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에 별이 쏟아지고 계곡 물이 울어대며, 산새 소리가 아침을 깨우고 맑은 물에만 산다는 물고기 벼루치가 노니는 곳. 깊은 산골 마을인 경상북도 봉화가 류춘수 회장의 고향이다. 류 회장은 몇년 전 그곳에 조그마한 스튜디오를 지어 주말마다 작업도 하고 휴식도 취하러 간다고 했다.
그런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류 회장은 어렸을 때부터 감수성이 풍부했고, 한국의 자연을 사랑했다. 한국 자연에 대한 사랑은 자연스럽게 그림으로 나타났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그림 솜씨가 매우 빼어났다. 그는 “경상북도에서는 그림 대회에만 나가면 1등을 받았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림과 함께 그가 사랑한 것은 과학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천문학이 그의 취미였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책을 즐겨 읽었다. 또 그가 좋아한 과목은 수학과 물리였다. 교과서의 공식을 외우는 대신 스스로 논리를 세우고 공식을 만들거나 증명하는 일을 즐거워했다. 지금도 그는 차분히 생각만 한다면 수학이나 물리 공식을 만들 수 있다고 자부했다.
류 회장은 학창 시절 그렇게 공부를 잘하지는 않았다고 털어놨다. 중학교까지는 잘 했는데 고등학교에 올라오면서 당구를 치거나 영화를 보러 다니는 등 많이 놀러 다녔다고 한다. 당시 미술과 과학을 좋아했던 류 회장은 미술가나 건축가가 되려고 생각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건축가를 선택했다. 논리적인 사고를 예술로 표현한다는 것이 맘에 들었다. 그는 지금도 그의 직업을 너무나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가 바로 ‘대-한민국’의 함성과 붉은 물결로 뒤덮였던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을 설계한 사람이다.
그림과 별 보기를 좋아한 고교생
한국 월드컵 대표팀은 2002년 6월 상암 경기장에서 독일팀에 패하면서 아쉽게 4강 신화를 끝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함성은 세계를 흔들었고, 팽팽한 흰 천막(인조섬유막)이 지붕처럼 뒤덮은 아름다운 상암 경기장도 세계인의 가슴에 한국의 미를 아로새겼다. 상암 경기장은 방패연과 황포돛배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한국의 미를 월드컵 내내 세계에 뽐냈다.
조선시대 사극을 보면 장터나 잔치집 앞마당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천막이다. 장대를 세우고 광목을 씌운 뒤 줄로 천을 팽팽하게 당기면 천막이 만들어진다. 천막 그늘 아래서 잔치판이 벌어진다.
상암 월드컵 경기장은 이런 천막을 ‘막 건축’이라는 최신 기술로 현대에 재현했다. 다만 소나무 장대 대신 철골 마스트(막대)를, 새끼줄 대신 케이블을, 광목천 대신 아크릴이나 테플론 같은 인조섬유를 쓴다. 막 건축은 1988년 서울올림픽, 1993년 대전엑스포 때 국내에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해 이번 월드컵에서 꽃을 피웠다.
월드컵 경기장 중에는 막 건축물이 많다. 기둥 없이 드넓은 공간을 만들 수 있어 야외경기장에 제격이기 때문이다. 상암 경기장은 방패연이나 황포돛배를 떠올리게 하며, 부산 경기장은 막으로 된 공, 수원 경기장은 비상하는 날개를 연상하게 한다. 막 건축은 낮에는 햇빛이 실내를 밝게 하고 밤이 되면 내부의 빛이 바깥으로 투과돼 멋진 야경을 연출한다.
대기업 물리치고 상암 축구장 설계
류 회장이 1998년 월드컵 경기장 공모전에 도전했을 때였다. 주위에서는 그를 무모하다고 말렸다. 당시 H, P사 등 국내의 내로라 하는 건설회사들이 하나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사실상 당선을 예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류 회장은 골리앗에게 도전했다. 한 건설회사가 그에게 찾아와 같이 도전해보자고 제의했다. 류 회장이 보기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불가능해 보인다는 사실이 그의 투지를 불태웠다. 그는 월드컵 경기장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1998년 월드컵이 열린 프랑스로 향했다. 그는 프랑스행 비행기 안에서 우연찮게 잡지에 실린 방패연 사진을 봤다. 그 사진에서 방패연을 연상시키는 상암 경기장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파리의 호텔 안에서 밤새 그 아이디어를 살린 경기장을 그렸고, 공모전에서 1등을 차지했다. 그는 마침내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이 됐다.
류 회장은 독특한 건축, 한국의 미를 살린 건축으로 유명하다. 류 회장은 “어렸을 때부터 ‘고정관념은 나의 적’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수학문제를 교과서에 없는 다른 방법으로 푸는 것을 즐겼다. 대학 시절에는 전국을 돌며 깊은 산 속의 사찰을 그렸다. 우리 조상들의 미를 되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류 회장은 “유학 안간 것이 다행”이라며 “덕분에 한국 산천에 대한 애정이 생겼다”고 말했다. 한국 산천에 대한 애정과 독창적인 것을 고집하는 사고방식이 지금까지 그의 건축 세계를 이끌었다.
그가 한국의 미, 자신만의 미를 찾기 위해 걸어왔던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한양대 건축학과에 입학한 뒤 그는 ‘아폴로 11호가 달나라에 도착한 딱 하루’를 제외하고는 맘 편하게 쉰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림을 잘 그리던 류 회장은 건축 동아리에 들어가 수업이 끝나면 늘 그곳에서 밤새 건축물을 그리고 설계를 했다고 한다. 그의 실력은 단연 뛰어나 학생 때부터 이화여대와 서울대의 건물을 디자인하고 설계했다.
류 회장은 졸업한 뒤 한 건축설계사무소에 취직했다. 봉급도 많았고, 능력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는 평생의 스승으로 생각하는 건축가 고 김수근의 건축사무소를 우연찮게 봤다. 그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설계하던 건축물과 너무나 다른 감각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한국의 미를 그곳에서 발견했다.
류 회장은 바로 김수근 건축가에게 찾아가 함께 일하고 싶다고 부탁했다. 김수근은 류 회장이 일하던 곳의 사장과 친하다며 도의상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류 회장은 바로 다음날 일하던 곳에 사표를 내고, 다시 김수근에게 찾아갔다. 김수근은 마침내 허락했고, 그는 그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봉급이 3분의1로 줄어들었지만 그는 건축에 대해 새로 눈을 뜰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류 회장은 김수근과 함께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체조경기장을 설계하는 등 많은 건축물을 함께 지었다.
창조하는 고통이 가장 큰 즐거움
류 회장은 건축물을 설계하며 ‘발상의 전환’을 강조한다. 그러나 발상의 전환이 그냥 나올 리 없다. 그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번뜩이는 영감이 아니라 끊임없는 생각의 축적”이라고 강조했다. 동그라미를 계속 그리다가 어느 순간 네모가 나오듯이 멋진 건축물을 한번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그림을 그리다 보면 처음과는 전혀 다른 생각이 돌연변이처럼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 필요한 것이 바로 고통스런 인내였다.
“벌레가 고치를 만들어 침잠의 세월을 보내면 나비가 됩니다. 많은 이들이 벌레에서 바로 나비가 되고 싶어해요. 이것이 바로 표절입니다. 고통을 겪어야만, 계속 실패해야만 마지막에 창조품이 태어납니다.”
류 회장은 표절이 판치고 편한 길만 찾으려는 요즘 세태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기자에게 ‘고락’(苦樂)이라는 한자를 직접 써주고는 “고통이 곧 즐거움이며, 고통 없는 즐거움이 바로 마약”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류 회장은 “어떤 공모전에 출품된 건축물이나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 등의 작품집을 보면 외국에 있는 것과 비슷한 건축물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 것을 베끼다가 이제는 한국에 잘 소개되지 않는 아프리카 어떤 나라의 건축물을 베끼는 일도 많다고 우려했다.
청소년들의 이공계 기피 현상도 그들이 ‘고통이 즐거움’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과학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인데 이를 기피하고 쉬운 길, 돈을 많이 버는 길로 가는 현상은 과학의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려는 것이라며, 이런 사람들은 결국 과학의 즐거움을 모르게 된다고 안타까워했다.
자연 살리는 건축 해야
그는 건축을 과학이나 예술의 눈으로만 봐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건축은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건축을 과학만으로 또는 예술만으로 보려고 하면 사람이 없는 건축물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가 설계한 서울 강남 리츠칼튼호텔은 아늑한 진입로로 유명하다. 류 회장은 자동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이 길에서 시골 신작로의 정서를 느끼길 바랬다. “자동차를 타고 오면서 세상살이에 시달렸던 마음이 편해지고,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이 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 그는 말했다.
월드컵 경기장도 아름다움에 앞서 관객과 선수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 점을 먼저 고려했다고 한다. 월드컵이 열린 날 그는 그곳에서 사람들이 그의 계획대로 편안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희열을 느꼈다. 그의 회사가 있는 건물도 1층 현관에 있던 오래된 나무를 뽑아버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건물과 어울리게 설계했다.
류 회장은 과학적인 마인드와 예술적인 감성, 그림 솜씨가 있는 청소년이라면 건축가가 정말 도전해볼 만한 직업이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건축은 자연을 많이 파괴했지만 앞으로는 자연을 살리고 공존하는 건축이 활발해지고, 역사적 전통과 현대의 삶을 조화시키려는 새로운 건축물이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 과학이 발전하면서 첨단 재료와 공법이 건축에 많이 접목되고, 자연환경이 열악한 곳에서는 우주기지와 같은 첨단 건축물도 세워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건축가가 얼마나 좋은지 아세요. 정년이 없죠. 곳곳에 공부할 거리가 쌓여 있어요. 해외 여행을 가더라도 건축가는 공부하러 가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여행가보다도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어요.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듯 건축가는 멋진 건축물을 남깁니다. 어찌 건축을 안할 수 있겠습니까.”