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인가, 나비가 나의 꿈을 꾸는 것인가.
중국 전국시대 사상가인 장자의 유명한 일화 ‘호접몽(胡蝶夢)’은 장자가 어느 날 나비가 돼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는데, 그 느낌이 너무도 생생해 자신이 나비인지, 나비가 자신인지 혼란스러웠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로부터 2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존재의 리얼리티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 컴퓨터 속 가상세계를 현실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영화 ‘매트릭스’나, 나비족 아바타와 인간 제이크 사이에서 갈등하는 영화 ‘아바타’가 모두 이런 고민에서 나온 영화들이다.
현실처럼 리얼한 가상세계, 그리고 여기서 혼란스러워하는 인간상은 현실에서도 나타난다. 영화 속 배역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우울증을 겪는 배우나 유체이탈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런 특수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 같은 가상, 가상 같은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 TV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를 보면서 저들이 진짜 사귀는 것이 아닐까 의심을 하고,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드라마 대사에 100% 공감을 하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캐리커처를 보면 실물보다 더 생생하다고 느낀다. 이런 느낌을 단순히 착각이나 심리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뇌 두정엽에서의 리얼리티
이와 관련해 20세기 초에 활동하던 영국의 신경과학자 러셀 브레인과 헨리 헤드는 신경학 저널 ‘브레인’에서 인간은 근육, 눈, 피부 등 온몸의 감각점을 뇌의 두정엽에 저장하고 기억한다고 설명했다. 이때 머리나 엉덩이의 감각점은 두정엽 위쪽에, 혀나 턱의 감각점은 아래쪽에 재현되는 식으로 여러 가지 감각이 두정엽의 각기 다른 부위에 대응된다. 그 뒤부터는 어떤 자극이 주어지면 그 자극이 두정엽에 전달되고, 두정엽의 특정 부위가 활성을 띠며 감각자극을 지각할 수 있다. 감각자극을 지각하면 우리 뇌는 대상을 실제 같다고 느낀다.
하지만 오감이 아닌, 마음으로 느끼는 리얼리티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마치 자신의 몸이 아픈 것처럼 고통을 느끼고, 게임 속 아바타에 강한 동질감을 느끼면서 가상의 게임세계가 현실 같다고 느끼는 경우다. 감각적으로는 분명히 나와 대상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대상이 마치 자신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실제로 2008년 11월 영국의 한 여성은 남편이 가상현실 사이트 ‘세컨드라이프’에서 불륜에 빠졌다며 이혼청구소송을 제기했고, 같은 해 7월 국내에서도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이 아바타로서 맺어진 커플 관계를 실제 관계로 착각하고 가출하는 사건이 있었다.
고무손 느낌과 유체이탈의 진실
그런데 우리가 느끼는 리얼리티가 반드시 사실인 것은 아니다. 2004년 8월 6일자 ‘사이언스’에 실린 영국 런던대 헨릭 어슨 박사팀의 고무손 실험은 리얼리티를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실험에서 연구팀은 실험참가자의 오른손을 보이지 않게 테이블 아래에 숨기고 가짜 고무손을 눈앞에 둔 뒤 두 손을 동시에 붓으로 건드리면서 실험참가자의 뇌를 기능성자기공명영상장치(fMRI)로 촬영했다. 그 결과 참가자들은 고무손이 마치 자신의 진짜 손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fMRI 촬영 결과, 고무손 착각을 경험하는 동안 참가자들의 뇌는 그렇지 않은 때에 비해 감각을 인지하는 전운동피질이 활성화됐다.
이와 비슷한 실험이 2008년 12월 2일자 ‘플로스 원(PLoS ONE)’에 실린 ‘신체 만들기(Body Shaping)’란 유체이탈 실험이다. 어슨 박사는 스웨덴 스톡홀름 카롤린스카연구소의 발레리아 페트코바와 함께 진행한 이 실험에서 폐쇄회로 TV를 이용해 실험대상자가 마네킹을 자신의 몸처럼 느끼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연구팀은 마네킹의 얼굴에 폐쇄회로 카메라 2대를 장착해 실시간으로 마네킹의 배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영상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실험참가자에게 배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게 한 뒤 준비한 영상을 보여줬다. 연구팀이 실험참가자의 전기피부반응(GSR)을 측정하면서 마네킹의 배를 칼로 찌르는 듯 위협하자 참가자는 마치 실제로 위협을 느끼는 것처럼 피부에 땀이 증가했다. 이에 대해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의 자아가 마네킹으로 넘어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의 손과 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 몸의 일부처럼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도 출신의 세계적인 신경과학자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 박사는 이런 현상이 뇌의 독특한 인지 특성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 ‘라마찬드란 박사의 두뇌실험실’에서 뇌는 입력되는 여러 감각 정보들을 종합해 일관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즉 고무손이 자극되는 모습을 봤는데, 그에 상응하는 촉감을 실제 손에서 느끼면 뇌는 모순되는 두 감각을 합쳐서 ‘고무손에서 촉감이 느껴진다’는 엉뚱한 결론을 내리고 여기서 리얼리티를 느낀다는 얘기다. 고무손 착각 실험을 진행한 어슨 박사는 실험에서 활성을 띤 전운동피질이 여러 감각 정보를 통합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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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사고는 주먹구구식
뇌는 왜 하필 고무손에서 촉감이 느껴진다고 할까. 시각과 촉감이 동시에 전해질 때 시각이 더 우위에 있는 것일까. 연세대 심리학과 이도준 교수는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를 보면 시각적인 피드백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 강하다. 하지만 대부분 시각에 초점을 두고 진행된 실험이기 때문에 실제로 뇌가 이야기를 꾸밀 때 어떤 감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성균관대 심리학과 이정모 교수는 “인간이 현실을 인식하는 현상은 뇌신경 수준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며 “이는 인간이 휴리스틱(heuristic)한 사고를 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휴리스틱한 사고란 인간이 완벽한 사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먹구구식, 어림짐작으로 생각한다는 의미다. 이 개념은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인지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의 ‘판단과 의사결정’ 이론에서 부각됐다. 카너먼은 경제학의 기본 입장인 ‘인간은 항상 합리적인 사고 과정을 거쳐 선택을 한다’는 전제가 실제 인간의 행동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흔히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둔 편향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우리가 인지하는 현실은 100% 완벽한 사실이 아니다”라며 “현실에서 추출한 80~90%의 정보에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을 추가해 그럴듯하게 재구성한다”고 말했다. 단적인 예로 책들이 여러 권 꽂힌 책장을 언뜻 본 뒤 어떤 책이 있었는지 떠올려보면 제목이 한글로 쓰인 책들은 기억이 나지만 영어나 기타 외국어로 쓰여 있던 책들은 기억하기 힘들다. 이는 우리가 한국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경험에 비춰 휴리스틱한 사고를 한다는 설명은 뇌가 입력된 정보들로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신경과학분야의 설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연세대 이도준 교수는 “뇌가 현실을 판단할 때 시각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시각적인 경험의 가치를 크게 두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라마찬드란 박사도 자신의 저서에서 “뇌는 잉여적이고 쓸모없는 정보들을 대량으로 폐기하고 특정 속성들을 강조하는 일종의 분류 작업을 한다”고 밝혀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했다.
아바타를 나의 분신으로 느낄 때
한편 성균관대 이정모 교수는 “가상현실 속 아바타에 자신을 대표하는 요소가 표현돼 있다면, 아바타를 실제 자신처럼 리얼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바타로 살아온 경험이 머릿속에 들어 있다가 아바타에 투사되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아바타와 교류할 때도 단순히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몸을 이용하면 리얼리티를 더 많이 느낀다. 예를 들어 마우스로 클릭을 해서 아바타를 걷게 만드는 게임과 내 다리를 직접 움직여야 아바타가 움직이는 게임이 있다고 하면 다리를 직접 움직이는 경우 리얼리티가 훨씬 더 높아진다는 뜻이다. 이 교수는 “몸에서 느끼는 감각적인 리얼리티가 마음에서 느끼는 리얼리티를 강화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성찬을 상상해 배고픔 달랠 수는 없다”
셰익스피어는 “단지 성찬을 상상함으로써 배고픔을 달랠 수는 없다”는 말을 남겼다. 이는 내적인 이미지가 아무리 사실 같아도 실제를 대체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이처럼 리얼리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완벽한 리얼리티란 있을 수 없고 우리가 그것을 느낄 수도 없다. 또 같은 리얼리티라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얼리티의 본질을 탐구하는 일이 의미가 있을까.
연세대 이도준 교수는 “오감과 같은 신체의 여러 가지 감각과 신체 각 부위의 위치, 감정과 같은 신체 내부의 신호들이 일치할수록 사람은 리얼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며 “영화가 아무리 리얼해도 현실과 동등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감각 정보들 간에 불일치하는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균관대 이정모 교수는 “과거에 인간은 호랑이 그림자와 비슷한 것만 보고도 호랑인 줄 알고 도망쳐야 살아 남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사람의 인지특성은 체험적으로 진화해왔기 때문에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고, 이야기를 추론해내는 능력도 다르다”고 말했다. 즉, 리얼리티를 느끼는 정도도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철학에서는 리얼리티를 ‘실재(實在)’라고 번역하고, ‘인식주체의 감각과 인식조건의 제약을 넘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서울대 여명숙 박사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지만 모든 현상의 배후에서 인과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존재자들을 찾는 것이 지난 수천 년간 이어져온 철학적 탐구의 중심”이라며 “이 같은 고민은 일부 철학자들의 몫이었지만, 가상세계와 현실세계가 융합된 21세기에서는 일상의 문제”라고 말했다. 무엇을 현실이라고 하고, 무엇을 가상이라고 할 것인가. 리얼리티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까지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리얼리티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된 지금, 정말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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