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발전 기술은 물론 이를 추진할 전문가도 없던 한국이 반세기 만에 원자로 수출국으로 거듭난 비결은 그동안 일관되게 추진해온 자립 노력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경남 울주에서 고리 1호기의 첫 삽을 뜬 뒤부터 줄곧 이어온 기술 자립 노력은 치밀한 계획 아래 추진됐다.
발전용 원자로가 없었던 초창기 고리 1, 2호기는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지원을 받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설계와 시공을 전적으로 한 회사에 맡기는 방식이라 기술을 어깨너머로 습득해야 하는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고리 3, 4호기와 영광 1, 2호기 건설이 잇따라 결정되고 설계와 시공을 나눠 발주하게 되면서 원전 기술을 습득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2012년 원전 기술 100% 자립한다
1984년 정부는 훗날 한국 원자력 발전사에 남을 중대한 결정을 하나 내렸다. 원전 건설을 해외에 맡기는 방식에서 벗어나 우리 손으로 직접 원전을 설계하고 만들기로 한 것이다. 1986년부터 영광 원전 3, 4호기를 만들면서 해외에서 기술 이전을 받기 시작됐다. 당시 20, 30대 원자력 엔지니어들과 연구원들은 오랜 갈증을 해갈이라도 하듯 새 기술을 받아들였다.
1995년과 1996년 각각 완공된 영광 3호기와 4호기의 건설 경험은 최초 한국 표준형 원전인 100만kW급 OPR1000 원자로 개발로 이어졌다. 1998년 울진 3호기를 시작으로 신고리와 신월성에 OPR1000이 들어서면서 설계 자립 능력은 95%로 올라갔다.
신규 원전 건설이 붐을 이루던 1992년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당시 한전)은 또 한 번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된다. UAE에 수출한 원자로와 동일한 모델인 140만kW급 신형 경수로 APR1400 개발에 착수하기로 한 것이다. OPR1000이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설계를 가져와 성능을 향상시킨 것이라면 APR1400은 순수 우리 힘으로 설계한 모델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발전용 원자로를 독자적으로 개발하겠다는 당찬 계획이었다.
처음 10년간은 시련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얀 백지상태에서 원전을 A부터 Z까지 설계하는 일은 엄청난 시행착오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한국형 원자로 개발은 2002년 정부로부터 표준설계 인가를 받으면서 비로소 빛을 볼 수 있었다. 현재 고리 원전 옆에 건설 중인 신고리 3, 4호기는 APR1400이 처음 적용된 원전이다.
차근차근 원전 기술을 습득하던 한국이 본격적으로 원전 수출을 꿈꾸기 시작한 시기는 2004년경이다. 에너지 위기에 지구온난화까지 겹쳐 원자력의 이용 가치가 주목을 끌면서 ‘원자력 르네상스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때마침 중국 시장 진출을 노리던 한국은 원천 기술 확보가 무엇보다 절실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원자로를 독자로 설계하고 직접 만들 정도로 성장했지만 일부 핵심 기술에서 종속을 벗어나지 못한 탓에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아주 작은 기술 하나가 수출에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정부와 한수원이 ‘원전 기술을 완전 자립하기 위한 발전방안(Nu-Tech2015)’을 수립한 것도 바로 이때쯤이다. 이 안은 원전을 해외에 수출할 때 어떤 장애도 받지 않도록 모든 원전 기술을 완전 자립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지난해 UAE에 원전 수출이 성사되면서 최근 이 계획은 2012년까지 조기 달성하는 쪽으로 수정됐다. 이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되면 2012년 한국은 원자력 발전소를 독자적으로 해외에 수출할 수 있는 기술 독립국이 되는 것이다.
경제성과 안전성 두 마리 토끼를 잡다
지난해 12월 수출 협약이 성사될 당시 UAE 관계자는 “한국 원자력 기술은 가격도 싸지만 안전성과 성능 면에서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한국이 10년에 걸쳐 개발한 APR1400은 과연 어떤 원자로일까.
외국의 원전들과 비교할 때 어떤 점이 장점일까. 최근 세계 시장을 주도하는 원전은 대부분 3세대 원전이다. 1960년대 전기를 생산하기 시작한 원전을 제1세대 원전이라고 본다면 1980년대 미국 스리마일 원전 사고를 전후해 안전성을 강화한 원전을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3세대 원전은 안전성과 경제성을 모두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1980년대 중반 개발이 시작된 모델을 뜻한다.
한국의 APR1400은 GE의 ABWR1350과 웨스팅하우스 AP1000, 미쓰비시 APWR1600과 함께 3세대 원전에 해당한다. 이번에 한국과 경합했다 탈락한 프랑스 아레바 EPR1600 모델 역시 같은 세대다. 한국의 APR1400과 프랑스 EPR1600, 일본의 APWR1600이 출력을 높여 경제성을 향상시키고, 설비를 개선해 안정성을 높인 방식이라면, AP1000은 원전 기계장치 수를 줄이고 고장확률을 감소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따라서 치열한 해외 수주전에서 한국과 경쟁하는 나라는 주로 프랑스와 일본이다. 이들 원전은 안전성과 경제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개발돼 수명이나 내진 강도, 연료 손상 가능성, 제어 방법이 거의 같다.
하지만 APR1400은 다른 원전과 뚜렷이 다른 점이 있다. 다른 원전은 냉각유로가 4개지만 APR1400은 2개라는 사실이다. 원자로에서 냉각유로의 개수는 증기를 생산하는 증기발생기 개수의 영향을 받는다. 즉 APR1400에는 증기발생기가 2대 있고, EPR과 APWR 모델은 증기발생기가 4대라는 뜻이다. 증기발생기는 원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무거우며, 가장 값이 비싼 장치에 속한다. 냉각유로가 적으면 그만큼 건설비나 운영비가 적게 든다.
한국은 OPR1000을 개발할 때부터 냉각유로 2개 방식을 채택했다. 그동안 원전 14기를 지으면서 이 분야에서 이미 독보적인 경쟁력과 기술을 확보해둔 상태다. 제3세대 원전 중 APR1400이 가장 경제적인 원전이라는 평가를 듣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APR1400은 제3세대 원전에서 안전성 측면에서도 앞서 있다.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원전들은 예기치 않은 사건과 사고를 막기 위한 장치를 개선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APR1400의 안전장치에는 다른 어떤 원전보다 많은 최신 과학기술이 숨어 있다. 한 예로 APR1400에는 원자로 내 배관이 터져서 핵연료의 온도를 유지하는 냉각재가 빠져나가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핵연료를 순식간에 냉각시키는 비상냉각계통이 들어 있다. 원자로 용기에 물을 직접 주입해 원자로가 녹는 최악의 상황을 막아주는 방식이다. 반면 이번 경쟁 상대였던 프랑스의 EPR1600은 냉각유로에 물을 주입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안전한 냉각계통을 만들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난제가 많았다. 특히 원자로에 주입된 냉각수와 사고가 났을 때 발생하는 높은 온도의 증기 사이에 일어나는 복잡한 상호 작용을 밝히는 과제가 최우선이었다. 원자로 내에서 일어날 복잡한 현상에 대해 해답을 찾지 못하면 설계에 반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APR1400 개발과정에서 한수원과 한국원자력연구원 연구자들은 수증기와 냉각수의 상호 작용을 규명하기 위한 실험을 수없이 반복해야 했다. ARP1400의 실물을 5분의 1로 축소한 ‘MIDAS’라는 모의실험장치도 만들었다.
한국 원전이 프랑스를 누른 비결에는 첨단 정보기술(IT)의 숨은 공로도 있었다.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는 주제어실은 원전의 사령탑이자 두뇌 같은 곳이다. APR1400의 제어실은 한국이 자부하는 여러 첨단 IT가 적용됐다. 발전소 곳곳에 설치된 수많은 센서가 보내온 각종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처리해 원자로를 항상 최적의 상태에서 운용할 수 있게 했다.
IT야말로 원전 사고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인 운전자의 오판을 완벽히 막아주는 안전판인 셈이다. 한국형 원전의 제어실에는 첨단 인공지능도 들어 있다. 사람이 내린 판단을 컴퓨터가 다시 판단한 뒤 서로 결과가 다를 경우 운영자에게 알려줌으로써 혹시 모를 실수를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APR1400만이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은 근무 환경을 고려해 제어실 곳곳에 적용한 감성공학이다. 방 배치나 모니터 구성, 색상까지 원전 종사자들이 보고 듣기 편하게 구성했다. 사소한 실수를 막으면서 쾌적한 조건에서 원자로를 운영할 수 있는 근무 환경을 만든 것이다. 이미 이 기술은 국내 원전에서 100회 이상 실험이 이뤄졌으며, 발전소 근무자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원전 운전 능력도 세계 정상급
원전 개발에서 한국이 후발주자라는 점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한 면이 많았다. 세계 원자력 시장이 침체기를 겪고 있던 1990년대 선진국들이 신기술 개발을 소홀히 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시행착오를 적게 겪으며 꾸준히 기술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번 원전 수출로 한국은 원자력 기술의 우수성뿐 아니라 원전 시공 능력과 운영 능력을 동시에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았다. 한국은 최근 30년간 20기의 원전을 꾸준히 건설하면서 건설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노하우를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다. 지금은 52개월 만에 원전을 건설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건설 기간을 줄이는 것은 원전의 경제성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한국은 세계가 따라올 수 없는 또 한 가지 강점이 있다. 바로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운전 능력이다. 2008년 원전 가동률은 미국이 89.9%, 프랑스가 76.1%, 일본이 59.2%인데 비해 한국은 93.4%를 기록했다. 이는 연료를 교체하는 정비 기간을 제외하면 어떠한 사
고나 사건 없이 원전을 안전하게 지속저으로 운영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이번 첫 원전 수출은 한국이 그간 꾸준히 축적한 설계와 시공, 운전 능력이 한꺼번에 결실을 맺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APR1400이 원자력 선진국에 비해 우수하다고 해도 아직 갈 길은 멀다. 아직 국산화하지 못한 5%의 기술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연료를 원자로에 장전한 연료량과 원전 사고를 예측하는 소프트웨어, 냉각수를 순환시키는 원자로냉각재펌프, 각종 계측 제어 설비, 그리고 본질적인 ‘노와이(know-why)’ 기술에 대한 추가 개발이 필요하다. 현재 계획대로라면 이들 기술은 2012년까지는 모두 국산화될 것으로 보인다. 또 APR1400의 후속 모델인 150만kW급 신형 원전인 ‘APR+’도 2012년 완성을 목표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APR1400이 해외 기술을 바탕으로 우리 손으로 만든 모델이라면 APR+는 첫 단추부터 마지막 단추까지 우리 손으로 직접 끼우는 100% 토종 원전이라고 할 수 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