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영국의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우연히 발견한 항생제 페니실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부상자 수백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 그 뒤 개발된 여러 항생제는 사람들이 세균에 감염돼 병이 났을 때 효과적인 치료제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런데 항생제를 먹다보면 속이 불편하거나 심지어 설사가 날 때도 있다. 왜 그럴까.
항생제를 복용하는 사람 5명 가운데 1명꼴로 겪는다는 이 증상을 ‘항생제관련 설사병’(AAD, antibiotic associated diarrhea)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은 항생제 복용을 중지하면서 증세도 사라지지만 심한 경우 대장염으로 발전해 고생하기도 한다. 미국 미시간주립대 토마스 슈미트 박사팀은 최근 장내 공생 미생물의 구성변화가 항생제관련 설사병의 원인임을 밝혔다.
즉 AAD가 진행 중인 환자 장내세균을 조사해보니 정상인의 장에 많이 존재하는 클로스트리디아(Clostridia)라는 공생세균이 급격히 감소해 있음을 발견했다. 연구자들은 장이 영양분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클로스트리디아가 삼투압 조절에 중요한 역할을 함을 밝혔다. 다행히 항생제투여를 끊자 클로스트리디아가 다시 늘어났고 설사도 그쳤다.
그러나 항생제 남용으로 장내 유익균이 줄어들 경우 인체가 해로운 세균의 공격을 받아 심지어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통계가 나와 있지 않지만 미국은 매년 수천 명, 캐나다는 수백 명이 ‘슈퍼박테리아’로 목숨을 잃는다. 그런데 이 슈퍼박테리아라는 녀석은 사실 그렇게 무시무시한 존재가 아니다. 문제는 평소 이 녀석들을 꽉 잡고 있던 유익균이 강력한 항생제로 몰사하면서 슈퍼박테리아의 고삐가 풀린다는 데 있다.
즉 특정한 목표만을 공격하는 항체와는 달리 항생제는 다수의 세균에 무차별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장내 미생물 생태계가 교란된다. 이와 같은 공생 미생물의 구성변화에 따른 급성 대장질환과 마찬가지로 최근에 만성염증성 대장질환으로 알려진 크론병과 궤양성 대장염 같은 경우에도 장내 공생 미생물 구성의 불균형이 주원인이라는 보고가 나오고 있다.
면역계 과민해지면 유익균 죽여
사람과 인체 거주 미생물의 상호작용, 즉 공생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단계다. 지난 10여년 동안의 연구로 여러 사실이 밝혀졌지만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다.
최근 필자가 속해있는 이화여대 분자생명과학부 이원재 교수팀은 숙주의 면역계와 장내 공생세균의 생태계가 밀접한 관계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교수는 사람보다 훨씬 단순한 장 구조를 갖고 있고, 감염시 주로 선천성 면역에 의존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초파리를 대상으로 공생세균과 숙주 인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연구했다. 초파리 장에는 대략 25종의 공생세균이 살고 있는데, 기본 역할은 사람의 장에 사는 공생세균과 비슷하다.
필자와 동료들은 초파리의 ‘코달’(Caudal)이라는 유전자를 주목했다. 코달은 항균펩티드를 만드는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한다. 항균펩티드란 동물이 스스로 만드는 항생제로 몸속 미생물의 번식을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만일 코달이 제 역할을 못하면 항균펩티드가 많이 만들어진다. 필자와 동료들은 코달의 발현을 억제한 뒤 장내 세균 생태계의 변화를 지켜봤다. 그 결과 놀랍게도 유익균은 크게 줄어들고 유해균이 늘어났다.
즉 건강한 초파리의 장에는 10만 마리가 넘게 사는 A911이라는 유익균이 코달이 억제된 초파리 장에서는 1000마리 이하로 줄어들었다. 반면 G707이라는 유해균은 평소 몇 마리 살고 있지 않지만 A911이 급감하자 1만 마리 이상으로 늘어났던 것. 그 결과 초파리 장에서 만성염증성 대장질환에서 주로 관찰되는 세포사멸이 증가했고 수명도 단축됐다. 이번 연구결과는 ‘사이언스’ 2월 8일자에 발표됐는데, 미국 매사추세츠의대 닐 실버만 교수는 같은 호에 실린 해설논문에서 “이 교수팀의 실험은 정상적인 미생물 생태계가 유지되기만 해도 병원성 박테리아의 증식을 억제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며 “동물의 면역반응이 미생물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함을 알게 됐다”고 평가했다.
장내 유익균에 영양제 준다
항생제나 면역계 이상으로 장내 유익균이 급감해 질병에 걸릴 수 있다면 거꾸로 이들을 활성화시켜 병을 물리치는 원군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실제 이런 일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연구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프로바이오틱스’(probiotics)를 이용한 치료법으로 프로바이오틱스란 장 기능 개선에 도움을 주는 몸에 유익한 세균이다. 아일랜드 콜크대 펄거스 샤나한 박사팀은 비피도박테리움 인판티스(Bifidobacterium infantis) 35624라는 프로바이오틱스를 대장염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먹였을 때 탁월한 회복효과를 보였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한편 ‘프리바이오틱스’(prebiotics)라는 물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프리바이오틱스란 쉽게 말하면 장 건강에 유익한 공생세균이 장에 잘 서식하도록 도와주는 짧고 간단한 구조의 탄수화물이다. 대표적인 프리바이오틱스로는 올리고과당, 갈락토-올리고당, 락투로즈가 있다. 프로바이오틱스와 비교해 봤을 때 궁극적으로 장 기능 개선을 통한 건강증진이라는 기대효과는 비슷하지만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안전하며, 먹기도 쉽다.
비록 프리바이오틱스 효능에 대한 연구는 초기단계이지만, 염증성 장질환 환자에 투여시 항염증효과가 있음이 보고됐고, 장내 칼슘흡수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보고도 있다. 인체와 장내세균 사이에도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이 그대로 적용되는 셈이다.
인체 즉 숙주만 장내세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공생세균 역시 무시못할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지금까지 비만이나 *2형 당뇨병과 같은 대사관련 질환은 대사관련 유전자의 변형, 식생활 습관, 부족한 운동량이 주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이런 질병의 원인으로 새로운 환경적 요인이 추가됐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장내 공생세균이다.
본래 장내세균은 장이 소화시키지 못하는 영양분을 소화시킬 수 있는 물질로 전환시킴으로써 인간의 장항상성 유지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작용들이 비만이나 당뇨병과 같은 질병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명확하고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비만의 숨은 공범 장내 미생물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워싱턴대 제프리 고든 교수팀은 무균생쥐와 공생세균을 이용해 흥미로운 연구결과들을 발표하고 있다. 먼저 연구팀은 공생세균이 장내 지방단백질 분해효소(LPL, lipoprotein lipase)라는 효소를 활성화시켜 생쥐의 지방조직에 지방을 축적시킴으로써 비만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발견해 2004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 이 결과는 공생세균과 같은 환경요인이 숙주의 에너지 저장을 조절할 수 있음을 보여준 최초의 연구사례라는데 그 의의가 있다.
또한 연구팀은 비만생쥐와 정상생쥐의 공생세균의 구성을 조사했는데, 비만생쥐의 장에서는 펄미큐티스(Firmicutes)라는 공생세균이 정상에 비해 50% 증가한 반면 박테로이데(Bacteroidetes)라는 공생세균은 감소해 있었다. 이런 결과는 비만이 장내 공생세균의 구성과 밀접히 관련돼 있음을 시사한다. 연구자들은 이렇게 변화된 공생 미생물 구성이 실제로 비만을 일으키는지 알아보기 위해 정상 무균생쥐에 비만생쥐의 장내공생세균과 정상생쥐의 장내공생세균을 각각 넣었다. 그 결과 비만생쥐의 장내공생세균을 받은 생쥐 역시 뚱뚱해졌다.
이러한 결과들을 종합하면 비만은 장내 공생세균들의 구성, 즉 펄미큐티스균 증가와 박테로이데균 감소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머지않아 장내미생물을 조절해 살을 빼는 다이어트약이 나오지 않을까.
2형 당뇨병*
인슐린 분비가 부족하거나 인슐린의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당뇨병의 한 형태. 유전적 요인과 함께 비만, 수면부족, 스트레스, 식생활 서구화 등이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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