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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 땀 뻘뻘 흘리며 먹는 한겨울 제맛 아귀

칼바람이 살을 에듯 옷깃을 파고드는 겨울이다. 그러나 춥다고 마냥 몸을 움츠리고 있으면 마음조차 움츠러드는 법! 이런 때일수록 집안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 아니라 밖으로 뛰쳐나가야 한다. 긴 겨울을 동면하듯 지내기엔 보고 즐길 것이 너무 많다. 스키나 보드를 타도 좋고, 입김을 내뿜으며 산에 오르는 일도 즐겁다. 얼음을 뚫고 빙어와 산천어를 낚고, 겨울 바다를 찾아 새해 계획도 다짐해 보자. 식도락을 빼놓고는 바깥나들이를 논할 수 없다. 추운 겨울에 어울리는 제철 음식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경인(庚寅)년 새해를 맞아 밥상에 오른 첫 번째 물고기로 아귀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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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는 겨울에 잡은 것이 가장 맛있다. 잡은 아귀를 간단히 손질해서해변에 널어두면 찬바람을 맞으며 꾸덕꾸덕 말라간다. 적당히 말린 아귀에다 콩나물과 갖은 양념을 잔뜩 넣고 커다란 솥에 쪄 내면 그 유명한 아귀찜이 된다. 추운 겨울에는 열을 내는 매운 음식이 제격이다. 아귀찜의 특징은 지독하게 매운 맛이다. 한 입씩 먹다 보면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물을 찾게 된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젓가락을 멈출 수 없는 것이 아귀찜의 마력이다.

아귀찜에는 미더덕이 들어가야 한다. 미더덕은 멍게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맛과 향으로 아귀의 비린내를 없애준다. 아귀찜에는 아귀보다 콩나물이 더 많이 들어간다. 이름은 아귀찜이지만 실상은 콩나물 찜이나 마찬가지다. 콩나물에 피로나 숙취를 풀어주는 성분이 많이 들어 있는 점이 바로 아귀찜이 술안주나 속 풀이음식으로 적합한 이유다.

가짜 미끼로 먹이 낚는 ‘악마의 물고기’

아귀(Lophiomus setigerus)는 아귀목 아귀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다. 우리나라 연안과 일본 홋카이도 남쪽, 동중국해, 인도양, 서태평양, 아프리카 해역 등에 분포하고, 바위가 많거나 해조류가 무성한 해저에 주로 산다. 같은 아귀목에 속하는 친척으로는 씬벵이류, 점씬벵이류, 부치류 등이 있다.

아귀는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처럼 흉악한 몰골을 하고 있다. 실제로 유럽이나 미국 등지에서는 아귀를 ‘악마의 물고기(devil fish)’라고 부르기도 한다. 몸통에 비해서 큰 머리는 위에서 짓눌린 것처럼 넓고, 허리와 꼬리가 짧은데다 입은 매우 커서 몸통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입속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세 줄로 늘어 있어 한번 붙잡은 먹이는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아귀는 커다란 입으로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먹어치운다. 자신보다 큰 상어를 두 동강 내어서 먹은 것이 위 속에서 발견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아귀는 사악한 지혜까지 갖춘 ‘죽음의 사신’이다.

아귀의 몸 표면은 바탕이 칙칙한데다 피부 곳곳에 털 모양의 가시와 돌기가 나 있어 움직이지 않으면 전혀 상대방의 눈에 띄지 않는다. 아귀는 꼼짝 않고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상대방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뒤 먹이사냥을 시작한다. 아귀 등지느러미의 앞 줄기는 길게 늘어져 자유롭게 움직이는 낚싯대처럼 변형돼 있고 그 끝에 달려 있는 부드러운 피막은 낚시 미끼 같은 역할을 한다. 낚싯대를 움직여 미끼를 흔드는 모습은 마치 사람이 하는 행동인 듯 영악하기 그지없다.

가짜 미끼에 홀린 사냥감이 사정권에 들어오면 상황은 순식간에 끝난다. 아귀는 커다란 입을 벌려 물과 함께 먹이를 통째로 삼켜버리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같은 자리에서 미끼를 흔들며 다음 먹이를 기다린다.

심해어가 갈매기를 습격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전은 ‘현산어보’에서 아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조사어(釣絲魚). 속명 아구어(餓口魚). 큰 놈은 두 자 정도다. 모양은 올챙이를 닮았다. 입이 매우 커서 입을 열면 몸 전체가 입처럼 보일 정도이다. 몸 빛깔은 빨갛고 입술 끝에 의사가 쓰는 침만 한 낚싯대가 두 개 달려 있다. 길이는 4~5치 정도다. 낚싯대 끝에
는 말총 같은 낚싯줄이 달려 있다. 낚싯줄 끝에 밥알 크기의 하얀 미끼가 달려 있는데, 다른 물고기가 이것을 먹으려고 다가오면 확 달려들어 잡아먹는다.”

마치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같다. 머리 위에 달린 낚싯대와 낚싯줄, 낚싯줄 끝에 달린 가짜 미끼, 잠복하고 있다가 갑자기 습격해서 먹이를 잡아먹는 모습까지 정약전은 아귀의 독특한 생김새와 먹이 사냥 방식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아귀는 심해에서 사는 물고기인데, 정약전은 어떻게 아귀가 사냥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정약전에게 이러한 사실을 전해주었던 이들은 또 어떻게 아귀의 생태적 습성을 알아냈을까.

문제의 답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 있다. 아귀는 심해어로 분류되지만 때에 따라 얕은 곳으로 헤엄쳐 나온다. 어민들은 아귀가 수심 7~8m 정도에 쳐 놓은 그물에 걸려 올라오기도 하고, 때로는 얕은 모래밭에서 잡히는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아귀는 바다 밑에 먹이가 적은 겨울철에 연안 부근 얕은 곳으로 이동하는 습성이 있다.

수면 가까이 헤엄치는 물고기를 잡아먹거나 심지어 물 위에 떠서 쉬고 있는 갈매기를 습격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얕은 곳에서 아귀가 사냥하는 모습을 직접 관찰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약전이 살던 시절에도 해녀가 있었다. 당시 해녀들이 흑산도 근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면 정약전이 이들로부터 아귀의 생태에 대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큰 입에 먹성 좋아 붙은 이름

아귀는 지역에 따라 아구, 아꾸, 망청어, 물꿩, 반성어, 귀임이, 꺽정이, 망챙어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방송매체의 영향인지 이제는 역시 아귀라는 이름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아귀라는 이름에 대해 ‘입이 크고 탐식성이 강
한 특징이 지옥의 아귀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그 유래를 설명한다.

아귀는 불가에서 계율을 어겨 아귀도에 떨어진 귀신을 뜻한다. 몸이 앙상하게 마르고 목구멍이 바늘구멍처럼 작아 음식을 먹을 수 없으므로 항상 굶주림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존재다. 과연 아귀와 정확히 일치하는 이미지라 할 만하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아귀’라는 말에는 ‘입’이라는 뜻이 있다.

아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커다란 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귀를 ‘커다란 입을 가진 물고기’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아귀가 게걸스럽고 먹을 것을 밝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귀는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기다릴 줄 알고, 많이 먹긴 하지만 먹을 수 있는 만큼만 먹는다. 이와 달리 저인망이다 뭐다 해서 이놈 저놈 가리지 않고 조그만 치어까지 싹쓸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다. 과연 어느 쪽이 진정한 아귀일까.


 
물텀벙이가 매콤한 아귀찜 된 사연

경남 마산의 토속음식이던 아귀찜은 이제 전국으로 퍼져 사람들의 입맛을 당기고 있다. 다양한 양념을 넣고 값비싼 생아귀를 사용해서 고급 요리로 탈바꿈하는 경향까지 나타난다. 그런데 ‘현산어보’에는 아귀를 식용한다는 기록이 나와 있지 않다.

사람들은 아귀를 언제부터 먹기 시작한 것일까. 사실 사람들이 아귀를 먹기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다. 예전에는 험상궂은 모습 때문인지 아귀를 잡아도 먹지 않았다. 인천에서는 아귀를 물텀벙이라고 불렀다.

그물에 아귀가 걸려들면 쓸모없는 고기라 배 밖으로 던져버리는데, 물에 빠지면서 텀벙텀벙 소리를 낸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아귀는 육지로 올라와도 찬밥 신세였다. 거름용으로밖에 쓰지 못해 바닷가에 그대로 쌓아두곤 했다. 이런 이야기까지 늘어놓지 않더라도 한국에 고추가 들어온 시기가 임진왜란 전후라고 보면 아귀가 지금의 아귀찜 같은 요리의 재료로 정착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추가 들어가지 않은 아귀찜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아귀가 오늘날처럼 인기 있는 요리가 된 데는 재미있는 사연이 전해진다. 마산에 살던 한 할머니가 해변에서 굴러다니는 아귀를 아깝게 여긴 나머지, 말라붙은 아귀에다 콩나물, 미나리, 된장, 파를 넣고 또 고추장을 듬뿍 넣어 맵게 조리했더니 의외로 맛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 요리가 어부나 인부에게 인기가 좋아 팔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의 아귀찜이라는 얘기다. 마산, 그중에서도 오래된 술집이 즐비한 오동동 네거리 일대는 지금까지도 아귀찜의 중심지로 남아 있다.

이태원 교사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세포생물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우리나라 전통 문헌에 나타난 과학 관련 내용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조선 후기 학자 정약전의 어류학서 ‘자산어보’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기행문식으로 정리한 ‘현산어보를 찾아서1~5(청어람미디어)’ 등이 있다.
 

2010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이태원 서울세화고 생물 교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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