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방송사에서 방영한 드라마 ‘착한여자 나쁜여자’ 에서는 치매에 걸린 노인 영란 씨(김용림 분)가 등장한다. 어제 일어난 일도 기억하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의 기억에 갇혀 지내는 그는 음식에 집착하고 가족에게 욕설도 서슴지 않는다. 드라마에서는 치매증상이 다소 코믹하게 그려졌지만 치매로 인한 그의 행동은 사실 가족들에겐 고통의 씨앗이다.
치매환자의 80~90%는 알츠하이머와 혈관성 치매가 원인이다. 알츠하이머는 뇌혈관의 장벽이 손상된 경우가 많고, 혈관성 치매도 혈관이 비정상일 때 생긴다. 치매가 혈관과 얼마나 밀접한 관련을 맺는지 보여주는 예다. 혈관·신경계 통합조절 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서울대 약학과 김규원 교수는“혈관을 공략하면 치매를 예방할 수 있다”며 “뇌혈관을 만드는 단백질을 찾아 뇌혈관의 작동 메커니즘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뇌신경세포 운명은 혈관이 좌우
김 교수는 뇌혈관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100년 전에 그려진 한국화 한 폭을 꺼내들었다. 그림은 숭례문의 옛 모습이었다. 성곽 한 가운데 큰 숭례문이 있고 양 옆을 높은 벽이 둘러싸고 있다. 그는 성곽 주변의 생활모습에서 뇌혈관의 역할을 유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문 앞에는 7패시라는 큰 시장이 들어서 있다. 성문을 지나면 육조거리를 거쳐 광화문에 다다른다. 성문이 열리면 성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이들을 위한 시장이 선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문이 단순히 사람과 물자를 통과시키는 역할을 넘어, 7패시라는 시장이 들어서도록 새로운 기능을 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성문이 무너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도적떼가 들끓고 시장은 질서가 사라진다. 결국 외적이 성 안으로 침입해 왕궁의 안위도 위협받을 수 있다.
김 교수는“이를 뇌혈관과 뇌의 뉴런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뇌혈관 벽을 성문이라 하면 뇌의 뉴런이 7패시 역할을 한다. 뇌혈관 벽이 제대로 기능하면‘신분이 확실한’물질만 통과시키고‘도적떼’같은 독성물질은 걸러낸다. 이런 작용은 기억, 판단력, 운동에 관여하는 뇌의 뉴런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
뇌신경세포가 혈관의 영향을 많이 받는 이유는 무얼까. 몸 속 산소 중 약 20%를 뇌에서 소모하는데 이는 신체기관 중 최고 비율이다. 뇌에는 혈관이 많은 만큼 산소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산소는 뇌의 뉴런을 활성화한다. 그런데 혈관에는 포도당, 아미노산, 미네랄 같이 뇌를 활성화하는데 필수적인 물질 외에 독성 물질도 들어있다. 만약 뇌혈관 속을 흐르던 독성물질이 뇌세포로 빠져 나온다면 뉴런이 파괴돼 인간의 사고과정이 마비될 수 있다.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해 뇌혈관은 일반 모세혈관과는 다른 구조를 갖는다. 모세혈관은 혈관내피 세포라는 세포가 얼기설기 붙어 관을 만든다. 관 안쪽에 흐르던 혈액은 혈관내피세포가 얽어놓은 틈 사이로 빠져나와 세포로 이동한다.
반면 뇌혈관은 혈관내피세포 사이가 꼼꼼하게 ‘마감질’이 돼 있다. 이 구조가 혈액 속 독성물질이 혈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아 뇌를 안전하게 보호한다. 이를 뇌혈관장벽(BBB, blood-brain barrier)이라 부른다. 뇌혈관에서 뇌의 뉴런으로 유용한 물질을 보내야 할 때 혈관내피세포막에 붙어있는 운반체인‘트랜스포터’가 선택적 능동수송을 한다. 예를 들어 포도당은 글루트라는 트랜스포터를 통해 혈관 밖으로 빠져나온다.
김 교수는“BBB는 뇌혈관과 주변 세포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생성된다”며“이 상호작용을 알아내면 뇌의 정상기능을 지켜낼 수 있다”고 말했다.
뇌혈관장벽 만드는 핵심 단백질
뇌혈관장벽을 만드는‘장인’은 누굴까. 김 교수는 A-KAP 12(A-kinase anchor protein 12)란 단백질이 뇌혈관장벽을 만드는 데 관여한다는 사실을 밝혀 2003년 6월 네이처메디슨에 발표했다.
A-KAP 12는 뇌혈관장벽을 만드는 핵심 단백질이다. 뇌세포 주변에 산소가 부족해지면 뇌혈관 생성을 촉진하는 단백질인 HIF-1α와 VEGF의 농도가 높아진다.
그 결과 혈관은 사방으로 가지를 치며 성장한다. 김 교수는“산소의 농도가 높아지면 뇌세포는 HIF-1α를 분해하고 A-KAP 12 단백질을 합성하기 시작한다”며“A-KAP 12는 혈관의 생성을 억제한채혈관벽을 단단하게‘마감질’한다”고 설명 했다.
A-KAP 12 단백질 생성 유전자를 없앤 제브라 피시(zebra fish, Danio rerio)의 뇌혈관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혈관에서 붉은 혈액이 흘러나온다.
혈관내피세포 사이에 틈이 생겼기 때문이다. 마치시베리아 한복판에서 채굴된 석유가 중국 대륙까지 하나의 관을 타고 오는데, 중간에 도굴꾼이 구멍을 내면 석유가 흘러나와 주변의 땅을 오염시키는 것과 같은 이치다.
뇌혈관장벽이 무너진 혈관은 정상 세포를 잠식한다. 만약 뇌세포의 어느 한 부분에 암이 생기면, 혈관의‘성문’이 무너져 가지를 친다. 이것이 거듭돼 뇌의 암세포 주변에 혈관이 늘어난다. 뇌를 죽이는‘암세포’에 스스로‘자양분’을 공급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셈이다. 김 교수는“정상인은 A-KAP 12가 항상 발현돼 혈관 수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막는다”고 설명했다.
뇌혈관장벽이 무너지면 뇌에서는 알츠하이머, 파킨슨, 뇌종양, 뇌졸중 등 중증질환이 생길 위험이 높아진다. 김 교수는“도시를 둘러싼 성문이 제 역할을 못하면 도시가 혼란에 빠지듯 뇌혈관장벽이 무너지면 뇌가 손상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혈관과 신경계의 상호작용을 연구해 혈관·신경계 이상 질환이 생기는 근본 이유를 밝히는데 일조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연구단은 지난 5년간 저명한 국제학술지에 5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김규원 단장은 2003년 제 1회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을 받았고, 2005년에는‘한국의 노벨상’이라고 일컫는 호암상을 수상했다. 뇌혈관분야라는 한 우물을 20년 동안 판 덕분에 거둔 쾌거인 셈이다.
Interview 김규원 교수
통합적 사고가 아이디어 원천
김 교수는 통합적 사고력을 강조한다. 특히 혈관·신경계 통합조절 연구단을 이끌면서 혈관과 신경을 통합적으로 조망한다. 간단히 말해 혈관 없이 신경 없고, 신경 없이 혈관 없다는 뜻.
김 교수는 서울대 약대 부임 초기에 세포 안에서 A-KAP 12란 단백질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집중했다. 그는 이 단백질이 세포 안에서 새로운 혈관의 형성을 억제하는 역할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포 수준에서 벗어나 세포들 간의 상호작용에 A-KAP 12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연구하기 시작하자 새로운 세상이 보였다. A-KAP 12는 혈관내피세포와 성상세포, 뇌의 뉴런과 상호작용해 뇌의 독특한 내벽구조를 만들었던 것. 그가 세포수준이라는 방에 갇혀있었다면 밝혀낼 수 없던 새로운 사실이었다.
김 교수가 뇌혈관 연구에 뛰어들 당시 뇌혈관은 미개척분야였고, 그나마 연구가 활발했던 뇌신경은 뇌혈관과의 연결고리를 갖지 못한 채 단독으로 연구됐다. 그러나 이제는 뇌의 뉴런에 뇌혈관이 미치는 영향이 밝혀졌고, 이것이 발생시키는 질병 연구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는 연구원들에게도 통합적인 사고를 권한다. “외국저널에 실린 논문은 대부분 세포 안에서 일어난 현상이 그 세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핀다”며 “세포 외부에서 세포에 끼친 영향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세포에 일어난 현상이 다른‘세포’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한다. 실험실 연구원들은 통합적 사고의 중요성을 절감하면서도 과거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통합성을 잃는 때가 있다. 그때마다 그는 개인면담으로 학생 스스로 뇌혈관과 뇌의 뉴런간의 관계에 관해 연결점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