상태에 빠졌다가 회복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사상태에 빠지면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지 못해 뇌가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좀비는 마이크로그램(μg, 1μg=10-6g)만큼의 복어 독에 중독됐다가 겨우 살아난 사람일 것”이라며 “좀비의 몸이 뻣뻣하고 말투가 어눌하며 정신이 멍한 이유는 가사상태 중에 뇌가 손상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아이티의 신경정신과 의사였던로저 말로리 박사는 좀비였던 윌프리드가 죽은 뒤 그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뇌가 산소부족으로 손상됐음을 확인했다. 레바논 베이루트아메리칸대 심리학과의 아르네 디에트리히교수는 “특히 전두엽이 손상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두엽은 대뇌의 앞부분에 있으며 기억과 사고 같은 고등 정신활동을 담당한다.

좀비 묘약에 들어 있던 다른 재료인 자이언트두꺼비의 침과 독말풀에는 환각을 일으키는성분이 들어 있다. 데이비스 박사는 “주술사들은 좀비를 환각 상태에 빠지게 해 일을 부려 먹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아이티에서 나타났던 좀비는 살아 돌아온 시체가 아니라 신체 의지와 정신적 자각능력을 빼앗긴 노예였던 셈이다. 즉 주술사가 몰래살아 있는 사람을 가사상태에 빠지게 했고, 다른 이들은 그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했다.그 뒤 주술사가 ‘시체’를 땅에서 파내 회복시킨 다음, 환각 상태에 빠뜨렸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연구 결과를 ‘사이언스’ 1988년 4월 15일자에 발표했고 같은 해 6월 24일자에는‘좀비 만들기(zombification)’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일반인들에게도 좀비의 존재와 비밀을 알리려 했던 그는 1985년 ‘뱀과 무지개(The serpent and the rainbow)’라는소설을 펴내기도 했다. 이 책은 1988년에 영화 ‘악령의 관’으로 제작됐다.

실험으로 동물 좀비 만들었던 과학자들

데이비스 박사의 연구 결과를 모든 과학자가 바로 인정했던 것은 아니다. 수많은 과학자와 의사가 그의 주장을 반박하거나 직접 실험으로확인하기를 원했다. 결국 데이비스 박사는 좀비 연구에 관심이 있는 전문가들에게 좀비 묘약을 나눠줬다.

1982년 미국 뉴욕 록클랜드주립연구소의 나단 클라인 박사는 데이비스 박사와 마찬가지로 좀비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30년간 연구에 매달렸지만 결국 좀비를 만드는 데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클라인 박사는 데이비스 박사의연구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영화 같은 이론일 뿐 실제로 이뤄질 수 없는 현상이라는 주장이었다.

미국 뉴욕 콜롬비아장로병원의 생리학자 레온 로이진 박사는 각종 약물과 희귀 성분들이중추신경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40년 이상 연구한 사람이었다. 친구였던 클라인 박사의 부탁으로 좀비 실험을 시작했다. 1982년 그는 쥐와 레서스원숭이의 두뇌에 뇌파 전위기록장치(뇌파계)를 연결하고 좀비 묘약을 먹였다. 죽은 것처럼 몸이 굳고 물질대사 능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뇌가 살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실험 결과 쥐와 원숭이들은혼수상태에 빠졌고 어떤 외부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뇌 활동은 계속됐고, 심장 박동도 느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뛰고 있었다. 죽은듯이 꼼짝 않던 동물들은 24시간쯤 지난 뒤, 몇 마리가 정신을 차렸다. 묘약으로 좀비를 만들 수 있다는 데이비스 박사의 주장을 확인한 것이었다. 로이진 박사는 “묘약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좀비처럼 만드는 일이 가능하다”며 “73kg 몸무게의 성인에게 알맞은(?) 묘약의 양은 약 3.5g”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 묘약 외에도 신경이완제나 진통제, 환각제 등으로 추가 실험을 한 결과, 동물들이 좀비처럼 행동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로이진 박사는 이 연구가 앞으로 인류에게 악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판단하에 더 이상 진전시키지 않았다.

1984년 미국 뉴욕주립대 메디컬센터의 존 하르퉁 박사는 테트로도톡신이 든 것과 들어 있지 않은 좀비 묘약을 땅콩버터에 섞어 쥐에게 먹였다. 테트로도톡신이 들지 않은 묘약을 먹은 쥐는 환각상태에만 빠질 뿐 좀비처럼 변하지 않았다. 그는 “좀비 상태를 만들때 테트로도톡신은 처음 단계에서 꼭 필요한 성분”이라고 결론지었다. 같은 해 일본 토호쿠대 카베시 야스모토 교수는 사람을 좀비 상태로 만들 수 있는 테트로도톡신의 적정량을알아내 독성물질에 대한 저널 ‘톡시콘’에 발표했다. 그는 원래 복어 독이 생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연구했는데, 우연히 데이비스 박사의 논문을 읽고 좀비에 대한 연구를시작했다. 야스모토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만큼 강한 독극물인 테트로도톡신을 1.1μg 이하로 복용하면 죽지 않고 좀비가 된다. 그 뒤 프랑스 니스대 생화학자였던 미셸 라둔스키 박사가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해 묘약 1g당 테트로도톡신이 64나노그램(ng, 1ng=10-9g) 정도 들어 있음을 밝혔다. 이렇게 데이비스 박사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러 과학자들이 실험으로 증명했다.

결국 과학자들은 좀비 현상에 대한 궁금증을 과학적으로 푸는 데 성공했다. 부두교의 주술사들이 순진한 아이티 주민들을 속여 왔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믿거나, 미신으로 치부하는 주제에 대해 과학자들이 끊임없이 답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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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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