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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포닭 블루스' 그리는 생명과학자 신인철

‘포닭 블루스’주인공을 쓱쓱 그려나가는 능숙한 솜씨에서 20년 내공의 만화가 관록이 느껴졌다.


‘어? 잘못 봤나….’

문이 열려있는 신인철 교수 연구실에 들어서다 눈앞 광경에 기자는 주춤했다. 암이 생기는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과학자 방에 어항이 잔뜩 들어차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문패를 다시 보니 분명히 ‘502호 부교수 신인철’이라고 써있다.

“아! 오셨네요.” 취미로 키우는 열대어라며 머쓱하게 웃다가 기자가 관심을 보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에 들어간다.

“이게 시클리드라는 물고기입니다. 아프리카 말라위 호수에 사는 녀석들인데 놀라운 속도로 종(種)분화를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성격도 거칠어 수놈들끼리 싸우다가 죽기도 합니다.”

며칠 전 넘버2, 넘버3가 힘을 합쳐 컨디션이 안 좋은 넘버1을 죽이는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지금은 두 녀석이 넘버1 자리를 놓고 싸움이 한창이다. 한 녀석이 주둥이로 상대를 밀쳐내자 상대가 몸을 돌려 역공을 한다.

“저러다가 또 한 마리 죽겠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작은 뜰채를 집더니 둘을 갈라놓는다.

“어릴 때부터 생물을 키우는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저희 집은 조그만 동물원이었죠. 분자 수준에서 연구를 하지만 이렇게 생물체를 관찰하는 일이 재미도 있고 아이디어를 내는 데 영감을 주기도 합니다.” 학부에서 일반생물학을 강의할 때 직접 연구해보지 못한 동물행동학이나 진화론 부분을 설명하는데 생물을 키우는 취미가 도움이 된다고 신 교수는 덧붙였다.

1986년 KAIST 생물학과에 들어간 신 교수는 대학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백질인산화효소’(protein kinase)를 줄기차게 연구하고 있다.

세포핵에 있는 세포 분열 억제 단백질의 특정 아미노산에 단백질인산화효소가 다가가 인산을 붙이면 단백질이 세포질로 이동하면서 파괴된다. 그 결과 세포는 분열 조절 기능을 잃고 암이 생길 수도 있다. 신 교수는 미국에서 박사후 연구원(post doctor, 줄여서 흔히 ‘포닥’이라 부른다)을 할 때 이런 메커니즘을 밝혀 ‘네이처 메디신’등 저명한 저널에 논문을 냈다.


만화 좋아하는 옆방 교수가 발탁

신 교수 이름이 생명과학자들 사이에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는 이보다 한참 전인 1992년부터다. 당시 KAIST 박사과정에 막 진학한 그가 어떤 천재적인 업적을 냈던 것일까.

“분자생물학회에서 계간으로 내는 소식지인 ‘분자생물학뉴스’에 ‘대학원생 블루스’라는 만화를 연재했습니다. 요즘도 학회에 가면 가끔 그때 만화를 재밌게 봤다는 분들을 만납니다.”

어릴 적 길창덕, 이두호 같은 만화가들의 작품에 푹 빠져있었던 신 교수는 특히 길창덕 화백의 주인공 ‘꺼벙이’를 즐겨 모사하곤 했다. 중학생 때는 만화책을 만들어 친구들이 돌려보기도 했다고. 그러다 고등학교에 가면서 또 다른 취미인 록음악에 푹 빠져 지내느라, 대학교 때는 놀러 다니느라고 (물론 공부도 했지만) 만화를 ‘끊고’ 있었다.

“대학원에 들어가 기숙사에 살면서 실험실 생활을 하다 보니 무료한 시간이 가끔 있더군요. 그래서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취미삼아 이것저것 그리던 그를 주목한 사람은 옆 실험실 지도교수였던 유욱준 교수. 알고 보니 유 교수는 만화를 포함해 다양한 문화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다. 만화책과 같은 창작 작품은 빌려보지 말고 사서봐야 만화가들이 여유를 가지고 작업할 수 있다는 게 평소 유 교수의 지론이다. 당시 ‘분자생물학뉴스’ 편집간사였던 그는 옆방 대학원생의 만화를 보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저를 부르시더니 대학원생의 애환을 그린 만화를 연재해 보라시더군요. 재밌겠다 싶어서 얼른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유 교수가 아이디어를 줬지만 점차 신 교수 스스로 주변에서 에피소드를 찾아 가공하는 여유가 생겼다. 박사과정이 거의 끝나가던 어느 날 유 교수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실험실에 들어오는 대학원생들이 실험을 쉽게 배울 수 있게 ‘그림이 곁들여진’ 실험매뉴얼을 만들어보자는 것.

“일주일 간 합숙하며 책을 완성했습니다. 그 책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학생들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뿌듯했습니다.”

‘분자생물학 그림여행-Biomedical Research’는 생명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고 웬만한 실험실에 복사본 한두 권은 있었다. 재작년 10년 만에 내용을 보강한 재판을 찍기도 했다(http://www.bunjabang.com).

기초과학지원연구소, 한양대 의대에서 5년간 박사후 과정을 한 뒤 2000년 미국으로 건너가 밴더빌트대에서 박사후 과정을 시작했다. 미국생활은 한국에서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많은 실험실이 학생과 연구원 다수가 아시아계이고 우리가 전형적인 미국인이라고 생각하는 백인은 한두 명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미국 실험실이라고 다 ‘셀’이나 ‘네이처’같은 데 논문을 싣는 게 아니더군요.”

미국인 대다수는 실생활에서 좀 더 유리한 분야를 택하고 순수 과학을 전공하는 소수는 정말로 과학을 좋아하기 때문에 연구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고 느꼈다. 선진국에서 순수과학은 보수와는 크게 상관없이 정말 하고 싶은 사람만이 하는 일인 셈이다.

미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생하고 각국에서 모인 연구자들과 티격태격하며 적응해나가고 때로는 밤샘연구도 하고 꿈에도 그리던 저널에 논문도 내보고…. 5년 동안 실험실 생활의 진수를 골고루 맛본 신 교수는 2005년 한양대 생명과학과에 부임했다.
 

실험실의 대학원생들은 만화를 잘 그리는 신 교수 덕분에 연구에 대해 토의하는 시간이 즐겁다.


내 만화는 블랙 유머

“미국생활이 끝날 즈음에 한 선배로부터 ‘한민족과학기술자네트워크’(http://www.kosen21. org)의 웹진에 만화를 연재해보라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이국(異國)에서의 박사후 과정 모습을 만화로 그려보면 앞으로 비슷한 길을 갈 사람들에게 유익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2005년 2월호부터 연재하고 있는 만화 ‘포닭 블루스’는 외국에서 포닥을 하고 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대학원생이나 예전에 비슷한 경험을 했던 교수들에게 인기다. 굳이 ‘닥’을 ‘닭’으로 쓴 이유는 실수로 실험이 실패했을 때 연구원들이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으며 ‘어이구, 이 닭대가리…’라고 자조하는데서 착안했다. 때로는 미소를 머금기도 하고 가끔은 페이소스에 가슴이 뻐근해진다. 처음 미국생활을 하는 주인공은 (아직 이름도 없다!) 30대 초반이지만 이미 10여년을 연구에 헌신한 나머지 머리도 많이 빠지고 몸도 펑퍼짐하다. 첫 회는 실험하다 때를 놓쳐 혼자 햄버거 가게에 갔다가 말이 안 통해 결국 그냥 나온다는 내용이다.

돈을 더 벌어오라는 아내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연봉 3만 달러(약 3000만 원)의 고된 실험실 생활을 견디지만 지도교수가 학교에서 쫓겨나면서 새로 만난 아시아계 지도교수에게 이용당하다 실험실을 나온다. 연구에 손 뗀 노(老)교수 밑에서 고생고생하다 좋은 결과를 얻어 마침내 괜찮은 저널에 논문을 싣는데 성공한다. 최신호는 이미 국내 교수로 자리 잡은 선배(신 교수의 분신?)가 주인공을 신임교수로 추천하는 장면.

“주인공은 때로는 어수룩하고 가끔은 속물적일 때도 있지만 연구할 때만은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순수한 열정이 있습니다. 이런 친구는 보답을 받아야겠죠?” 이미 포닭 블루스 팬이 돼 버린 기자 역시 주인공이 잘 풀리기를 기대해본다.

현재 단백질인산화효소와 암 발생 사이의 메커니즘을 좀 더 정밀하게 규명하고 있는 신 교수의 실험실에는 대학원생이 6명 있다. 이 가운데는 취미로 록 밴드에서 음악을 하는 학생도 있어 얼마 전에는 그 학생의 공연에 다녀오기도 했다.

“저도 딴 짓을 했는데 뭐라고 말할 수는 없죠. 하하! 사실 저런 친구들이 연구도 더 잘해요.”

신 교수는 수업에 만화를 도입, 생명과학 개념을 알기 쉽게 설명해 학생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지만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새 학기가 되면 수업 과정을 대폭 개선하려고 하지만 잘 안 됩니다. 바쁘다는 건 핑계겠지요….”

박사를 마치고 무려 10년 간 포닥을 한 신 교수는 자연과학에 대한 애정 없이 좋은 논문을 내는 데만 관심이 있는 조급한 학생들을 볼 때 ‘저 친구는 이 길이 아닌데…’하는 생각이 든다. “진짜 이공계 위기는 적성이 맞지 않는 학생들이 교수가 디자인한대로 실험을 하고 논문을 내 박사가 ‘양산’되는 현실입니다.

스스로 연구를 설계하는 능력이 없으면 얼마가지 못합니다.”

포닭 블루스는 단순히 웃기기 위한 만화가 아닌 ‘블랙 유머’를 지향한다는 신 교수의 말에서 21세기 한국 과학자의 고뇌가 느껴졌다.
 

한민족과학기술자네트워크 웹진에 매달 연재되는‘포닭 블루스’는 유학생들과 박사후 연구원 경험이 있는 과학자들에게 인기가 있다.


재치만발 돌발문답 3
DRAWING THE BLUES~~!


1. 벽에 보니 자녀들이 그린 만화가 붙어있다. 혹시 자녀들이 과학자가 아닌 만화가가 되겠다고 하면 섭섭하지 않을까?
과학자보다 만화가가 더 훌륭한 분들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공상과학 만화를 보며 과학자의 꿈을 키우던 학생들이 만화에서 받은 영향은 우수한 과학논문이 주는 영향 그 이상이다. 나도 ‘소년중앙’에 연재되던 이두호 화백의 과학학습만화를 보고 꿈을 키웠다. 내 아이가 만화가가 된다면 너무 좋을 것 같다.

2. 최근 본 만화 가운데 과학동아 독자들에게 추천해줄 만한 것은?
최근 인기 있는 만화는 독자들이 더 잘 알 것 같은데…. 나는 어린 시절 즐겨보던 만화를 다시 찾곤 한다. 최근에는 이정문 작가님의 ‘캉타우’를 단행본으로 샀다. 1970년대 ‘새소년’이라는 잡지에 연재되던 아주 독특한 캐릭터로 로봇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이다. 다운받거나 빌려보지 말고 맘에 드는 작품은 꼭 사서 소장하기를 바란다.

3. 과학동아 자매지로 격주간 ‘어린이과학동아’가 있다. 혹시 지면이 주어진다면 초등학생을 위해 꼭 그려보고 싶은 만화가 있나?
어린이 만화를 그리려면 어린이의 눈높이로 돌아가야 한다. 10년간의 포닥 생활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데도 포닥 이야기를 그리려니까 현실감이 떨어졌다. 하지만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아이와 요즘 많은 교감을 하고 있어서 초등학생을 상대로 한 현장감 있는 생명과학 관련 만화를 그려보고 싶다. 하지만 시간이 문제다.

생생현장 따라잡기
어린 시절 추억을 되살린 전시회


“여보세요? 이두호 선생님이시죠?”

“네, 맞습니다만….”

“네, 저는 한양대학교의 신인철입니다. 선생님, 이렇게 전화 나누게 돼 영광입니다.”

작년 2007년은 ‘생물학의 해’였다. 생물학의 해 행사의 일환으로 나는 ‘만화로 배우는 재미있는 생물학’ 이라는 부스 전시회의 기획을 맡았다. 국내외 동물만화, 자연학습만화 등을 그린 작가들을 직접 섭외해 작품을 전시하는 행사를 계획했다.

이두호 선생님이 많은 작품을 그린 ‘소년중앙’을 초등학생 시절 탐독하며 과학자(가끔은 만화가)의 꿈을 키우던 나는 이런 기회를 통해 이두호 선생님과 통화를 하는 것이 무척 영광이었다. 최근에는 ‘머털도사’ 같은 시대물을 집필하지만 1970년대 연재했던 ‘무지개 행진곡’을 비롯한 가족 만화는 아직도 내게 진한 감동으로 남아있다.

연재만화뿐 아니라 과학 학습 기획물의 일러스트레이션도 이두호 선생님이 주로 담당했었는데 ‘시대를 초월한 맹수들의 혈투 - 티라노사우르스와 맘모스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동물의 왕을 뽑는다’ 같은 기획물은 어렸을 때 손에 땀을 쥐며 읽던 기억이 생생해 이 행사 핑계를 대고서라도 꼭 다시 보고 싶었다. 아쉽게도 이두호 선생님은 예전 작품의 원고를 갖고 있지 않아 내가 생각했던 방향의 전시회는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행사를 기획하면서 동물을 의인화 한 만화를 주로 그리시던 정운경 선생님, ‘달려라 벤’ 등의 동물 만화를 그리시던 이향원 선생님 등과 전화통화를 나눌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정운경 선생님의 동물만화를 따라 그리며 생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고 이향원 선생님의 만화를 탐독하며 동물에 대한 사랑을 키웠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선구자 역할을 했던 이 작가들의 작품, 비록 불법 복제 형태로 소개됐지만 많은 어린이들의 꿈을 키워줬던 ‘바벨2세’ 같은 외국만화들이 없었다면 1970년대 과학자의 꿈을 키운 ‘사이언스 키즈’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2008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기 기자
  • 사진

    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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