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백50년 전 몽골군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은 자랑스런 문화유산 중 하나다. 나무판에 불경을 새긴 경판만 8만여장이 넘고, 새겨진 글자는 무려 5천2백만자이며 제작에 동원된 사람은 1백30만명이나 된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선조들의 비법에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고려 고종 18년(1232)으로 되돌려보자. 몽골군 2차 침략으로 찬란한 문화유산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역사의 뼈아픈 한 페이지가 시작되는 해다. 임금을 비롯한 온 국민의 피와 땀으로 만든, 2백년 불교 역사의 전통이 고스란히 새겨진 초조대장경판도 무사할 수 없었다. 사리타이가 이끄는 몽골의 불길질로 대구 부인사에 보관돼 있던 초조대장경판은 하룻밤 사이 처참한 잿더미로 변했다.
그러나 조정의 대응이란 한 뼘도 안되는 강화도로 쫓겨가는 일이 고작이었다. 최충헌에서 수십년 대물림으로 이어지는 무신정권의 향락과 부패로 대응 한번 제대로 못했다. 영문도 모르고 전쟁에 휩싸인 국민은 믿을 곳도 의지할 곳도 없는 절망의 현실에서 조정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최우를 비롯한 집권세력은 사람들의 마음을 한곳에 모을 수 있는 커다란 이벤트가 필요했다. ‘불타버린 대장경을 다시 새기자! 그래서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자’는 깃발을 높이 들었다. 초조대장경을 새기자 공교롭게도 거란군이 물러간 과거의 예가 있었으므로, 이 슬로건은 국민적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드디어 고종 23년(1236), 나라의 곳곳에서 나무를 베어 넘기고 대패로 다듬어 부처님의 말씀을 나무판에 새기는 대 역사가 시작됐다. 그로부터 16년의 세월이 흐른 고종 38년(1251), 고려인이 몸과 마음을 바쳐 이룩한 팔만대장경판(정식 이름은 고려대장경판)은 드디어 완성된다.
4t 트럭 70대 분량의 규모
팔만대장경이라 했으니 경을 새긴 경판(불경을 새겨 넣은 나무판자)이 8만여장이라는 점은 짐작이 간다. 정확한 숫자는 조사한 학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8만1천2백58장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다.
경판 한장 한장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우선 길이는 5종류가 섞여 있으나, 68cm와 78cm짜리가 대부분이다. 너비는 24㎝, 두께는 3㎝ 정도다. 대체로 15인치 LCD모니터 2대를 이은 크기이며 너비는 이보다 조금 좁다. 경판의 무게는 나무의 종류와 길이에 따라 다르나 평균 3.4kg 정도로 대형 노트북 컴퓨터와 비슷하다. 따라서 전체 무게는 2백80t. 4t 트럭에 싣는다면 70대 분량이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많은 화물차가 한꺼번에 줄지어 달린다면 끝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말이나 소가 끄는 달구지가 전부인 당시를 상상한다면 그 엄청난 규모가 짐작된다.
뿐만 아니다. 경판에 정성스럽게 새겨진 글자 수는 앞뒷면을 합쳐 한장에 6백40여자이다. 따라서 전체 팔만대장경판의 글자 수는 5천2백만자나 된다. 이런 큰 숫자는 얼른 규모가 파악되지 않는다. 5백년 조선왕조 내내 만들어온 왕조실록의 전체 글자 수와 맞먹는다면 이해가 될까.
경판을 만드는 과정을 잠깐 알아보자. 우선 나무를 베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다행히 우리 산에서는 경판을 새기기에 적당한 나무를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최근 경판의 재질을 전자현미경으로 분석한 결과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경판나무로 선택받은 영광의 주인공들임이 밝혀졌다. 이 나무들은 글자를 새기기에 적당한 성질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잎도 피기 전의 삭막한 산 속에서 화사한 봄꽃을 무리지워 피움으로써 멀리서도 금새 찾아낼 수 있다. 몽골군에 점령당한 빼앗긴 산에서 몰래 베어 오기에는 이런 나무가 안성맞춤이다. 베어내 바로 판자를 켜고 소금물에 삶아 음지에서 천천히 말린다. 소금물에 삶는 이유는 나무를 말리는 과정 중 갈라지고 비틀어지는 단점을 줄일 수 있다는 선조들의 경험에서 얻은 살아있는 과학지식 때문이다.
다음은 글자 쓴 종이를 판자 표면에 뒤집어 붙이고 새기는 과정이다. 양 모서리에 경판을 보호하고 인쇄할 때 취급이 편하도록 손잡이를 붙이면 경판 작업은 끝이다.
작업과정 하나하나가 오늘날 반도체칩을 만드는 작업만큼이나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핵심기술인 글자를 새기는 작업만으로도 능숙한 기술자가 하루에 40자 정도를 새기는 정도였으니, 한달에 경판 2장을 만들기도 빠듯했다. 연인원으로 따지면 1백30만명. 여기에 나무를 베어오고 판자를 켜는 인원까지 합치면 엄청난 인력과 물자가 동원된 작업이다. 한마디로 고려국의 운명을 걸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든 팔만대장경판이다.
셀룰로오스와 리그닌으로 지어진 마법의 성
질곡과 외침의 역사를 수없이 겪어오면서도 오늘날 팔만대장경판을 마주할 수 있는 비밀의 열쇠는 어디에 있을까. 사람들은 ‘부처님의 뜻이다, 보관건물의 구조와 위치가 합리적이어서다, 옻칠을 해둔 탓이다, 바닷물에 삶아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닥에 숯을 묻은 탓이다’라고 나름대로 주장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비밀의 열쇠는 나무 재료의 우수성에 있다. 나무조직은 셀룰로오스라는 철근과 리그닌이라는 콘크리트로 벌집모양의 세포를 만들어가는 독특한 건축술로 구성돼 있다. 이 방법으로 지어진 ‘마법의 성’인 나무조직은 죽어서도 수천년을 거뜬히 버틸 수 있다. 다만 나무조직은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나오는 불사신 영웅 아킬레스처럼 치명적 약점을 가진다. 바로 수분이다. 그러나 수분만 쫓아내면 7백50년 정도의 세월을 버티는 일은 겨우 시작단계일 만큼 보존성이 뛰어난 재료가 바로 나무다.
이런 나무의 특성을 우리 선조들은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경판을 새기기 전부터 나무를 완전히 말리는 일에 필요한 조치를 모두 취했으며, 만들어진 경판은 어떻게 보관해야 자손만대에 전해질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보관건물은 바람이 잘 통해 습기가 나무에 머물 시간을 주지 않도록 설계됐다. 커다란 바람창을 여러 군데 붙이고 건조한 산바람이 경판의 습기를 뽑아내 계곡으로 빠져나가도록 했다. 아울러 경판을 옆으로 세워 건물 내의 아래위 공기이동이 쉽게 이뤄지도록하는 조치도 잊지 않았다. 한마디로 ‘습기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선조의 슬기로움이 아로새겨진 팔만대장경판도 역사기록을 보면 경판 자체가 아예 없어져버릴 뻔한 아찔한 위기의 순간을 여러번 겪었다.
위기일발! 세종대왕의 선택
첫번째 위기는 세종대왕 때였다. 세종 5년(1422) 12월25일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임금은 “대장경판은 무용지물인데, 일본에서 간절히 청구하니 아예 주어버리는 것이 어떤가?”라고 말했다. 이에 대신들이 대답하기를, “경판은 비록 아낄 물건이 아니오나, 일본이 달라는 대로 들어주는 것은 먼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일입니다”라고 말해 일본에 넘기는 결정을 막았다.
또 이런 기록도 있다. 세종 19년(1436) 4월 28일, 임금은 “일본국에서 매양 대장경판을 달라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불교를 숭상하지 아니하고, 또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억지로 청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서울 근처인 회암사나 개경사 같은 곳에 옮겨 두면, 우리도 귀하게 여기는 보배인줄 알고 더이상 달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옮겨오는 과정의 어려움을 들어 반대한다.
불교를 국교처럼 믿어온 일본은 조선 중기까지도 대장경을 보내달라고 애원하고 때로는 협박까지 했다. 특히 조선 초기에는 끈질긴 요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외교현안으로 떠올라 세종대왕도 어지간히 속을 썩이신 것 같다. 만약 그때 일본에 줘버렸더라면 오늘날 얼마나 통탄할 일이며, 서울 근교로 옮겨왔더라도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격변기에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두번째 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27일에는 해인사 코앞인 성주를 점령했다. 성주는 그들이 그토록 탐내던 팔만대장경판이 보관돼 있는 합천 해인사와 하루 이틀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다. 그러나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해 거창과 합천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일본군의 해인사 진입을 막아냈고, 스님들도 승병을 모아 해인사를 지켰다.
세번째 위기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다. 남침한 인민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미처 북쪽으로 퇴각하지 못한 1천여명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게릴라 활동을 폈다. 소탕작전을 벌리던 국군은 미공군에 공중지원을 요청한다.
1951년 12월18일 김영환 대령이 이끄는 전투기는 해인사 폭격명령을 받고 출격했다. 하지만 그는 여러가지 이유를 붙여 미 작전당국의 명령에 불복하고 폭격하지 않았다. 당시의 전투기는 5백 파운드짜리 폭탄 2개를 적재하는 F-51이어서 만약 명령대로 폭격했다면 팔만대장경은 순식간에 재로 변했을 것이 뻔하다.
불길도 피해간 대장경판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된 해인사는 1천2백년의 세월을 간직한 고찰이다. 그러나 수백명의 스님이 기거하는 큰 절에는 화재가 끊이지 않을 수 없다. 대장경판이 만들어진 이후의 7백50년 동안에도 수많은 화재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화재기록은 조선 후기 퇴암스님이 ‘해인사 실화적’이란 책에 기록한 것이 전부다. 기록이 시작된 1695년에서 1876년까지의 2백여년 동안 무려 7차례의 화재가 있었다. 기록에 없는 기간까지 포함한다면 적어도 수십 차례의 화재가 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화재에도 불구하고 대장경판은 무사히 보관돼 왔다. 특히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은 해인사에서 높은 산 쪽으로 지어져 화재가 일어나면 쉽게 불길에 휩싸일 위치에 있다.
산 속은 산 아래에서 위쪽으로 바람이 불기 때문에 불길도 위쪽 건물로 쉽게 번지기 마련인데, 어떻게 그 많은 화재에도 남아있을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다. 단순히 기적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신비하고 경외스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