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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넘은 광학법칙 깨뜨린 나노렌즈 개발



19세기 활약한 독일의 물리학자 에른스트 아베는 광학분야에 여러 업적을 남겼지만 그 가운데서도 ‘아베의 회절 한계(Abbe’s diffraction limit)’가 가장 유명하다. 회절은 빛이 크기가 파장 길이 정도인 구멍을 통과할 때 물결처럼 사방으로 퍼지는 현상이다.

두 점 사이의 거리가 빛 파장의 절반 이하일 경우 이런 회절 작용에 의해 두 점은 한 점으로 겹쳐 보인다. 이를 아베의 회절 한계라고 부른다. 아무리 현미경의 배율을 확대하더라도 이런 현상은 피할 수 없다.

광학현미경, 즉 우리 눈이 볼 수 있는 파장의 빛을 이용하는 현미경으로 양파껍질세포가 분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세포소기관인 리보솜은 볼 수 없는 이유다. 가시광선의 파장은 400~700nm(나노미터, 1nm=10-9m)인데, 양파껍질세포 크기는 수십μm(마이크로미터, 1μm=10-6m)로 큰 반면 리보솜은 수십nm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요즘 공포의 대상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도 너무 작아 광학현미경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광학의 한계는 전자현미경이 발명되면서 상당부분 해소됐다. 드브로이의 물질파 이론에 따라 질량이 있는 입자인 전자의 속도를 조절해 수십nm의 파장을 만들어 물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인플루엔자의 병원체가 바이러스로 밝혀진 것도 전자현미경 덕분이다. 그럼에도 전자현미경은 많은 한계가 있다. 영상을 얻으려면 진공이 필요하고 시료도 고체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시광선으로 이런 인위적인 조작 없이 좀 더 작은 물체를 보고자 하는 열망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국내 연구진이 가시광선 파장의 길이만큼 작은 나노렌즈를 통해 회절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면서 이런 꿈이 갑자기 현실로 눈앞에 다가왔다.



정밀하게 스스로 조립되는 마법

“좀 더 작은 렌즈를 만들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깎아서 만드는 기존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분자가 스스로 렌즈 모양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냄으로써 크기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죠.”

이번 논문의 공동 제1저자인 성균관대 화학과 홍병희 교수는 화학의 한 분야인 나노물질의 자기조립(self-assembly) 제조법을 연구하다가 물리학의 영역인 광학에서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홍 교수는 2000년 초 포스텍 화학과 박사과정 당시, 이번 논문의 교신저자인 김광수 교수의 지도 아래 칼릭스하이드로퀴논(CHQ)이라는 분자를 갖고 다양한 나노구조를 만들었다. CHQ는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사발처럼 생긴 분자인데, 분자끼리 규칙적인 형태로 배열하면서 나노튜브나 나노구(球) 같은 다양한 구조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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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Q 나노튜브의 결정을 키우는 실험을 하다 우연히 렌즈 모양의 나노구조를 발견했는데, 처음에는 성장 메커니즘을 몰라 재현하지 못했습니다. 여러 조건을 바꿔가며 실험하다 마침내 CHQ 결정에 비결정성 CHQ 필름이 덮여 있을 때 그 사이에서 표면 곡률이 완벽한 구에 가까운 나노렌즈가 성장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CHQ 결정 표면에서는 CHQ 분자가 끊임없이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서 에너지가 가장 낮은 상태로 천천히 변화한다. 그런데 떨어져 나온 분자들이 필름 아래 갇힐 경우에는 농도가 높아져 렌즈형태로 빠르게 자란다.

나노수준의 표면상태를 측정할 수 있는 원자힘현미경(AFM)으로 확인한 결과 나노렌즈는 완벽한 구의 곡면에서 3%도 벗어나지 않아 표면이 불규칙한 정도가 1nm 이하였다. 유리를 깎아 이렇게 정밀한 나노렌즈를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렌즈는 빛을 통과시키면서(투명하면서) 공기와 굴절률이 다른 광학부품인데, 표면이 매끈하고 조성이 균일해야 선명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확대경으로 흔히 쓰는 유리재질의 볼록렌즈는 굴절률이 1.5 정도다. 렌즈 표면의 곡률과 굴절률에 따라 투과하는 빛의 경로와 속도가 바뀌면서 이미지가 확대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한다.

“간격이 220~250nm인 줄무늬 패턴을 만들어 그 위에 나노렌즈를 올려놨습니다. 그리고 472nm 파장(녹색)에서 최대 세기를 갖는 광원을 이용해 상을 봤더니 놀랍게도 렌즈 안에서 간격이 확대된 줄무늬가 나타났습니다.”

기존 광학 이론에 따르면 이 파장대의 빛에서 구분할 수 있는 줄 간격의 최소 거리는 262nm다. 실제 실험에서는 300nm 정도도 구분하기 힘들다. 따라서 광학현미경만을 이용하면 줄무늬 패턴 대신 전체가 균일하게 연결된 면으로 보여야 한다.

그런데 나노렌즈를 통해 보면 줄 간격이 2배 정도 확대된 줄무늬가 뚜렷이 보였던 것. 기존 광학 이론대로라면 설사 볼록렌즈가 있어 상이 확대되더라도 줄무늬는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이유로 나노렌즈는 아베의 회절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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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파장 크기로 광학렌즈 만들다

“이 경우 중요한 요인은 렌즈의 모양이나 재질이 아니라 크기입니다. 어떤 모양이나 재질도 회절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렌즈 크기가 빛의 파장 길이 정도가 되면 기존의 기하광학 원리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번 논문의 공동 교신저자인 미국 컬럼비아대 물리학과 김필립 교수는 저널에 실린 주요 논문에 대해 토론을 하는 자리인 ‘네이처 포드캐스트’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기하광학(geometric optics)이란 빛이 지나가는 경로를 선으로 표시하며 반사와 굴절만을 고려해 광학현상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선으로 표현된 빛의 궤적이 볼록렌즈나 오목렌즈를 통과하며 꺾이고 한 점에 모이는 그림을 물리 교과서에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노렌즈를 통과해 진행하는 빛의 경로는 나노렌즈의 곡률과 굴절률을 고려해 기하광학으로 계산한 빛의 경로와 다르다. 렌즈를 통과하면서 빛이 더 심하게 꺾일 뿐 아니라 빛의 경로도 휘어진다. 그 결과 렌즈의 초점거리도 기하광학이 예측한 2.0μm보다 훨씬 짧은 0.3μm 정도다. 초점거리란 한쪽에서 평행하게 들어온 빛이 렌즈를 통과한 뒤 한 점(초점)에 모일 때 렌즈에서 초점까지의 거리다.

홍 교수는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현상이 기하광학의 예측에는 맞지 않지만 빛에 대한 좀 더 일반적인 이론인 맥스웰방정식에서는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라며 “공간에 렌즈를 놓고 빛이 통과하는 시뮬레이션을 했을 때, 즉 맥스웰방정식을 시간에 대해 풀었을 때 이 실험과 비슷한 결과가 나옴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맥스웰방정식은 전자기현상을 기술하는 4개의 방정식으로 이를 이용하면 전자기와 관련된 어떤 현상도 설명할 수 있다. 맥스웰은 이 방정식을 토대로 빛도 전자기파의 일종임을 밝혔다. 따라서 나노렌즈를 통과하는 빛의 경로에 대한 맥스웰방정식을 풀 경우 누구나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도 시도를 해보지 않았던 것.

“빛의 파장 크기인 광학렌즈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아무도 안 했기 때문에 이런 시뮬레이션을 한 사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는 나노기술 덕분에 이런 행운을 잡은 것이죠.”

연구팀의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보면 나노렌즈를 통과하면서 빛이 심하게 꺾일 뿐 아니라 경로가 휘어지는 초굴절 현상이 나타난다. 그 결과 초점거리가 렌즈의 크기와 곡률로 계산한 것보다 훨씬 짧아진다. 그렇다면 나노렌즈의 초굴절 현상과 회절 한계 극복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논문의 공동 제1저자인 포스텍 화학과 박사과정 이주영 씨는 “초굴절 현상을 통해 렌즈 표면과 가까운 근접장 영역에서 초점이 형성돼 확대된 영상을 얻을 수 있다”며 “나노렌즈는 근접장 빛인 소멸파가 지닌 물체의 미세 구조 정보를 원거리장으로 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아베의 법칙에 따르는, 즉 고전적인 광학이론에서 생각하는 빛을 원거리장(far-field) 빛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물체 표면 근처에는 파장보다 훨씬 짧은 영역의 정보를 갖고 있는 근접장(near-field) 빛인 소멸파가 있다. 문제는 소멸파의 세기가 거리에 따라 급격히 감소하기 때문에 조금만 떨어져도 사라진다는 것.

실제로 근접장의 소멸파를 이용해 가시광선으로 파장의 절반 이하인 크기를 구분할 수 있는 광학기기에 대한 이론은 이미 1928년 나왔고 1982년 스위스의 물리학자 디에테르 폴 박사는 근접장스캐닝광학현미경(NSOM)을 만들어 아베의 법칙을 극복한 상을 얻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NSOM은 렌즈를 이용해 상을 얻는 방식이 아니라 한 번에 한 점의 소멸파 데이터를 측정해 이를 모아 이미지로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게다가 장치가 복잡하고 민감해 제대로 된 데이터를 얻기가 무척 어렵다.

이번 결과는 기존의 방법으로는 제작이 불가능한 크기인 나노렌즈를 분자들의 자기조립 현상으로 합성해 기하광학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새로운 개념의 물리 현상을 발견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연구를 이끈 포스텍 김광수 교수는 “논문이 나가고 난 뒤 세계 곳곳에서 밀려드는 문의와 요청으로 업무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지경”이라며 “나노렌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좀 더 명쾌히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9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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