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은 성스러운 동물들이 하늘을 지나는 통로라고 간주했으며, 시베리아에서는 하늘을 뒤덮는 천막의 솔기라고 생각했다. 동부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모닥불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떠올렸는가 하면, 남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거대한 짐승의 등뼈라고 상상했다. 여름 밤하늘에 뿌연 강처럼 흐르는 은하수를 보고 전 세계 곳곳에서 떠올린 단상들이다.
은하수의 영어명은 ‘젖 길(the Milky Way)’이다. 신화에 따르면 최고의 신 제우스는 인간 알크메네와 바람을 피운 뒤 낳은 아기 헤라클레스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기 위해 본처 헤라의 젖을 먹이려고 한다. 잠자는 헤라의 젖을 물리자 헤라클레스는 힘차게 젖을 빨았는데, 어찌나 세게 빨았는지 헤라는 비명을 지르며 아기를 떼어냈다. 이때 뿜어져 나온 젖이 멀리 퍼져 밤하늘에서 빛을 내는 띠가 됐다고 한다. 이 내용은 르네상스시대 거장인 야코포 틴토레토가 그린 ‘은하수의 기원’이란 제목의 명화에도 담겨 있다.
여름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정말 헤라의 젖이 뿌려진 것처럼 뿌옇게 빛나는 은하수를 만날 수 있다. 백조와 독수리가 함께 날고, 궁수가 전갈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는 빛의 강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아미노산 구성하는 분자도 발견
하늘을 가로질러 길게 뻗은 빛의 길 은하수. 이 신비로운 은하수의 정체는 바로 우리 은하다. 그렇다고 우리 은하의 전체 모습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지구에서 바라본 우리 은하의 옆모습이다. 특히 여름에는 우리 은하의 중심이 있는 궁수자리 방향으로 우리 은하를 볼 수 있어 하늘에 펼쳐진 은하수가 가장 화려하다.
사실 밤하늘에서 맨눈에 볼 수 있는 모든 별은 우리 은하에 속해 있다. 지구는 우리 은하의 원반에 파묻혀 있는데, 두께 2000광년에 지름 10만 광년인 이 원반에는 적어도 2000억 개의 별들이 모여 있다. 은하수가 흰 비말처럼 보이는 이유는 원반의 수많은 별들이 뿜어내는 빛이 합쳐져 보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 은하의 원반은 지구 공전궤도면과 같은 방향에 놓여 있지 않으므로, 은하수는 하늘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나타나게 된다.
은하수를 자세히 살펴보면 가운데로 시커먼 띠가 지나가며 빛의 길을 두 갈래로 나누고 있다. 성간물질이 별빛을 가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성간물질은 기체와 먼지로 이뤄져 있으며, 99%로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체보다 1%에 불과한 먼지가 별빛을 더 효율적으로 흡수한다. 두꺼운 성간먼지가 은하수에 기다란 검은 틈새를 만든 셈이다. 천문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성간먼지는 평균 크기가 0.1μm(마이크로미터, 1μm=10-6m) 정도이며, 탄소와 규산염 화합물로 이뤄져 있다.
성간물질은 주로 구름의 형태로 뭉쳐져 덩어리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성운이라 불리며, 별빛을 가로막아 존재를 드러내는 암흑성운은 대부분 수소분자가 우세한 분자운이다. 최근 이런 분자운에서 유기분자가 발견되고 있다. 특히 생명체와 직접 관련된 아미노산을 구성하는 기본 유기분자인 시아노아세틸렌(HC3N)과 아세트알데히드(CH3CHO)가 관측됐다. 세종대 천문우주학과 이정은 교수는 “수소분자운의 안쪽은 바깥에서 자외선이 들어오지 못해 아늑하다”며 “이곳의 먼지 표면에서 유기분자가 많이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유기분자를 관측하기 쉬운 환경은 주변에서 별이 탄생하는 곳이다. 별이 만들어지면 빛이 나와 주변을 데우는데, 이때 차가운 먼지에 얼음 형태로 붙어 있던 유기분자가 증발해 기체 상태로 관측되는 것이다.
아미노산의 기초가 되는 유기분자의 특성도 흥미롭다. 아미노산은 분자식이 같지만 구조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서로 다른 좌형과 우형이 만들어지는데, 지구상의 아미노산은 거의 모두 좌형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교수는 “원시별에서 자외선이 엄청나게 나오는데, 우형 아미노산이 자외선에 의해 잘 파괴된다”고 말했다. 지구 생명체의 신비도 우주를 잘 관측하면 풀릴 수 있지 않을까.
원시별 주변에는 별을 둘러싸고 있는 원반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 원반에서 먼지들이 뭉쳐져 행성을 형성하고 행성에서 생명체도 탄생할 수 있다. 최근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스피처 우주망원경이 적외선으로 원시별을 관측한 결과, 원시별 주변 원반에 생명체와 관련 있는 다양한 유기분자와 물 분자가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아직까지 별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지구와 같은 행성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생명체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별 탄생과 생명체의 존재는 어떤 연결고리를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태양 질량의 400만 배가 작은 편
여름 밤하늘에 펼쳐진 은하수를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궁수자리 방향이 가장 밝고 다채롭다. 우리 은하의 중심이 자리하는 이곳에는 중앙 팽대부(bulge)의 많은 별들이 원반 별들에 가세해 빛나고 있다. 하지만 암흑성운의 성간먼지가 군데군데에서 다양한 모양으로 별빛을 막고 있다. 지구에서 2만 6000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우리 은하 중심은 베일에 싸여 있는 미지의 세계다. 기체, 먼지, 별과 그 시체로 가득한 복잡한 곳이라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은하 중심에 진짜 블랙홀이 있는지는 많은 천문학자들이 제기해온 의문이었다.
1970년대 우리 은하 중심부에서 강한 전파원(전파가 관측되는 원천)이 발견돼 이 전파원은 ‘궁수자리 A*’로 명명됐다. 궁수자리 A*는 광학망원경을 들이대도 보이지 않았고 근적외선으로 관측하더라도 이 전파원에 해당하는 천체는 눈에 띄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서는 찬드라 X선 망원경이 궁수자리 A*를 향했다. 이 우주망원경은 2000년 궁수자리 A*에서 X선을 처음 포착했고 이듬해 궁수자리 A*가 갑자기 밝아지는 현상을 잡아냈다. X선은 블랙홀로 물질이 빨려 들어갈 때 내놓는 마지막 절규로 알려져 있는데, 궁수자리 A*에서 X선이 나왔다는 사실은 이 천체가 블랙홀이라는 간접적 증거인 셈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연구팀과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연구팀이 궁수자리 A*의 정체를 제대로 밝히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2002년 UCLA 연구팀은 하와이 케크망원경으로 궁수자리 A*로 빨려 들어가는 가스와 먼지 흐름을 포착했고, 같은 해 막스플랑크연구소 연구팀은 칠레 유럽남반구천문대(ESO) 거대망원경 VLT를 이용해 은하 중심을 초속 5000km로 15.2년에 한 번씩 돌고 있는 별 S2를 발견했다. 그동안 궁수자리 A* 주위에서는 20~30개의 별이 관측됐는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별은 궁수자리 A*에서 태양과 화성 사이의 거리 정도쯤 떨어져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천문학 전공 우종학 교수는 “이들 가운데 몇 개 정도의 별이 궁수자리 A*를 도는 궤도가 정확히 결정됐다”며 “이를 통해 은하 중심부에 태양 질량의 400만 배에 달하는 질량이 존재하는 것으로 계산됐다”고 밝혔다. 작은 공간 안에 이렇게 상당한 질량이 밀집돼 있다면 궁수자리 A*는 거대 블랙홀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 은하뿐 아니라 외부은하의 중심부에도 거의 대부분 거대 블랙홀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천문학자들은 은하 중심부를 돌고 있는 별의 운동을 관측해 중심에 있는 거대 블랙홀의 질량을 쟀다. 우 교수는 “지금까지 45개 정도의 거대 블랙홀의 질량을 측정했는데, 그 질량이 태양 질량의 100만~50억 배”라며 “우리 은하 중심에 있는 거대 블랙홀은 작은 편에 속한다”고 말했다.
우리 은하의 거대 블랙홀은 다행히 비활동성이다. 활동성인 거대 블랙홀은 은하 전체보다 밝은데, 강력한 전파원인 퀘이사가 활동성인 거대 블랙홀을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우 교수는 “은하 100개 중 하나가 퀘이사”라며 “우주 나이가 20~30억 년일 때 은하들끼리 합병하며 거대한 은하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거대 블랙홀에 먹이를 공급해 밝게 빛나는 단계가 퀘이사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비활동성에 그리 크지 않은 블랙홀을 가진 우리 은하. 방대한 우주에서 어찌 보면 그저 평범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다만 제가 태어난 은하수의 정체는 물론 우주의 신비를 밝히려 안간힘을 쓰는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른 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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