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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따뜻한 봄 휴일 아침. 바람도 쐴 겸 창문을 열고 뉴스 좀 볼까. 살살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이 커튼을 몇 번 흔들자 벽걸이 TV가 나온다. 모닝커피에 베이글을 곁들여 먹으며 TV를 보고 있는데, 손목에 차고 있는 휴대전화에 “현재 몸의 혈당 수치는 정상”이라는 내용의 문자가 뜬다. 몸속 혈당센서에서 온 메시지다.

금빛 줄무늬가 돋보이는 재킷을 입고 기분 좋게 공원으로 산책을 나선다. 성큼성큼 힘차게 걷자 옷에 연결돼 있던 MP3 플레이어가 켜지면서 발걸음에 맞춰 경쾌한 음악이 귓가에 흐른다. 어릴 적 열병을 앓아 청력이 상실된 그의 귓속에는 보청기가 숨어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을 청신경으로 전달하고 있다.

전선과 배터리가 사라진 미래의 주인공은 나노기술과 손을 맞잡은 압전체다. 압전체는 특별한 장치 없이도 진동이나 압력을 받으면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우리 생활 곳곳에 ‘압전체 발전기’를 설치한다면 전기 코드 없이 편리하게 전자기기를 이용할 수 있다. 심지어 압전체가 들어간 나노발전기를 제작할 수 있다면 배터리 없이 몸속에서 혈당을 재는 센서나 초소형 보청기를 만들 수 있다. 입고 다니면 전기가 생겨 휴대전화나 MP3 플레이어가 충전되는 옷도 등장할 수 있다. 소형 압전체가 몰고 올 놀라운 미래, 어떻게 가능할까.


 

걸을 때마다 전기 생기는 ‘파워 셔츠’

 

솔솔 부는 바람, 사람의 움직임, 자동차 엔진의 떨림, 빌딩이나 다리의 흔들림….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곳곳에 버려지는 에너지, 특히 기계적 에너지가 많다. 압전체를 이용해 이런 에너지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기술이 바로 ‘에너지 하베스팅’(energy harvesting)이다.

햄스터가 쳇바퀴를 돌릴 때 햄스터에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는 얼마나 될까. 미국 조지아공대 왕종린 교수팀은 햄스터에 나노발전기 4개를 넣은 특수 재킷을 입히고 발전량을 측정했다고 미국화학회 저널인 ‘나노 레터’ 3월호에 발표했다. 측정 결과 햄스터가 쳇바퀴를 돌릴 때마다 나노발전기가 작동해 0.1~0.15V의 전기가 나왔다. 발전량이 너무 적어 햄스터 1000마리를 모아야 휴대전화를 충전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이는 압전효과를 이용해 동물의 불규칙한 근육 움직임에서 전기를 생산한 첫 사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나노발전기는 얇은 폴리머 기판에 산화아연 나노선(나노막대)이 하나 붙어 있는 구조인데, 햄스터가 움직일 때마다 이 나노선이 구부러졌다가 펴져 전기가 만들어진다(압전효과). 사람 머리카락 폭보다 훨씬 가는 산화아연 나노선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압전체인 셈이다. 산화아연 나노선은 지름이 100~800nm(나노미터, 1nm=10-9m)이며 길이가 100~500μm(마이크로미터, 1μm=10-6m)이다.

지난해 왕 교수팀은 둘레에 산화아연 나노선들을 수직으로 심은 섬유 두 가닥을 꼬아 움직일 때마다 전기가 발생하는 ‘파워 셔츠’를 개발해 ‘네이처’ 2월 14일자에 발표하기도 했다. 두 가닥의 섬유는 병 닦는 솔 2개가 붙어 있으면 털이 맞닿듯이 양쪽의 나노선들이 서로를 비벼댈 때 압전효과 때문에 전기가 발생한다. 발전량을 측정한 결과 1cm 길이의 섬유 2가닥으로 구성된 ‘나노발전기’에서 약 4mV(밀리볼트, 1mV=10-3V)의 전기가 나왔다. 연구팀은 이처럼 특수한 ‘발전(發電) 섬유’로 만든 직물 1m2에서 80mV까지 전기가 생길 수 있다고 추정했다.

많은 가닥의 발전 섬유로 만든 셔츠나 재킷만 입으면 옷 속에 나노발전기가 빽빽이 들어차 사람이 걷을 때는 물론 숨을 쉴 때도 전기를 발생시킬 수 있다. 연구팀은 앞으로 5~10년 뒤면 입는 컴퓨터뿐 아니라 휴대전화, MP3 플레이어 같은 휴대형 전자기기를 충전할 수 있다고 예상한다. 나노발전기를 군복에 넣을 수 있다면 행군할 때마다 무전기를 충전하는 상황도 쉽게 떠오른다.

발전 섬유로는 의복뿐 아니라 커튼, 텐트 등도 제작할 수 있다. 머지않아 시원한 산들바람이나 무심결에 나눈 수다 덕분에 커튼이나 텐트가 흔들려 전기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아직까지 발전 섬유에 단점이 하나 있다. 빨래하면 물에 젖어서 문제라는 것. 현재 발전 섬유에 들어가는 산화아연이 습기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인체 약물전달시스템의 필수품


나노로봇이 몸속을 떠돌며 암세포를 탐지해 약물을 전달하거나 나노센서가 혈관 속의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혈당 수치를 모니터한다. 과학자들이 꿈꾸는 나노세계의 미래다. 하지만 나노로봇이나 나노센서가 작동하도록 꾸준히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배터리가 없다는 게 문제다.

기존 배터리는 나노로봇보다 크기가 너무 크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 게다가 대부분의 배터리는 리튬, 카드뮴 같은 독성 물질이 들어가 몸속에 집어넣기 위험하다. 반면 왕 교수팀이 선택한 산화아연은 독성이 없어 인체에 무해하기 때문에 산화아연 나노발전기는 몸속에 삽입한 나노기기에 결합시킬 수 있다.



왕 교수팀은 2006년 산화아연 나노선이 압전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확인해 ‘사이언스’ 4월 14일자에 발표할 때부터 이 나노선이 체내 나노기기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연구팀은 사파이어 기판에 금 나노입자들을 배열시킨 뒤 금 입자들에서 산화아연 나노선들을 성장시켰다. 이 나노선들은 지름 20~40nm에 길이 200~500nm로 다양하게 뻗어 있었는데, 원자현미경의 탐침 끝으로 하나씩 건드리자 압력을 받아 3~6mV의 전기가 발생했다. 바로 산화아연 나노선에서 압전효과를 확인한 것.

이듬해에는 산화아연 나노선을 이용한 나노발전기를 개발해 ‘사이언스’ 4월 6일자에 발표했다. 왕 교수팀이 기판 위에 수백 개의 산화아연 나노선을 수직으로 배열시킨 뒤 그 위에 지그재그 요철이 있는 전극을 두고 진동시켰더니, 나노선들이 지그재그 전극과 주기적으로 만나며 전기가 ‘쏟아졌던’ 것. 이 나노발전기는 1cm2당 4W의 전기를 발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연구팀의 예상이다. 지난해 11월에는 50mV의 전기를 생산하는 나노발전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왕 교수는 나노발전기가 몸속에서 혈류, 혈압, 혈당을 측정하는 나노센서에 결합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예를 들어 혈액이 흐를 때 생기는 난류에 따라 흔들리는 나노발전기가 전기를 만들면 나노센서는 각종 정보를 측정해 무선으로 보내는 원리다. 또 나노발전기는 인체에 이식하는 약물전달시스템에 유용하다. 현재 인슐린이나 항암제는 체외에서 투여하지만, 앞으로 약물전달시스템이 나노발전기와 결합하면 체내에 삽입돼 스스로 제시간에 약물을 공급할 수 있다.


‘유비쿼터스 센서 네트워크’의 꿈


흔들리는 다리가 붕괴할 위험은 없는지, 공기가 얼마나 오염돼 있는지, 무릎관절에서 뼈의 손실은 없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길은? 다리, 공기, 무릎 등을 항상 감시하는 센서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기존 센서는 배터리가 다하면 갈아줘야 하는 게 단점이지만, 압전체와 결합하면 다리의 진동, 바람, 사람의 움직임 덕분에 전기를 얻을 수 있다.

국내에서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중심으로 우리 주변에 설치한 센서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유비쿼터스 센서 네트워크’를 연구하고 있다. 여기에도 압전체로 전기를 공급하는데, 기존 센서와 압전체 발전기를 하나의 칩으로 제작해 자가 발전이 가능한 센서를 만들려고 노력 중이다. 현재는 마이크로전자기계시스템(MEMS) 기술을 동원하고 있다.

각종 센서에 나노기술이 적용되면 놀라운 세상이 펼쳐진다. 나노센서는 음식물에 든 미량의 오염물질을 찾아내고 혈액에서 질병과 관련된 분자를 탐지할 수 있다. 물론 압전체를 이용한 나노발전기가 필수다. 또 압전체의 도움을 받는다면 심장박동조절기의 배터리를 바꿀 필요가 없고 나노선들이 배열된 초소형보청기 덕분에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전기가 나오는 ‘마법의 돌’ 압전체. 은밀한 중에 우리를 도울 또 다른 마법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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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로봇 움직이는 나노발전기의 힘

2009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이충환 기자
  • 일러스트

    박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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