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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작가는 원래 한국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도시의 빠른 변화 속도에 맞춰 작품 활동을 하기엔 사진이 더 적합한 매체라는 생각에 작업 방식을 바꿨다고 한다. 전시회에는 총 네 개의 연작이 전시되고 있다. 쓰레기 매립지였지만 지금은 공원이 된 난지도의 풍경을 담은 ‘녹색 커튼(Green Curtain)’, 재개발 공사 현장을 담은 ‘푸른 영토(Blue Territory)’, 지하 쓰레기장을 담은 ‘도시의 깊이(Urban Depth)’, 그리고 지하철이 지나가는 터널을 담은 ‘질주하는 빛(Speeding Light)’다.

작가는 쓰레기장을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하지만 기피의 대상이거나 혹은 은폐돼 그 존재여부를 망각하는 공간’으로, 난지도에 묻힌 쓰레기를 ‘기억하고 싶지 않거나 숨기고 싶어 하는 과거의 흔적’이라고 말한다. 재개발 지역은 어떨까. 동네는 철거와 함께 사라지지만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우리 동네’였던 곳으로 남을 것이다. 곁에 있지만 있다는 사실이 감춰진 사물과 기억이, 도시 어딘가 있는 셈이다.


[녹색커튼, 55×178cm, 2009]


[도시의 깊이 D0033, 115×150cm, 2010]

감춰진 쓰레기
작품 중 ‘녹색 커튼’과 ‘도시의 깊이’는 도시 깊은 곳에 감춰진 쓰레기를 다룬다. 녹색 커튼은 쓰레기 더미 위에 건설된 공원의 풍경을 담았다. 도시의 깊이는 쓰레기처리시설의 모습을 보여 준다. 새로 건축되는 쓰레기처리 시설은 땅 밑에 만드는 것이 보통이며, 그 위는 공원 및
주차장 같은 공공시설이 덮고 있다. 쓰레기처리시설은 땅 위에 있으면 주민들이 불편을 겪기도 하겠지만, 눈에 띄지 않으면 더 좋을 기피 대상이기 때문이다.

쓰레기는 왜 감춰져야 할까. 더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러움이란 무엇일까.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는 사람들이 어떤 것을 불결하다고 여기는지 연구했다. 예를 들어 성서의 ‘레위기’는 동물을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누고, 부정한 동물은 먹지 못하도록 규제한다. 또 다른 예로, 이슬람교의 ‘할랄’, 유태교의 ‘코셔’는 종교 계율에 맞는 정결한 음식을 부르는 이름이다.

하지만 이슬람에서 금하는 돼지고기는 한국인이 즐겨먹는 음식이다. 영양학이나 위생학의 관점만으로는 이런 문화적 차이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

더글러스는 더러움이라는 개념에는 상징적으로 정결하지 못한 것, 즉 부정(不淨)의 의미가 포함돼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더러운 돈’이라는 말은 그 돈에 세균이 우글거린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옳지 않은 방식으로 오가는 돈을 일컬을 뿐이다. 여기서 부정하다는 것은 질서로부터 벗어났음을 뜻한다.

또 질서를 벗어난 사물은 ‘비체(非體)’라고도 부른다. 사람을 뜻하는 ‘주체’ 및 사물인 ‘객체’와 달리 독립적인 ‘체(體)’가 될 수 없다는 뜻에서다. 매일 수십 개씩 빠지는 머리카락은 대표적인 비체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뒤에도 자신이 떨어져 나온 신체를 계속 연상시킨다. 처음부터 홀로 있던 돌멩이 같은 사물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머리카락은 사람과 사물을 가르는 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물건이고 그 때문에 때론 기피 대상이 된다.

쓰레기 역시 비체이다. 물건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방을 농담 삼아 ‘쓰레기장’이라고 부르듯, 쓰레기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혼돈의 대명사다. 종이컵은 종이컵이고 신문지는 신문지이며 우유곽은 우유곽이지만 한데 뒤섞이면 각자의 성격을 잃고 폐휴지 더미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비체는 분류하기 애매한 성격때문에 부정하고 위험하다고 여겨지며 금기시되는 경우가 많다. 쓰레기도 마찬가지다.


[녹색커튼 12, 55×680cm, 2009]



질서와 무질서의 구분
사실 쓰레기장은 없앨 수만 있다면 없는 편이 더 좋다. 정신분석학자들은 땅 밑의 쓰레기장처럼 차라리 없었으면 하는 것들, 이를테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 기억은 의식하지 않아도 마음 깊은 곳 무의식에 남아 있다고 말한다. 이때 의식이 합리적인 지성의 질서를 뜻한다면, 무의식은 모순적 감정들이 혼란스럽게 있는 곳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가 주목하는 쓰레기처럼, 도시가 잊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깊은 곳에 묻어 둘 수밖에 없는 물건은 도시의 무의식 속 혼란에 비유할 만하다. 또한 그 위를 덮은 공원은 도시의 의식에 견줄 수 있다.

그런데 쓰레기가 담고 있는 혼란스런 이미지와는 다르게, 작가의 사진 속 쓰레기장의 모습은 질서정연하다. 반들반들하게 빛나는 함석판으로 이뤄진 거대한 처리 시설은 마치 백여 년 전의 SF 소설가들이 상상했을 법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사실 많은 도시 공간은 합리적인 공간을 창조하려는 근대적 사고방식을 따라 만들어졌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만물에 통용되듯, 도시 전역에 통용될 수 있는 질서를 추구하는 것이다. 브라질의 수도인 브라질리아는 근대 도시계획의 이상을 보여 주는 합리적 공간이다. 주거지구, 상업지구, 사무지구 등 각 지역은 용도에 따라 구획했고, 서로 다른 구역은 자동차 전용 도로로 연결했다. 서울처럼 서로 다른 성격의 건축물들이 한데 뒤얽혀 있으며 차와 사람이 뒤섞여 교통 체증을 겪는 곳과는 다르다.

하지만 브라질리아 시민들은 이 도시에 도로는 있을지언정 길거리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서서 마음 편히 이야기를 나누거나 걸어 다닐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동네를 생각해 보자. 골목은 좁고 구멍가게는 허름할지 모르지만, 친구네 집으로 향한 갈림길의 모퉁이에서 친구와 선 채로 아이스크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가 된다.

또, 동네 지도를 기억하는 대로 그려 본 다음 포털 사이트의 지도와 비교해 보자. 상당히 다를 것이다. 머릿속 지도가 그 사람만의 삶의 방식을 표현한다면, 정확한 축적에 따라 작성된 지도는 동네 사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지도다. 각각의 지도 역시 도시의 무의식과 의식에 대응된다.

그렇다면 질서와 무질서의 구분은 상대적일 수 있다. 무질서해 보이는 골목길도 주민의 눈에는 나름의 질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에서도 질서와 무질서의 상대적 구분을 없애려는 시도가 있다. 과거에는 만유인력 법칙과 같은 간단한 법칙으로 세상을 설명하려 했지만, 양자역학과 복잡계물리학은 무질서속에서 질서를 찾으려 노력한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난류현상이 고전 물리학으로 풀지 못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복잡계물리학은 카오스 이론을 이용해 무질서해 보이는 난류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질서를 찾는다.





재개발의 물결
이 관점에서 재개발의 문제 역시 생각해 보자. ‘푸른 커튼’은 건물이 철거된 맨땅의 흙이 날리거나 침수되는 것을 막기 위해, 땅을 덮어 놓은 푸른색 비닐인 ‘타포린’이 이루는 모습을 담고 있다. 몇몇 사진은 거대한 타포린의 물결이 아직 남아 있는 동네 건물들을 삼키려는 듯한 광경을 보여 준다. 이 물결 아닌 물결은 재개발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상징 한다. 작가는 이 풍경에서 ‘일상에 가해진 폭력과 재개발의 부정성을 타포린으로 덮어 버리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고 설명한다.

작가가 재개발이 일상에 대한 폭력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철거되는 건축물과 더불어 동네 삶의 질서 역시 파괴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그곳에 남을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은 떠나야만 한다. 재개발은 비합리적 공간을 합리적 공간으로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쓰레기장이 도시의 지하, 눈에 보이지 않은 곳으로 내려갔듯, 재개발로 떠난 사람의 슬픔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진다.


[Metro-Meteor 3, 135×90cm, 2008]


[연못, 70×170cm, 2009]

2011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김종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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