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루테닌 그물망 사이에 구형 글리아딘 엉긴 상태
글루텐(gluten)은 7세기 중국의 승려들이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식물성 식재료로 고기의 촉감을 낼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우연히 밀가루 반죽을 찬물 속에서 주무르자 녹말이 녹아 나오면서 고무 같은 덩어리만 남았던 것. 실제로 이런 식으로 반죽을 처리해 남은 덩어리는 글루텐이 70~80%나 된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콩고기나 버섯고기의 핵심 재료도 알고 보면 글루텐이다.
물론 다른 곡류의 배젖도 비슷한 방식으로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공급하지만 종마다 단백질 종류가 다르다. 예를 들어 쌀의 배젖에는 글리아딘에 해당하는 단백질이 거의 들어 있지 않다. 한편 옥수수나 쌀의 저장 단백질을 글루텐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밀 글루텐같은 성질을 내지는 못한다. 따라서 식품 분야에서 말하는 글루텐은 보통 밀 글루텐을 의미한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이 염주알처럼 일렬로 연결된 뒤 입체적으로 뭉친 구조다. 글루텐 중 글루테닌 단백질은 용수철처럼 길게 늘어난 형태로 양쪽 끝 부분에 황화수소(-SH)가 있는 아미노산인 시스테인이 있어 다른 글루테닌의 시스테인과 이황화결합(-S-S-)을 이뤄 서로 연결된다. 글루테닌 단백질 사이의 이황화결합이 계속 이어지면서 거대한 단백질 그물망이 형성된다.
한편 글리아딘 단백질은 공처럼 생겼는데, 분자 사이에 이황화결합을 만들지는 않는다. 대신 글리아딘 단백질끼리 수소결합이나 이온결합으로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다. 글루테닌 그물망 사이사이에 글리아딘 단백질이 들어가 엉겨 있는 상태가 바로 글루텐이다.
밀알을 분쇄해 배와 속껍질은 분리하고 배젖 부분만을 갈아 모은 게 바로 밀가루다. 밀가루는 탄수화물이 70%, 단백질이 10% 내외 들어 있고 나머지는 수분(14%)과 지방, 미네랄 등으로 이뤄져 있다. 탄수화물은 과립 형태로 존재하는 전분이고 단백질의 80%가 글리아딘과 글루테닌이다.
밀가루에 물을 넣고 반죽을 하면 밀가루 사이의 글루텐끼리 만나면서 구조가 바뀐다. 영국 브리스톨대농업과학과 피터 셔리 교수는 “덩어리를 반죽할 때 일어나는 변화를 아직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며 “다만 단백질 사이의 기존 이황화결합이 끊어지고 새로운 결합이 생기는 과정을 통해 글루텐 네트워크가 재구축된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무튼 반죽이 잘된 밀가루 덩어리는 독특한 물성을 보인다.
즉 탄력이 있어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늘리면 쭉 당겨지면서 늘어진 상태로 바뀐다. 형태를 유지하는 힘은 글루테닌에서 오고, 늘어나도 끊어지지 않는 이유는 글리아딘 때문이다.
글루텐에서 글리아딘과 글루테닌을 따로 분리해 반죽을 만들어 보면 이런 특징의 차이를 명확히 알 수 있다. 글리아딘 반죽은 풀처럼 찍찍 늘어난다. 글리아딘 단백질끼리는 화학결합을 하지 않고 물리적으로만 상호작용해 쉽게 변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글루테닌 반죽은 탱탱하고 잘 늘어나지 않는다. 결국 이 둘이 섞인 글루텐은 성질도 그 중간인 셈이다.
다양한 면류를 생산하고 있는 풀무원의 식문화연구원 조중건 면팀장은 “글리아딘의 길게 늘어나는 성질과 글루테닌의 힘이 합쳐져야 쫄깃한 식감이 나온다”며 “밀가루로 만든 면의 식감이 다른 곡류로 만든 면과 차별화되는 이유”라고 말했다.
면에는 호주밀이 딱! 그 이유는?
강력분(强力粉), 중(中)력분, 박(薄)력분. 밀가루 포장지에 써 있는 용어로 밀가루 힘이 강하냐, 보통이냐, 약하냐를 일러준다. 이 밀가루의 힘을 결정하는 요소가 바로 글루텐의 함량이다. 밀가루의 분류는 글루텐이 포함된 단백질 함량에 따라 결정되는데, 강력분은 13%, 중력분은 10%, 박력분은 8% 내외다.
밀가루를 굳이 3가지로 나눈 이유는 밀가루에 들어 있는 글루텐 함량에 따라 밀가루의 용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강력분은 주로 빵을 만들 때 쓰는데, 발효과정에서 생긴 이산화탄소나 수증기가 촘촘한 글루텐 그물망에 갇혀 빠져나가지 못해 빵이 잘 부풀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른 조건은 똑같이 두고 밀가루만 달리해 빵을 만들어 보면 강력분이 가장 많이 부풀고 박력분이 가장 덜 부푼다. 박력분은 과자를 만들 때 쓴다. 상대적으로 전분이 많아 바삭바삭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이 나기 때문이다. 강력분으로 만든 과자는 단백질
함량이 높아 맛이 뻑뻑하다.
글루텐 함량이 중간인 중력분은 주로 면을 만들 때 쓴다. 밀반죽을 얇게 펴거나 길게 늘여 면을 만들려면 글루텐이 충분히 있어야 하지만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맛을 내려면 너무 많아도 안 되기 때문이다. 국내 최대 밀가루 제조업체인 대한제분의 종합연구소 김기수 차석연구원은 “강력분으로 면을 만들 경우 너무 딱딱하고, 박력분은 쉽게 풀어져 면 형태가 유지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글루텐 함량이 밀가루 품질의 전부는 아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가 수입하는 밀은 거의 미국산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호주산이 40%에 이른다. 같은 중력분이라도 호주산 밀이 면에 좀 더 적합한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김 연구원은 “미국밀로 만든 면은 씹을 때 딱딱 끊어지는 느낌이 든다면 호주밀로 만든 면은 약간 탱탱한 느낌, 즉 쫄깃쫄깃한 식감을 준다”며 “이런 미묘한 차이는 글루텐보다도 녹말의 상태와 더 밀접히 연관돼 있다”
고 말했다. 즉 호주밀은 미국밀에 비해 α-아밀라아제라는 녹말분해효소가 덜 들어 있다. 따라서 녹말분자의 길이가 더 길어 면의 탄력성이 큰 것. 또 밀가루색이 누렇게 변하게 만드는 폴리페놀옥시다제라는 효소도 적어 밀가루 색이 더 밝다. 김 연구원은 “밀의
품종이나 재배환경에 따라 밀가루의 특성이 다르다”며 “호주에 제면용 밀가루 시장을 뺏긴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품종개량으로 면에 적합한 밀을 만드는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수한 간장 맛의 비밀
보리빵, 옥수수빵 같은 이름으로 팔리는 제품의 성분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보릿가루나 옥수수가루보다 밀가루가 더 많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면류도 마찬가지여서 냉면의 경우 정작 메밀보다는 밀가루가 더 많이 들어 있는 제품이 많다. 김 연구원은 “예를 들
어 쌀 100%로 만든 빵이라고 써 있는 제품은 밀가루 대신 밀에서 추출한 글루텐을 넣은 경우”라고 덧붙였다.
밀가루는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쓴 거나 다름없는 셈이다. 게다가 글루텐을 뽑기 위한 밀가루는 등급이 낮은 편이므로 오히려 밀가루를 섞은 식품만 못할 수도 있다. 밀가루에서 추출한 글루텐은 제빵용이나 제면용뿐 아니라 다른 용도로도 유용하게 쓰인다. 콩고기나 버섯고기에 첨가된 글루텐은 고기를 씹는 느낌을 줄 뿐 아니라 채식주의자들에게 부족하기 쉬운 단백질의 보충원이 된다. 그러나 글루텐에는 인체가 만들지 못하는 필수아미노산의 함량이 높지 않아 양질의 단백질원은 아니다. 따라서 채식주의자는 양질의 단백질
이 풍부한 콩을 같이 먹어야 한다.
계명대 식품영양학과 고봉경 교수는 “대신 글루텐은 구수한 맛을 내는 아미노산인 글루탐산이 풍부해 간장이나 조미료 원료로 많이 쓴다”며 “콩 단백질에 비해 값이 저렴하다는 것도 장점”이라고 말했다. 또 글루텐은 제품에 점도와 탄력성을 높여주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이나 케첩 같은 다양한 식품의 첨가물로도 널리 쓰이고 있다. 사람이 먹는 식품뿐 아니라 가축이나 애완동물, 물고기의 사료에도 글루텐이 많이 들어 있다. 단백질원이 될 뿐 아니라 단단하고 물에 잘 풀어지지 않는 콩알만 한 형태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밀알이 싹을 틔워 광합성을 하기 전까지 영양분으로 쓰이는 저장 단백질인 글리아딘과 글루테닌의 복합체 글루텐. 밀가루에 물을 넣고 반죽할 때 형성되는 글루텐의 새로운 네트워크는 오늘날 밀이 가장 넓은 경작지를 차지하는 작물로 선택될 수 있는 원동력인 셈이다. 모처럼 온 가족이 모여 직접 밀가루반죽을 만들어 칼국수나 수제비를 해 먹으며 글
루텐의 힘을 온몸으로 느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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