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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잘해야 살아남는다는 절박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우리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유아들을 외국인 보모에게 맡기고 무리를 해서라도 방학이면 초등생 자녀를 외국에 보낸다.
과연 영어가 유창하려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뛰어난 과학자가 되려면 영어실력은 기본일까?
외국어 학습과 관련된 최근 연구결과를 살펴보면서 영어열풍이 불가피한 현상인지, 비이성적인 집단최면인지 판단해보자.
인생이란 외국어와 같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잘못 발음하기 마련이다.
- 크리스토퍼 몰리
새 정부가 공식 출범하기 전부터 ‘영어몰입교육’ 논란이 일더니 최근 들어 영어열풍이 더욱 거세게 불고 있다. 영어로만 수업한다는 영어유치원은 비싼 수업료에도 대기자가 줄을 잇고 있으며 공교육 영어수업 시작 시기도 현재 초등학교 3학년에서 조만간 1학년으로 앞당겨진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국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프랑스도 최근 영어공교육을 강화한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한국어라는 고유의 말과 문자가 있어 사는데 하등 불편함이 없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라는 복병을 만나 고전하고 있다. 우리말은 어떻게 배웠는지 기억에도 없지만 술술 잘 나오는데, 왜 영어는 초중고 10년을 배우는데도 외국인과 기본적인 대화도 나누기 어려울까. 사람이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모국어와 영어 구사능력이 같이 요구되는 ‘이중언어’ 시대의 파고를 헤쳐나가자.
언어습득, 결정적 시기 존재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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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시기란 용어는 동물행동학 분야에서 처음으로 쓰였는데, 인간과 동물의 행동발달이 가장 용이하게 이뤄지는 최적의 시기를 의미한다. 오스트리아의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는 갓 부화한 새끼 거위들이 소위 결정적 시기(출생 후 36시간 이내)에 적절히 움직이는 대상에 대해 추종반응을 보이고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각인’(imprinting)이 일어난다고 보고했다. 로렌츠를 어미로 여겨 졸졸 따라다니는 새끼 거위들의 모습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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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습득에 결정적 시기가 있다는 가설은 신경심리학자인 에릭 레넨버그가 1967년에 출간한 ‘언어의 생물학적 기초’란 책을 통해서 널리 알려졌다. 레넨버그는 아이들이 모국어를 습득하는데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민감한 시기가 존재하고, 대략 2세에서 사춘기(대략 12~13세)까지가 그 시기에 해당한다고 했다. 이런 주장은 실어증에 걸린 아이들의 재활 연구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사춘기 이전에 실어증에 걸린 아이들은 치료를 잘 받으면 언어 능력을 상당히 회복하는 반면에, 사춘기 이후에 실어증에 걸린 사람들의 경우에는 언어 능력이 정상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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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자벨은 외할아버지가 7살까지 농아인 엄마와 함께 어두운 방에서 양육했다. 이자벨도 발견될 당시에는 지니처럼 언어 능력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니와 달리 이자벨은 심리학자들이 수행한 프로그램으로 언어 능력을 정상적으로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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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결정적 시기 가설에 맞지 않는 현상이 농아 아동들의 미국수화학습을 연구한 결과에도 나타난다. 수화를 배우는 농아 아동들의 나이가 많을수록 수화의 성취도는 점진적으로 감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점진적인 변화는 성취도가 어느 시기 이후 급격히 떨어진다고 예측하는 결정적 시기 가설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외국어 습득의 결정적 시기 존재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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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근의 인지신경심리학 연구들에서는 외국어 습득의 결정적 시기 가설을 반박하는 결과를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 국립병원 마이클 치 박사팀은 중국어-영어 이중언어자들이 단어 생성 과제를 수행하는 동안 촬영한 fMRI 영상을 분석한 결과 브로카 영역에서 외국어 습득연령에 따른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허시 교수팀의 연구 결과에서 후기 이중언어자가 언어에 따라 처리 영역이 일치하지 않는 결과는 이들이 외국어를 늦게 배워서가 아니라 능숙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즉 치 박사팀의 연구에서는 후기 이중언어자의 제2언어 능숙도가 초기 이중언어자와 대등한 반면에 허시 교수팀의 연구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이러한 해석은 뇌가 언어를 처리할 때 외국어를 습득하는 연령보다 능숙도가 더 중요한 변수임을 시사한다.
한편 외국어 습득에서 결정적 시기 가설의 타당성에 대한 연구는 이중언어자의 제2언어 능력을 어떤 측면에서 평가하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결과를 보여 준다. 이중언어자의 발음을 평가한 연구에서는 습득 연령이 결정적인 변수임을 지지하는 연구결과가 많다. 즉 어릴 때 외국어를 접할수록 원어민의 말을 잘 알아듣고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이 가능하다. 반면 어휘 습득과 문법을 평가한 연구에서는 습득 연령과 제2언어 능력이 서로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캐나다로 이민 온 이탈리아 사람들의 발음을 분석한 한 논문을 보면 이민을 왔을 때 나이보다는 이후 얼마나 영어를 많이 사용했는가가 정확한 발음을 내는 데 더 중요한 변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어 조기교육은 바람직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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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세계적인 흐름에 발맞추어, 국내에서도 1997년부터 초등학교에서 영어 공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점점 더 강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흐름은 사교육 분야에도 영향을 미쳐서 전체 사교육비 중에서 약 30% 정도가 영어 학습에 사용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렇지만 조기영어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기교육에 대한 확고한 이론적 배경은 앞에서 논의해왔던 언어 습득의 결정적 시기 가설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결정적 시기 가설은 모국어 습득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앞에서 기술한 것처럼 모국어 습득에서조차 결정적 시기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는 증거들도 존재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외국어 습득에 결정적 시기 가설을 적용하는데 대해서는 부정적인 결과들을 보여 주는 연구결과들이 많다. 즉 외국어를 어릴 때 학습하는 것이 모든 언어 영역에서 성인에 비해 우수한 결과를 보이지는 않는다. 더욱이 신경심리학적 연구들은 외국어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중언어자의 경우에는 외국어 습득연령에 따른 뇌의 언어 처리 패턴이 차이가 나지 않음을 보여 준다.
만약 외국어 습득에서 결정적 시기의 영향이 그렇게 확고한 사실이 아니라면 이것은 조기영어교육의 기반을 흔드는 부메랑이 될 것이다. 서울대 영어교육과 이병민 교수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실시하고 있는 조기외국어교육 프로그램을 국내 초등학교에서 실시하는 영어 교육과 비교한 2002년도 연구에서 외국어 습득의 결정적 가설을 지지할 만한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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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효과 면에서 불확실한 조기영어교육 실시는 오히려 아이들의 인지적, 정서적 측면에서 부작용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즉 아이들이 새로운 외국어 습득 환경에서 상당 기간 동안 말을 하지 않는 침묵의 시기(non-verbal period)가 존재하는데, 그 시기는 학습자의 연령이 낮을수록 더 길어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결론적으로, 외국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습득 연령뿐만 아니라 습득 환경 및 습득한 외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 또한 학습자의 동기를 고양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제2언어 습득에서 학습자 개인의 동기와 해당 외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학습자의 태도가 중요한 예측변수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말 영어가 필요하다고 절실하게 느낄 때 진정한 ‘영어몰입교육’이 가능해지는 셈이다.
남기춘 교수 >;
고려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텍사스대에서 언어심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언어심리학과 인지신경과학을 연구하고 있으며 고려대 부설 지혜과학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외국어 습득은 얼마나 열성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냐에 달려 있으므로 나이가 들어서 배울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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