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에서 헤엄치며 입으로 곤충을 잡아먹는 곰이 거의 고래 같은 동물로 진화할 수도 있다.”
1859년 11월 24일, 이런 내용을 담은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이란 책이 영국 런던에서 출간됐다. 저자는 박물학자였던 찰스 다윈.
당대 학자들은 곰이 어떻게 고래가 될 수 있냐며 다윈을 비웃었다. 한술 더 떠 다윈의 논리대로라면 원숭이가 인간의 조상이 되겠다며 조롱했다.
하지만 최근 과학자들은 다윈의 주장이 옳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고래의 유전체에서 하마, 사슴, 기린과의 공통 요소를 발견한 것이다.
곰은 아니지만 적어도 ‘하마가 고래로 진화했다’는 건 알아낸 셈이다. 다윈 역시 당대의 비판에 조심스럽게 대응하긴 했지만 진화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1872년 ‘종의 기원’ 6판을 내놓을 때까지 그는 자신의 진화론을 계속 ‘진화’시켰다.
지금도 세계 곳곳의 과학자들은 때론 새로운 종을 찾고 때론 DNA의 흔적을 더듬으며 진화론을 연구하고 있다.
사회과학자들은 인간 본성과 행동에 대한 답을 진화론에서 찾으며, 문학 작품에서 다윈의 영향을 읽어내는 인문학자들도 있다.
만약 ‘종의 기원’ 개정판이 계속 나온다면 올해 출간될 최신판엔 이런 내용이 모두 들어가지 않을까.
여기 ‘종의 기원’ 최신판인 ‘진화대백과사전’이 있다. 다윈 탄생 200주년인 동시에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인 올해, ‘진화대백과사전’을 넘기며 19세기 다윈부터 21세기판 다윈들까지, 그들이 들려주는 진화론에 취해보자.
찰스 다윈을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만든 ‘종의 기원’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다윈이 주장한 자연선택과 진화론의 핵심 내용은 뭘까. 당시 사람들은 다윈의 진화론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종의 기원’과 진화론에 대한 다이제스트가 여기 있다.
31859년 11월 24일 영국에서 책 한 권이 출판됐다. 녹색 양장본으로 500여 쪽에 이르는 이 책의 가격은 14실링. 노동자의 보름치 평균 임금에 해당할 만큼 비쌌다. 하지만 초판 1250부는 그날로 모두 매진됐고, 그로부터 두 달이 채 안된 1860년 1월 7일 제2판 3000부가 출판됐다. 그 책이 바로 ‘종의 기원’으로, 저자인 찰스 다윈을 일약 유명하게 만든 진화론의 고전이다.
진화의 과학적 근거로 등장한 자연선택
그런데 이런 ‘인기’는 저자인 다윈이나 출판인 존 머레이가 예상했던 상황은 아니었다. 사실 머레이는 책이 제대로 팔릴까하는 걱정에 출판을 망설였고, 다윈은 말썽이 될 만한 종교적 내용이나 인간의 진화에 관한 내용을 다루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다윈이 원했던 책 제목은 ‘자연선택을 통한 종과 변종의 기원에 관한 요약 에세이’였지만, 머레이는 제목을 ‘자연선택을 통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로 바꿨다.
‘종의 기원’이 유례없는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시 문화적 권위를 과시하던 찰스 디킨스나 조지 엘리엇 같은 문인들의 작품에 비하면 ‘종의 기원’ 인기는 초라했다. 게다가 ‘종의 기원’처럼 진화론을 다룬 로버트 체임버스의 ‘창조의 자연사적 흔적’은 1844년 출판돼 19세기 내내 ‘종의 기원’보다 훨씬 많이 팔렸고 널리 읽혔다.
사실 진화론은 19세기 초부터 영국 사회의 급진적인 정치세력과 일부 의료인 사이에서 호응이 대단했다. 다만 생물 종이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연히 만들어졌다는 생각은 당시 유럽 사회의 위계를 파괴하고 도덕적 타락을 일으킬 수 있다는 프랑스 무신론자들의 시각으로 매도되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영국 학자들 사이에서는 진정한 과학이란 자연현상에서 도출된 귀납과학이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물질이 스스로 생명체를 조직해가는 성질을 지닌다고 보는 프랑스 생물학자 라마르크의 진화론은 제대로 된 귀납적 과학이론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체임버스는 ‘창조의 자연사적 흔적’에서 무신론적 태도로 여겨진 라마르크류의 진화론이 던지는 정치적 불안감을 씻어내기 위해 애썼다. 그는 생물의 진화가 신이 창조한 자연법칙에 따라 점차 진보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자연법칙이 어떤 것인지는 모호했다. 생명체가 처음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전기 자극으로 작은 생명체가 생겨났다는 당시의 한 연구결과를 인용했는데, 이는 곧 학계의 웃음거리가 됐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창조론은 과학적 가설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라마르크의 진화론이나 체임버스의 진화론 역시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종의 기원’을 쓰던 다윈의 목표는 무엇보다도 자연선택이라는 종 형성 메커니즘에 대한 가설이 과학적으로 고려할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데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과학이 신비중의 신비로 여겨지던 종의 기원을 다룰 힘이 있음을 보여주는 셈이 될 것이었다.
‘종의 기원’ 서론은 이런 다윈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그는 우선 종의 기원에 대한 당시 항간의 이론들이 미흡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모든 생물 종이 독립적으로 현재 모습처럼 창조됐다는 이론은 사실상 왜 그렇게 다양한 생물 종이 존재하는지 말해주지 못한다. 그 생물 종들이 살아가는 물리적 조건들에 관한 논의가 결여돼있어 실제로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간 자연철학자들이 생각해낼 수 있었던 진화 원인이라야 기후나 음식 같은 환경요인 정도였다. 하지만 딱따구리의 부리처럼 나무껍질 속의 벌레를 잡을 수 있는 구조가 외부환경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을까? 특정 조류에 의해서만 씨를 퍼뜨릴 수 있으며 특정 곤충을 통해서만 가루받이가 되는 겨우살이의 구조가 외부환경이나 그 식물의 ‘의지’를 통해 만들어질 수 있을까?
따라서 다윈은 ‘종의 기원’ 처음 네 장(章)에서 우선 자연선택이 강력한 적응진화의 메커니즘으로서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생명체의 형질을 다양하게 분화시켜 왔으리라는 점을 집요하게 강조한다. 그리고 그 이후 장들에서 구체적인 종 진화의 증거를 보여주는 해부학적, 발생학적, 식물지리학적 그리고 지질학적 사례들을 현란하게 제시한다.
세지윅과 허셜은 반대, 헉슬리와 후커는 찬성
‘종의 기원’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다양했다. 소설가이며 사회주의자로 유명한 목사 찰스 킹즐리는 열광적인 칭찬의 편지를 보내왔다. 다윈이 옳다면 자신이 오랫동안 지녀온 믿음들을 많이 버려야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킹즐리는 신이 최초의 생명체를 생명체 스스로 진화시켜갈 수 있도록 창조했다는 생각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는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했다.
사실 다윈은 초판에서 진화를 온전히 자연적인 현상으로만 기술했다. 하지만 킹즐리처럼 무게 있는 독자들이 자신이 그려낸 진화를 신의 작품으로 간주하며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모습을 보면서, 제2판에서는 독자들이 ‘종의 기원’에 나타난 진화를 신의 작품으로 읽을 수도 있는 구절들을 슬며시 삽입했다. 예를 들어 초판 마지막 문장에서 ‘한 두 원시적 형태에 생명의 숨결이 깃들고’라는 구절을 ‘한 두 원시적 형태에 창조주를 통해 생명의 숨결이 깃들고’라고 고쳐 썼다.
중진학자들의 대변지로 여겨지던 ‘애시니엄’지의 한 필자는 다윈의 진화론에 내포된 인간의 기원에 대한 의미를 즉각 읽어냈다. 그리고 인간은 신이 기획한 결과가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생겨난 산물이라는 논의는 비판과 심판의 대상이라고 판정했다.
다윈에게 지질학을 가르쳤던 케임브리지대 아담 세지윅은 인간의 도덕적 지위를 위협하는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윈의 우상이었던 존 허셜은 올바른 과학이란 귀납과학이라는 점을 보여주면서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이 귀납과학과는 거리가 먼 뒤죽박죽 논설이라고 평했다.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드넓은 아프리카 초원에서도 다윈이 말하는 생존경쟁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푸념의 편지를 자연사박물관의 로버트 오웬에게 보냈다. 생리학자 에드워드 카펜터 역시 자유주의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개나 달팽이가 다른 종에서 유래한다는 이론은 신학적으로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논평했다.
하지만 다윈 측근 학자들은 강력한 연합전선을 형성하면서 그를 옹호했다. 토머스 헉슬리는 기회가 될 때마다 서평을 쓰면서 다윈을 옹호했다. 헉슬리는 ‘웨스트민스터 리뷰’지 서평에서 ‘종의 기원’을 신학적 도그마로부터 해방을 주도할 ‘자유주의의 병기고에서 꺼내 온 강력한 총기’에 비유했다.
식물학자인 조셉 후커는 원예학 저널에 서평을 쓰면서, 종이 자연에 의해 선택되는 원리는 우수한 딸기 품종이 원예인의 손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1839년 맬서스의 ‘인구론’ 읽고 ‘자연선택’ 떠올려
그렇다면 ‘종의 기원’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서문에서 다윈은 1831년부터 1836년까지 20대에 해도(海圖)를 작성하는 영국군함 비글호에 자연학자로 승선해 남미와 태평양 지역을 돌아다니는 동안 종의 기원이라는 신비 중의 신비를 밝힐 수 있을 듯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우선 파타고니아 지역에서 본 거대한 파충류 화석은 분명 현존하는 파충류와 비슷한 유형의 동물임에 틀림없었다. 화석으로 남아 있는 그 거대한 파충류가 그 지역에서 흔히 발견되는 파충류들과 흡사한 모양의 동물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느 날 끼니를 위해 사냥했던 레아는 다윈이 알고 있던 다른 지역의 레아와 거의 같은 모양의 새였지만 몸집이 작았으며 분명 다른 종으로 분류돼야 할 조류였다. 어떻게 그렇게도 닮은 그러나 다른 두 종이 각각 인근 지역에 나뉘어 서식하게 됐을까? 이들이 혹여 같은 조상으로부터 현재 모양으로 조금씩 변해온 건 아닐까?
무엇보다 다윈은 비글호 항해 막바지에 들렀던 갈라파고스 군도의 거북과 핀치로부터 종의 기원에 대한 실마리를 느꼈다고 밝힌다. 각 섬에 서식하는 거북의 등껍질 모양이 조금씩 달랐으며, 핀치의 형태 특히 부리가 눈에 띄게 달랐다. 군도에서 가까운 대륙 연안에는 이들 핀치와 매우 비슷한 다른 종의 새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군도 핀치들의 조상이 대륙에서 이주해온 뒤 현재와 같은 모양으로 변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다윈이 자연선택을 통해 형질이 변화하면서 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시기는 비글호 항해를 끝내고 런던에서 생활하던 몇 년 사이였다. 갈라파고스 군도에 머물던 5주 동안 섬마다 거북의 등껍질 모양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수집한 핀치 역시 각 개체가 어느 섬에서 포획됐는지 기록하지 않았다. 설사 다윈이 그 차이를 눈치 챘다 하더라도 그것이 종의 기원을 설명할 단서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다윈이 런던으로 돌아오고 몇 달이 지난 1837년 3월, 조류학자 존 굴드는 다윈이 수집한 갈라파고스 핀치를 3가지 다른 종으로 분류했다. 다윈은 자신이 채집한 핀치가 다른 종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소식에 놀랐으며, 그해 7월 갈라파고스의 핀치뿐 아니라 모든 생물 종은 변화한다는 확신을 노트에 적어 넣었다.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다윈의 표현에 따르면 “오만한 인간은 자신이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며 신과 동물 사이에 자신을 끼워 넣는다. 좀 더 겸허하게, 나는 인간이 동물로부터 창조됐다고 믿는다”고 썼다.
1838년 9월 다윈은 경제학자 토마스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으며 재배식물과 사육동물의 인위선택과 비교되는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을 생각했다. 그달 28일 다윈은 자연에서 너무 많은 개체가 태어나면 경쟁 상태가 되고, 경쟁의 와중에 약한 개체는 도태되며 강하고 적응하는 개체만 살아남아 자손을 남길 것이라는 맬서스의 명제를 정리해 기록했다.
이어서 개체가 도태되거나 선택되는 과정이 되풀이될수록 지상의 생물들은 생존조건에 보다 적합한 개체가 될 것이라고 추론하면서, 그 과정에 ‘자연선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생존경쟁이라는 상황에서 유리한 변이는 보존되고 불리한 변이는 파괴될 것이다. 자, 이제 마침내 작업을 시작할 이론을 얻었다”고 썼다.
1839년 1월 사촌 엠마와 결혼한 다윈은 1842년 런던 기차역에서 가까운 시골인 다운이라는 마을로 이사해 그 후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이사하던 해 다윈은 이미 자연선택을 통한 형질의 변화를 설명하는 스케치를 만들어뒀고, 2년 뒤인 1844년에는 상당한 분량의 에세이를 써뒀다.
1844년의 에세이를 왜 발표하지 않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종의 기원’에서와 마찬가지로 1844년 에세이에서도 신 또는 인간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세간의 반응을 두려워한 듯싶다. 또 자연선택이 과연 생명체들의 온갖 형질의 기원을 설명해줄 수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윈은 찰스 라이엘이나 후커 같은 지인들에게는 에세이 내용을 전하며 의견을 묻기도 했다. 1856년 라이엘은 종의 진화를 시사하는 내용이 담긴 알프레드 월리스의 논문을 다윈에게 보여줬고, 다윈은 월리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이 종과 그 변이에 관심이 있음을 밝혔다.
1858년 6월 18일 다윈은 월리스가 보낸 자연선택을 통한 종의 진화에 관한 논문을 받았다. 당시 다윈 역시 ‘자연선택’이라는 가제 아래 종의 진화를 보여주는 방대한 책을 저술 중이었다.
보름이 채 지나지 않은 7월 1일, 다윈은 월리스의 논문을 린네학회에서 발표하면서 옛날에 써 뒀던 자신의 글도 함께 발표했다. 그리고 곧장 오랫동안 준비해오던 긴 글의 내용을 축약한 요약본으로 ‘종의 기원’을 쓰기 시작해 1859년 10월 1일 교정 작업을 끝냈다.
새로운 진화론의 서문을 열다
‘종의 기원’이 출간될 즈음 인류 역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다. 다윈 자신도 1871년 ‘인간의 유래’를 출판해 인간의 신체적 형질은 물론 온갖 정신적 특징 심지어 인간집단의 성격 역시 결국은 다른 동물들의 연장선상에서 진화해왔음을 주장했다.
하지만 과연 자연선택이 온갖 생명체의 형질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는 다윈의 가장 열렬한 후원자들조차 확신을 갖지 못했다. 라이엘, 헉슬리, 후커 등 대부분의 동료들조차 자연선택의 개념 자체나 자연선택이 진화의 주된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의문을 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헉슬리나 후커가 ‘종의 기원’을 찬양하며 다윈을 옹호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분명 당시 진화론 논쟁이 단순한 과학이론에 대한 논쟁이 아니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월리스에 의해 ‘다위니즘’(Darwinism)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론을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종의 기원’의 과학적 성과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종의 기원’ 이후 과학자들은 자연선택과 같은 이론들을 검증하는 진지한 연구를 시작했다. 진화론 연구가 ‘종의 기원’이 출간된 뒤에야 진지하게 과학의 영역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종의 기원’은 분명 진화론 논쟁을 마감해 준 책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진화론 논쟁을 촉발시킨 책이었다.
WORLD INTERVIEW
로버트 그랜트
1793~1874년. 영국 에든버러 출생.
19세기 가장 저명한 생물학자 중 한 명. 런던대 비교해부학과 첫 교수를 역임했다.
진화론의 스승
다윈이 동네 친구들이나 사촌형제들과 곤충채집에 열을 올리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의학을 공부하던 에든버러대 시절 초반에도 다윈은 먼저 그곳에서 공부하던 형 에라스무스와 곤충채집에 몰두하곤 했다. 형이 공부를 끝내고 에든버러대를 떠난 뒤 다윈은 ‘플리니학회’라는 자연을 공부하는 학생모임에 참가한다. 1827년 3월 27일 그 모임에서 다윈은 굴 껍질 안쪽에서 흔히 발견되는 후추 열매 모양의 검은 반점이 사실은 그곳에 기생하는 거머리의 알이라는 발견 내용을 발표한다. 그리고 해면류의 애벌레가 섬모를 이용해 헤엄치는 모습을 관찰한 내용도 이야기한다. 다윈이 해양생물을 관찰할 수 있었던 데는 이 모임을 이끌던 의학교수 로버트 그랜트의 역할이 컸다. 그랜트 교수는 모든 동물이 기본적으로 비슷한 구조로 이뤄져 있으며, 다만 고등동물은 그 구조가 더 복잡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원시적인 형태의 동물 구조를 공부함으로써 인간의 기관과 조직의 기원을 알 수 있다고 가르쳤다. 다윈에게는 해면이 고등동물의 어버이라고 말하면서 라마르크를 공부할 것을 권했다.
그는 뜨거웠던 원시지구가 점차 차가워지는 환경 때문에 더운 피를 지닌 고등동물이 생겨났다고 생각했다.
그랜트 교수는 진화론자였던 것이다.
당시 에든버러대에서 그랜트 교수가 유일한 진화론자는 아니었다. 지질학을 가르치던 제임슨 교수는 “라마르크씨는 어떻게 단순한 벌레에서 고등동물이 진화돼 나왔는지를 보여줬다”고 진술함으로써 ‘진화’라는 단어를 현대적인 의미로 사용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됐다. 다윈은 이미 10대 시절 진화론을 알게 됐다는 말이다. 동시에 다윈은 영국 사회에서 진화론이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점도 감지했다. 플리니학회에서는 인간이 신의 배려 아래 독특하게 창조됐음을 부정하는 진화론적 논의가 인간의 도덕성을 훼손함으로써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게 되리라는 우려가 제기됐고, 의대생들 사이에서는 “물질주의적 무신론이 횡행하고 있다”는 두려움 섞인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이다.
로버트 피츠로이
1805~1865년. 영국 서포크 출생.
날씨 예측을 정확히 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한 선구적인 기상학자였다.
지질학 세계로의 안내자
비글호 선장 피츠로이는 모든 생명체가 신이 창조한 모습 그대로라고 믿었을 뿐 아니라 성서 내용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믿었던 사람으로 그려지곤 한다. 하지만 이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성서를 손에 들고 휘두르던 말년의 모습일 뿐이다. 영국해군은 남미 지역의 해도를 정교히 만들기 위해 1825~1830년 비글호를 띄웠고, 피츠로이는 중간에 항해에 참여해 2년간 승선했다. 두 번째 항해를 앞둔 젊은 선장 피츠로이는 항해술이나 측량술은 물론 과학 특히 지질학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항해를 통한 과학의 발전이 영국 미래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자부심을 지닌 사람이었다. 흔히 이야기되는, 전통적인 종교적 자연관을 고수하려는 신실한 기독교인 피츠로이와 새로운 자연관을 만들어가면서 종교를 잃어가던 다윈 사이의 대조적인 모습은 비글호 항해 당시 두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다윈은 생애 후반까지 자신을 유신론자로 표현했다. 비글호 항해 당시 피츠로이는 성서 내용을 통해 지질학을 읽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연학자로서 다윈의 미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 첫 권을 항해를 시작하는 다윈에게 선물한 사람은 라이엘이 아니었다. 다윈에게 비글호 항해를 권했던 케임브리지대 교수 헨슬로도 아니었다. 라이엘에 매료돼있던 아마추어 지질학자 피츠로이였다. 배 멀미로 인한 고통만 젖혀 놓는다면, 비글호 항해 중 다윈은 매우 건강하고 활발한 젊은이였다. 그는 틈만 나면 육지나 섬에 상륙해 동식물을 수집했고, 비글호는 며칠 또는 몇 달 뒤 미리 약속한 날짜에 다시 다윈을 승선시켰다. 다윈은 적지 않은 시간을 피츠로이와 함께 지내야 했다. 훗날 스티븐 제이 굴드는 피츠로이의 지독한 성서중심적 자연관 때문에 수년간 함께 식사하며 대화를 나눠야 했던 다윈이 이에 반발하면서 새로운 생명관을 키워나갈 수 있었으리라는 추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항해 중 두 사람이 종교관이나 자연관의 차이로 심각한 갈등을 일으킨 것 같지는 않다. 기록에 남아 있는 두 사람 사이의 폭발적인 갈등은 노예제에 대한 의견이 다른 탓에 발생한 다소 단순한 한 차례의 사건이었다.
알프레드 월리스
1823~1913년. 영국 웨일즈 출생.
자연학자, 탐험가, 지질학자, 인류학자이자 생물학자였다.
자연선택 제안한 동료
1858년 월리스는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론 논문을 다윈에게 보냈다. 다윈은 월리스의 논문을 먼저 발표하지 않고 이전에 쓴 자신의 글을 월리스의 논문과 함께 발표했다. 곧이어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됐고,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론에 ‘다위니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런 발표 과정을 두고 다윈이 공정하지 못한 행위를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심지어 다윈이 월리스의 아이디어를 훔친 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다윈은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공신력 있는 학회에 월리스의 논문이 발표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고, 함께 발표된 두 편의 글은 분명 다윈 자신이 몇 년 전 써서 미국의 식물학자 애서 그레이 같은 친구들에게 보여줬던 내용이었다. 더구나 월리스가 다윈에게 보낸 논문은 짧고 거친 글이어서 린네학회에서 발표됐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했다. 이 점은 함께 발표된 다윈의 초록도 마찬가지였다. ‘종의 기원’과는 그 무게와 호소력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다윈은 월리스가 자신과 똑같이 ‘자연선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에 특히 놀랐고, 월리스의 이론이 자신의 이론과 거의 똑같은 주장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두 사람이 생각한 자연선택의 내용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다윈이 생각한 자연선택은 주로 동일한 개체군 안에서 개체 사이의 경쟁으로 일어나는 결과였다. 하지만 월리스는 이미 분명한 차이를 지니는 아종 또는 변종 사이의 집단적 경쟁으로 일어나는 선택을 염두에 두고 자연선택이라는 용어를 썼다. 다윈이 특히 강조했던 개체변이 형질들 사이의 선택작용은 1858년 월리스의 논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윈은 월리스와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인간형질의 진화에 대한 이견은 끝까지 좁히지 못했다. 1870년 월리스는 인간의 형질만큼은 자연선택의 산물로 설명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월리스는 남미와 말레이시아 등 여러 지역의 토착민들과 여러 해 함께 살았다. 그들 중에는 문명사회와 전혀 접촉하지 않고 야만적인 삶을 영위하는 부족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지적 능력이 뒤처진다고 볼 수 있는 이유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월리스는 인간의 진화만큼은 어떤 초자연적인 요소가 개입돼 형성됐다고 주장했다.
김기윤 박사는 서울대 과학교육과를 졸업한 뒤 미국 오클라호마대에서 과학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한양대 등에서 과학사를 강의하고 있다. ‘콜럼버스가 바꾼 세계’ ‘토마스 헉슬리’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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