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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같은 제2의 양자혁명

양자를 ‘스타’로 만든 ‘순간이동’

과거와 현재를 포함해 3명과 식사할 수 있다면 당신은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세계 최초로 양자 원격전송 실험에 성공한 오스트리아 비엔나대 안톤 자일링거 교수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을 가장 먼저 꼽았다. 그에게 최근의 양자 얽힘 실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어서란다. ‘유령’같은(spooky) 작용이라며 양자 중첩과 양자역학의 확률론적 성격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이 양자(상태)의 ‘순간이동’이라는 마술 같은 이야기를 믿어 줄까? 하지만 최근 양자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을 설득할 수 있는 강력한 증거들을 실험에서 찾아냈다. 그리고 이 증거들을 이용해 양자암호를 개발했고, 양자컴퓨터에도 바짝 다가섰다.
이제 아인슈타인은 잠시 잊자. 제2의 양자혁명을 예고하는 양자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됐다.

100년 전만 해도 세상은 훨씬 단순했다. 우주는 평화로웠고, 세계는 상식 범위 안에서 움직였다. 이상하게 행동하는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 양자역학이 나타났다. 이 녀석은 이성적인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 원자와 입자의 가장 근본적인 질서를 뒤흔들었다. ‘유령’이나 할 수 있는, 동시에 두 방향으로 움직이기는 이 녀석의 가장 큰 장기였다. 도대체 왜? 1920년대 제1차 양자혁명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1980년대부터 서서히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1990년대 마치 SF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과학적으로 확인됐다. 양자가 ‘순간이동’한다(정확히 말하면 양자‘상태’가 원격전송된다)! 이 사실이 실험으로 확인되는 순간 물리학계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양자암호와 양자컴퓨터, 양자통신이 하루아침에 ‘스타’로 떠올랐다. 덩달아 철학자들도 바빠졌다. ‘실재’와 ‘존재’가 뭔지 다시 고민해야 했다. 바야흐로 ‘제2차 양자혁명’이 시작됐다.

아인슈타인의 ‘불평’에서 시작?
역설적이게도 제2차 양자혁명은 아인슈타인의 ‘불평’에서 시작됐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자역학의 확률론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그에게 측정은 이미 정해진 물리량을 읽는 것(고전물리학)이지 측정 자체가 여러 가능한 결과들 중에서 확률적으로 정해질 수는 없었다.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 “아무도 달을 쳐다보지 않으면 달이 없다는 말인가?”라며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확률론적인 해석에 반발했다.

1935년 아인슈타인은 드디어 양자역학의 확률론적인 면을 무너뜨릴 계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양자역학의 확률론적인 측정이 자신이 주창한 특수상대성이론과 양립할 수 없음을 보임으로써 양자역학이 불완전한 이론체계임을 증명하려고 했다. 여기에는 양자얽힘(quantum entanglement)이라는 개념이 관련돼 있다.

양자역학에서는 하나의 물리계가 멀리 떨어진 두 지점에 걸쳐 있을 때 한 지점의 측정 결과가 나머지 한 지점의 측정 결과와 상관관계를 갖는다고 해석한다. 이를 양자얽힘이라고 한다.

양자역학에서는 측정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측정할 때 확률적으로 정해진다. 그런데 양자얽힘에 따라 한 쪽의 측정 결과가 다른 한 쪽의 측정 결과와 상관관계가 있어야 한다면 한 쪽을 측정하는 순간 그 영향이 다른 쪽으로 바로 전달돼야 한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바로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결론은 어떤 것도 빛보다 빨리 전달될 수 없다는 특수상대성이론의 전제에 위배된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이 옳았을까?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흥미진진해진다. 아인슈타인이 죽은 뒤 1964년 아일랜드의 물리학자인 존 벨은 아인슈타인의 양자얽힘에 대한 생각이 옳은지 검증해볼 수 있는 실험을 제안했고, 1982년 프랑스 물리학자인 알랭 아스뻬가 실제로 이 실험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과는 양자역학의 예측이 옳은 것으로 판명났다. 가령 지구와 안드로메다은하처럼 두 지점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또 양쪽의 측정이 독립적으로 이뤄지더라도, 결과는 서로 상관관계가 있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나 할까. 이를 ‘비국소성’(non-locality)이라고 부른다. 한 곳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최근 스위스 제네바대 니콜라스 지생 교수는 이를 실험으로 확인해 ‘네이처’ 8월 14일자에 발표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양자얽힘에 대한 한쪽의 측정이 다른 한쪽에 영향을 준다면 빛보다 최소 1만 배 이상 빨라야 한다. 이는 양자역학의 비국소성을 고전물리학의 체계 내에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음을 뜻한다.

물론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점이 있다. 양자얽힘의 상관관계를 이용하더라도 빛보다 빠른 속도로 정보를 전달할 수는 없다. 양쪽의 측정 결과는 실험자가 의도한 대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어서 원하는 정보를 다른 쪽에 보낼 수는 없다. 나중에 측정결과를 서로 비교해보면 상관관계를 갖고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이런 의미에서 제2차 양자혁명은 양자측정과 함께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양자암호도 양자측정의 기묘한 점을 이용했다. 비유를 들어 설명해보자.
사람을 구분할 때 성별과 나이 모두 사용할 수 있다. 성별로 구분할 때에는 여자(0), 남자(1)로, 나이로 구분할 때는 젊음(0), 늙음(1)으로 표현하자.

만약 여자를 성별로 구분한다면 100% 여자(0)지만, 나이로 구분하면 젊을 수도 있고 늙을 수도 있다. 갑이 을에게 비트 0을 보낸다고 할 때 성별로 보내면 여자를 보낸다는 말이다. 즉 을이 여자를 받을 때 성별로 받으면 100% 여자고, 비트로는 0이 돼 갑이 보낸 비트와 을이 받는 비트가 100% 똑같다.

그런데 만약 을이 이 여자를 나이로 받는다면 젊고(50%), 늙고(50%)의 방식이 돼 비트로는 0(50%), 1(50%)이 된다. 즉 갑이 보내는 방식(성별 또는 나이)과 을이 받는 방식이 같으면 갑이 보낸 비트와 을이 받는 비트가 100% 동일하지만 방식이 다르면 둘의 비트가 같은지 다른지 확신할 수 없다.

양자측정 하다 보니 원격전송까지
양자암호는 바로 이런 특성을 이용한다. 양자암호는 송신자와 수신자가 큐비트(양자비트)를 두 가지 방식으로 보내고 받고 나서, 두 사람이 보낸 방식과 받은 방식을 비교해 두 방식이 같은 비트들만 모으는데, 이것이 비밀키가 된다. 이를 일회용난수표로 사용하면 도청이 절대 불가능한 통신을 할 수 있다.

IBM연구소 찰스 베넷 박사는 대학생 시절 기숙사 룸메이트인 스티븐 위스너에게 이런 방식으로 위조지폐를 방지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들었는데, 1984년 길레스 브라사드와 함께 양자암호를 발명하는 데 이 아이디어를 활용했다. 1989년에는 세계 최초로 양자암호 실험장치도 만들었다.

그리고 1993년 마침내 베넷 박사는 동료 5명과 함께 양자얽힘을 이용해 양자상태를 모른 채 양자를 멀리 전송하는 양자 원격전송(quantum teleportation)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SF소설에나 나오는 순간이동을 연상케 하는 양자 원격전송은 완전히 새로운 공간이동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봇물 터지듯 양자 원격전송과 관련된 수많은 연구가 쏟아졌다. 1997년 안톤 자일링거 교수는 세계 최초로 양자 원격전송 실험에 성공하며 양자역학의 새 시대를 예고했다.

또 지생 교수는 2002년 세계 최초로 양자암호를 상용화시켜 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가 개발한 양자암호시스템은 현재 제네바 주정부가 선거 결과를 전송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세상이 원래 양자역학이라고?
제2차 양자혁명은 인식론의 변화도 암시한다. 뉴턴이 한때 누렸던 루카시안 석좌교수직을 10년 동안 지킨 영국의 라이트 힐 경은 1986년 영국왕립학회의 ‘프린키피아 탄생 300주년’ 기념연설에서 “뉴턴역학을 사용하는 연구자들을 대표해 대중이 뉴턴역학의 예측가능성을 믿도록 오도한 데 대해 사과한다”고 말했다(1960년 이후 뉴턴역학의 예측가능성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됐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인식론의 변화는 힐 경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양자역학은 결정론 자체를 부정한다. 양자측정은 현재 상태를 단순히 있는 그대로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확률에 따라 여러 상태 중 하나로 변화시킨다. 따라서 양자측정 전후의 양자상태는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도를 도라고 하면 더 이상 그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는 노자의 가르침을 연상케 한다.

그렇다면 원래 양자역학적인 세계가 어떻게 해서 고전역학적으로 보이는 걸까?
이에 대한 한 가지 설명으로 ‘결잃음 현상’이 있다. 결잃음 현상은 어떤 물리계가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얽힘 상태를 만드는데, 주변을 무시하고 보고자 하는 물리계만 관측할 때 고전역학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한다. 다세계해석 같은 설명도 있다.

영국의 물리학자 로저 펜로즈는 ‘황제의 새 마음’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의식이 양자적인 중력이론에 따른 양자측정과 관련될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또 미국 MIT 물리학과 교수인 맥스 테그마크는 인간의 뇌가 양자역학적인 효과가 유지되기에는 결잃음이 너무 크다고 주장한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는 세계는 훨씬 복잡하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재밌고 구미가 당긴다.
끝으로 한 가지 더, 혹시 양자 원격전송으로 인간을 순간이동시킬 수 있을까? 한마디로 불가능해보이지만 만일의 경우에도 안심은 된다. 원격전송이 내 몸을 복사하는 것도 아니고, 나의 양자상태를 모르는 채 원격전송하기 때문이다.

김재완 교수는 >;
미국 휴스턴대에서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삼성종합기술원 계산과학팀장, KAIST 연구 부교수를 지냈다. 현재 고등과학원 계산과학부 교수로 있으면서 양자암호, 양자컴퓨터, 양자통신 같은 양자정보과학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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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김재완 고등과학원 계산과학부 교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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